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일꾼, 작은 계집아이처럼
위대한 일꾼, 작은 계집아이처럼
  • 김재홍(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20.03.1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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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10편)

흙탕물을 끼얹은 감독

어느 책에서 한 시골 학교 야구부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골 학교에서 야구부를 만들고 감독을 모셔왔는데, 아주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시골 학교 아이들은 야구가 유일한 즐거움이어서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실력이 쭉쭉 성장해서 드디어 전국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학부형들이 너무 좋아서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새 유니폼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시합을 하는데, 기대와 달리 경기 내용이 형편없었습니다. 감독이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 실력은 아닌데 오늘 왜 이렇게 경기를 하지?’라고 생각하다가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한 회가 끝나고,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모은 뒤 특별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물동이에 흙탕물을 가득 담아 아이들 유니폼에 다 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경기를 아주 잘했습니다. 그동안 새 유니폼을 버릴까봐 슬라이딩도 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다 보니 게임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은 계집아이의 인생에 흙탕물을 끼얹었습니다. 계집아이의 인생이 다 망해 자기를 지킬 이유나 도사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흙탕물을 끼얹으실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등등의 일을 겪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원망하는 것은,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하고 마음에 옳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흙탕물을 한 바가지 더 부어주실 것입니다. 

위대한 계집아이처럼
작은 계집아이는 마음이 망한 위치로 가니까 자기를 세우려는 마음이나 회복하려는 마음이 없어져서, 하나님의 마음이 다가올 때 그 마음을 그대로 흘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계집아이가 나아만 장군을 모시고 살다 보니 나아만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나중에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했을 때 “내 생각에는…” 하며 분한 모양으로 떠나가려고 한 것을 보면, 나아만은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계집아이가 생각해 봅니다. ‘나아만 장군한테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에게 가서 문둥병을 고치라고 하면, 과연 우리 주인이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할까? 성질이 저렇게 불같은데 선지자가 한 말이 이해가 안 돼도 순순히 받아들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순종하지 못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둥병을 고치실 수 있지만, 성질 더러운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갔다가 분한 모양으로 돌아오면 계집아이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아만이 “네 이년! 내가 네 말을 듣고 사마리아에 갔다가 말도 못할 망신만 당하고 돌아왔다!” 하면, 그날부터 너무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계집아이는 자기 신변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가서 문둥병을 못 고치고 오면 어떡하지?’ 하고, 일이 잘못되어 닥칠 어려움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세우려는 마음,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 자기를 위하려는 마음이 다 버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위대한 마음의 세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계집아이와 같은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쓰시고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계집아이는 아람의 군대장관과 왕을 움직이고 이스라엘의 왕을 움직였는데, 이 시대에도 우리가 그와 같은 일들을 직접 보고 있습니다. 연약하고 문제가 많았던 젊은 형제들이 선교사가 되어서 그 나라의 장관을 움직이고 대통령을 움직이는 일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지 마음에서 자신의 옳음이 버려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한 일들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작은 선지자, 계집아이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육체를 가졌다는 것은 같은 점입니다. 예수님의 몸이나 우리 몸이나 같은 몸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피곤하고 목마른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다른 점은, 예수님은 영이신데 육체를 입으셨고 우리는 육체로 있다가 죄를 사함받고 예수님의 영을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순서가 다를 뿐 결과는 같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도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같은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습니다. 이제 다른 것은, 우리 마음만 예수님과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옳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완벽하게 같아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열왕기하 5장 이야기에서, 작은 계집아이 자리에 ‘한 선지자’를 넣어 봅시다. 아람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한 선지자가 있었고, 그의 스승 선지자가 사마리아에 있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잡혀간 선지자가 아람의 군대장관을 문둥병이 낫도록 스승 선지자에게 인도했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해도 이야기에 문제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계집아이는 신분은 종이지만 삶은 선지자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의 옳음이 버려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위대한 삶을 산 것입니다. 
작은 계집아이는 선지자처럼, 또는 작은 예수처럼 일했습니다. 우리도 자기 안에 있는 옳음을 빼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작은 예수가 됩니다. 예수님과 똑같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 똑같은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인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라고 하지 마십시오. 작은 계집아이처럼 아무것도 없어 보여도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놀라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어떤 생각 어떤 판단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옳아 보여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하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작은 계집아이가 선지자처럼 작은 예수처럼 산 것같이 우리도 작은 예수처럼 살게 됩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왕
