옳음을 버리고 복종하는 삶으로
옳음을 버리고 복종하는 삶으로
  • 김재홍(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20.02.24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2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9편)

순종을 넘어 복종의 영역으로 이끄는 나오미
성경에 순종하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삶도 있지만 복종을 통해서 한계를 넘고 더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는 삶이 있습니다.
룻기에서 베들레헴을 떠났던 나오미가 모압에서 다 망하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데, 룻의 마음에는 시어머니를 따르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베들레헴에 있을 때는 풍족했는데 베들레헴을 떠나면서 궁핍해지고 사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룻의 마음에 ‘내 인생이 다 망한 인생인데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사 시대 때 사람들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오는데,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는 사사 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나오미는 유다 땅에 기근이 오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기근을 피하여 모압으로 갔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자기 옳음을 좇아갔다가 결국 다 망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그도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나오미는 “나를 따라오지 말아라. 이제 나를 따라와 봐야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라고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간청합니다. 성경에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다’라고 했는데, 룻의 마음에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후 룻이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룻이 베들레헴에 가서 이삭을 주우러 보아스의 밭으로 갔고, 보아스를 만나 양식을 얻고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룻을 복종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길로 인도합니다. 룻에게 기업을 잇기 위해 밤에 몰래 보아스의 발치에 있는 이불을 들고 들어가서 누우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모압 여자들은 음란하다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다가 재앙을 만난 적이 있었기에 모압 여자들에 대해서는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가서 누우라고 명했으니, 룻이 과연 그렇게 하고 싶었겠습니까? 룻의 마음에 그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아스에게 기업을 이으라고 정식으로 요청하지, 왜 이런 방법으로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는 기업을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장자가 대를 잇지 못하고 죽으면 차자가 그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을 형의 족보에 올려줘야 합니다. 둘째도 자식을 낳지 못하면 셋째가 형수와 결혼해서 대를 이어주어야 합니다. 만약 대를 이을 형제가 없으면 제일 가까운 친족이 기업을 이어주어야 합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이었기에 기업을 이어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의무를 이행할 건지 정당하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발치의 이불 아래 누우라고 하는지? 그것은 음란한 여자로 오해받을 수 있고 잘못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어서 하고 싶지 않은데,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그대로 복종합니다.

나오미에게 복종한 룻의 삶
룻은 베들레헴으로 와서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보아스의 밭에 간 일이나 보아스를 만나게 된 일, 보아스가 룻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한 일, 줌에서 조금씩 뽑아 던지라고 해서 룻이 많은 이삭을 줍게 한 일 등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룻이 복종의 영역으로 갔을 때 순종하며 입은 은혜와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족보에 여자 이름은 올리지 않는데, 단 네 명의 여자들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 있습니다. 그 중에 룻의 이름이 있습니다. 또한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룻이 복종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와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처럼 순종의 영역에서 복종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지금까지 경험했던 은혜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종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고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탄이 넣어주는 옳음을 받아들이고 불신하고 대적하는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종하는 삶을 살면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 복을 받는데 이런 복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자기 옳음’입니다. 만약에 룻의 마음에 자신의 옳은 생각 하나가 들어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니 정식으로 기업을 이어주어야 하는 규례가 있는데, 내가 왜 굳이 보아스 발치의 이불을 들고 그 곁에 누워야 하는가? 시어머니 인생이 다 망했고 달리 살 길이 없으니까 나를 팔아먹으려는 거 아냐?’ 하고 오해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자기 옳은 생각을 가지고 불신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룻의 마음에서 이 옳음이 버려졌을 때 복종하는 삶을 살고,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룻은 오벳을 낳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에 쓰임을 받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역사에 참예했습니다. ‘자신의 옳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항상 사망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룻의 마음에서 자기 옳음이 버려지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온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모양만 내는 형식적인 신앙인
구원을 받았으면 교회에서 당연히 순종하는 삶을 배웁니다. 그런데 복종하는 삶도 배웠을까요? 한두 번 순종해 보았지만 복종하는 삶을 배우지는 못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에 옳은 생각이나 판단이 많이 올라오고 때론 불만이나 불신도 올라옵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삶만 배웠지, 복종하는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정확히 처리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것 때문에 나중에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신앙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의 모습인 복종하는 삶입니다. 그 세계를 안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옳음이 악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인간의 선과 옳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옳음을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옳음이 보였을 때 ‘아, 내가 가지고 있는 의가 더럽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옷이 더러운 옷이었던 것처럼,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진 의, 인간의 의와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삶을 삽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자기 옳음을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옳음에 복종하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느 한계에 이르면 정체되어 더 이상 발전도 성장도 없습니다. 마음 없이 그동안 해왔던 대로 그냥 하는 형식적인 신앙으로 점점 흘러갑니다. 신앙의 모양만 내고 있지, 마음에 소망이 가득 차고 충만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복종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몰라서도 아니고 노력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마음에서 올라오는 많은 옳음들 때문입니다. 옳음이 자신을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탄이 넣어주는 옳음을 하나 둘 마음에 쉽게 받아들이다 보면, 그 옳음이 어느덧 그 사람의 마음을 꽁꽁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망한 사람이고 안 되는 사람이어서 구원받고 주의 은혜 안에 있었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은혜 입은 사람이 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있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옳음이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마음이 됩니다. 옳음 때문에 복종하지 못하고 새로운 영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로 말미암아 신앙의 한계를 넘지 못해 정체된 신앙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나 옳은 생각을 쉽게 따라가면 그것이 자신을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계집아이의 복종
성경에서 말하는 복종은 완전히 굴복되어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에서 패자는 승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종입니다. 전쟁에 패해서 복종된 모습을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작은 계집아이를 통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군대장관 나아만이 작은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갔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계집아이 하나만 사로잡아 갔겠습니까? 좋은 것들을 다 탈취해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계집아이는 왜 나아만의 집에서 수종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저 멋있는 나아만 장군 집에 가서 살고 싶다. 내가 저 집에서 평생 종노릇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순종의 마음일까요? 포로로 잡혀와 어쩔 수 없이 수종을 들고 있으니, 이것은 복종하는 삶입니다.