성경을 보면, 작은 계집아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면서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왕은 오히려 방해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왕하 5:7)
이스라엘 왕은 자신에게서 올라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러 왔다고 했을 때 ‘이것은 전쟁하려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처럼 자기 판단을 믿고 자기 생각이 차 있는 이스라엘 왕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하고 엘리사 선지자의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안에서 올라오는 옳은 생각, 내가 볼 때 옳다고 여겨지는 판단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이 걸었던 길에서 돌이켜 자신의 옳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아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성경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을 빼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어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이 우리를 통해서도 나타날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죄를 사함받고 난 뒤 예수님이 여자에게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예수님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왜 죄를 범했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자기 눈으로 보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믿었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한 것입니다. 만약 자기 생각과 판단을 믿지 않았다면 그 실과를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내 판단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는데,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다시는 네 생각과 판단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요 5:14)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네 생각과 판단을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생각과 판단을 믿은 결과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기에 ‘다시는 자기를 믿지 말고, 자기 생각과 판단을 따라서 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믿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작은 계집아이처럼 자기 마음에서 올라오는 옳음을 버리고 자기 마음을 버려야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는 옳음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을 버려야 참된 신앙이 이뤄진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옳음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옳음을 버리지 않은 채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옳음이 들어 있으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게 됩니다. 그 옳음은 점점 커지고, 그 옳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교회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도  옳음이 그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결국 불행해집니다. 
복종의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예수님처럼 살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껏 나타내는 귀한 삶에 들어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것이 바로 자신의 옳음입니다. 옳음 하나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다 빼앗아갑니다. 작은 옳음 하나 때문에 많은 것을 잃습니다. 우리가 어떤 옳음이든지 그것을 버리고 복종하는 영역으로 가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 보면, ‘그까짓 옳음이 뭐라고? 그 옳음 하나가 그동안 나를 무능하고 불행하게 만들었구나! 나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은 계집아이를 누가 알아주고 누가 책임져 줍니까? 계집아이는 포로로 잡혀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비록 지금 비참한 위치, 밑바닥에 있다 할지라도 구원받은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편을 탓하고 ‘누구 때문에’라고 하며 주변 사람을 원망하고 있다면 너무 어리석습니다. 마음에 옳음이 꽉 차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옳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귀한 축복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자신의 옳음 하나가 제해지면
오래 전 한밭중앙교회에서 수양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수양회가 시작되는 날, 보일러를 담당한 분이 보일러를 아무리 가동해도 방이 따뜻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보일러 전문가였기에 ‘물이 도는 파이프에 공기가 차서 물이 순환되지 않는가 보다’ 하고 공기를 다 빼냈는데도 방이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보일러는 정상으로 가동되고 어디에도 이상이 없어서, 결국 물을 순환시키는 모터를 갈기로 했습니다. 모터가 잘 돌기는 했지만, 혹시 힘이 모자라서 물을 제대로 순환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모터를 떼어 내서 안을 열어 보니, 조그마한 나무토막이 펌프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물이 흘러가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이 안에 들어갔지?’ 그 나무토막을 빼내니까 방들이 금방 따뜻해졌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옳음만 빼내면 정말 복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작은 예수’로 살면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탄이 잘 알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옳음을 넣어 줍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옳음에 사로잡혀서 지냅니다. 자기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으로 옳음을 키우며 삽니다. 
작은 계집아이는 이름도 없고 신분도 비천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삶은 위대했습니다. 나아만 장군보다 위대하고, 아람의 왕이나 이스라엘의 왕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음에서 옳음이 제해지고 복종하는 삶을 살면 어느 누구보다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위대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제 우리 마음에서 옳음이 생겨날 때 ‘이 옳음이 나로 하여금 복종하는 삶을 잃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멀어지게 만드는구나!’라는 경각심을 가지고 옳음을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옳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갖게 하고, 자신을 믿고 살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우리 모두 마음에서 옳음이 제해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힘있게 경험하길 바랍니다. 마음껏 복음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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