나아만의 집에서 계집아이가 일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오늘은 좀 피곤한데 늦잠을 자야겠다’ 하고 늦잠을 잘 수 있습니까? ‘오늘은 일하기 싫고 놀러가고 싶다’ 하고 놀러갈 수 있습니까? 작은 계집아이의 삶은 복종하는 삶입니다. 무조건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고 원치 않고와 상관없고, 좋고 안 좋고 상관없이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 계집아이는 나아만 장군을 향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한을 품었을까요?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을 때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이겼기 때문에 꽃다운 나이의 수많은 처녀들의 인생이 짓밟힌 것입니다. 작은 계집아이의 인생도 아람 군대의 나아만에게 짓밟힌 것입니다. 이 소녀의 마음에도 꿈이 있었을 것이고 소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나고 포로로 잡혀와 타국에서 종살이하느라 그 꿈이나 소망이 짓밟혔습니다. 부모님도 있었을 것이고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혼자 포로로 잡혀 와서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그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계집아이는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는가?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싸움에서 이기고 자기를 포로로 잡아갔으니까 작은 계집아이는 나아만 장군을 향하여 원한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을 짓밟고 꿈을 다 짓밟은 나아만이 문둥병이 걸렸다는 사실을 어느 날 알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작은 계집아이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나아만 장군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에게 가서 문둥병이 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니면 ‘고소하다. 네가 내 인생을 짓밟아 놓고 잘될 줄 알았어? 하나님이 치신 거야. 빨리 죽어라. 저 장군이 죽으면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저 사람이 죽어야 아람 나라의 군대가 약해지고 우리 이스라엘이 강해져서 나를 포로 된 삶에서 해방시켜 주겠구나. 잘됐다’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보통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마음은 후자입니다. 그런데 작은 계집아이는 나아만이 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나아만의 아내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너무나 귀하고 복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정말 초라한 신분이고 보잘것없는 계집아이인데, 이 아이에게서 위대한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모습이 나타났을까요? 그 이유는 작은 계집아이의 마음에서 옳음이 버려졌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5장을 하나의 연극이나 드라마라고 했을 때, 등장인물이 많은데 그 중에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1절에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라고 되어 있으니 나아만이 주인공입니까? 정말 위대한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름도 없어서 그냥 ‘작은 계집아이’입니다. 이 계집아이는 아람 왕이나 이스라엘 왕보다도 위대하고 나아만 장군보다도 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작은 계집아이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어린 나이에 타국에 잡혀가서 평생 종살이를 해야 되는데, 어떻게 이런 귀한 마음을 가지고 이처럼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포로로 잡아온 적장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다면 ‘정말 잘됐다. 저 인간이 죽어야 내가 내 나라로 돌아가지’라는 마음이 들어야 당연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짓밟고 내 인생을 짓밟더니만 하나님한테 저주를 받은 거야! 네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짓밟고 잘될 줄 알았어?’ 이런 마음이 들어서 나아만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게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작은 계집아이에게서 놀라운 마음의 세계가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은 옳음이 버려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렇다면 작은 계집아이의 옳음이 어떻게 버려졌을까요? 이 아이는 포로로 잡혀왔기 때문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옳고 그르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일을 할 때 자기 보기에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싶은데, 나중에 주인인 나아만 장군의 아내가 “너, 일을 왜 이렇게 했어?” 하면 자기가 잘했어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작은 계집아이는 이처럼 복종하는 삶을 살면서 자기 옳음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옳으면 뭐해? 내가 보기에 좋으면 뭐해? 주인이 보기에 좋아야 하고, 주인이 뭐라고 하느냐가 중요하지.’ 계집아이가 종으로 살면서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은, 종인 자기가 볼 때 좋거나 옳은 것 말고 ‘주인이 뭐라고 했지?’ 하고 주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계집아이는 종 된 위치에서 옳음을 버리고 복종하는 삶을 살아서 주님이 귀히 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