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탕자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
[설교] 탕자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0.06.09 1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6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9편)

둘째 아들은 밥만 먹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신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인생의 두 가지 모습을 그리셨습니다. 먼저 비참하고 어두운 인생을, 다음으로 아름답고 밝은 인생을 그리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해 굶주리며 사는 모습은 인생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그린 것이고, 그가 아버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가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같이 먹고 즐기는 모습은 인생의 가장 밝은 부분을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탕자 이야기에서, 어둡고 비참하게 살던 사람이 밝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안내하고 계십니다.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에서 극심한 괴로움을 겪으며 지내다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둘째 아들은 두 길을 걷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는 길과 먼 나라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것을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7~19)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가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가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 꾸짖으실까? 내쫓으실까?’ 여러 생각 끝에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품꾼처럼 일해서 밥만 얻어먹어도 돼지우리에서 굶주리며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멀리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뛰어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만약 아버지가 “이놈의 자식, 들고 나갔던 많은 돈을 어디에 다 썼어? 잘났다고 큰소리 쳐놓고 왜 이렇게 왔어?” 했다면, 아들은 자신이 준비한 대로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일하고 밥만 먹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이나, 큰소리치고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나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아들로 대하시는구나….’ 둘째 아들은 자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에게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다가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에 젖어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신기할 정도로, 인간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고통과 슬픔과 절망에 빠져서 “나는 불행해! 나는 슬프고 고통스러워! 난 안 돼! 난 절망이야!”라고 말합니다. “우리 아들이 게임중독이어서 문제야. 남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문제야. 직장이 불안해서 문제야. 병이 들어서 문제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넌 행복해. 다 나았어. 괜찮아. 좋아.”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데,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서 ‘나는 불행해! 난 안 돼! 난 병을 이길 수 없어! 난 죄인이야!’ 하고 절망을 노래합니다. 예수님은 절망을 쏟아내는 우리 입에 소망을 넣어 주시고 찬송을 넣어 주십니다.

품꾼인가, 아들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은 다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그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말했다면 이런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저는 품꾼입니다.”
“아니야, 아들이야.”
“아닙니다. 저는 품꾼입니다.”
“그렇지 않아. 아들이야!”
그리고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합니다.
“얘들아, 빨리 목욕물 데워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아들이 생각합니다. ‘내가 많은 돈을 날렸다고 아버지가 나를 놀리려고 하시는 말씀일 거야. 나를 위해 송아지를 잡아? 말도 안 돼. 여기 있으면 더 괴롭겠다. 차라리 도망가자!’ 그렇게 생각하면 그 믿음대로 됩니다. 도망가면 다시 거지가 되겠지요.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버지가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고 하실 때 대충 입을 아무 옷이나 달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주시면 입으면 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부었는데 예수님이 포도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포도주야? 물이지.’ 그렇게 하면 그것은 물입니다. 포도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포도주입니다.
우리 생각, 판단, 지식을 믿으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어느 것이 좋은지 나쁜지, 어느 것이 선한지 악한지, 어느 것이 맞는지 틀린지를 우리가 구분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분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생각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네. 감사하다. 가락지도 끼우시네. 내 손에 딱 맞네. 아버지는 나에 대해서 정확히 아시는구나. 신발이 아주 좋네. 살진 송아지도 잡아 주시네. 먹자.’ 입혀 주면 입고, 끼워 주면 끼고, 신겨 주면 신고, 먹여 주면 먹었습니다. 아버지가 해주시는 대로 누리는 것이 둘째 아들이 행복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품꾼이 되겠다고 했다면 아버지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한평생 죄인으로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탕자는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는 아들로 대우했습니다.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돌아가면 나를 귀하게 대하시겠구나. 나는 더럽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깨끗해지고 좋은 옷을 입겠구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하인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 신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라고 명령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꿈만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더러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다 온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둘째 아들이 돌아올 것을 대비해서 아버지는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과 살진 송아지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서 성경 여러 곳에 우리 죄를 사하셨다는 말씀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롭다! 죄 없다! 깨끗하다!”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은혜를 베푸실 때 “저는 이런 것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이 되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아버지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옷을 거부하고 더럽고 떨어진 옷을 입고 덜덜 떨고 있다면 ‘돌아와서도 말을 안 듣네’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습니까?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이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너는 거룩하다, 씻어졌다, 깨끗해졌다.” 하시면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옳기 때문에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올걸…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믿으면 믿음대로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38년 된 병자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가서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올걸! 내가 왜 돼지우리에서 굶어가며 죽을 만큼 고생했던가?’
예수님을 믿고 나면 이와 같은 마음이 듭니다. 아직 머뭇머뭇하는 사람은 주저하지 말고 지금 믿으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우리 고통과 질고와 아픔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니 고통에, 병에 빠져 있지 말고 나았다고 믿으십시오. 믿으면 믿은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십니다.
혹시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이 있어도 “저건 안 되겠다.” 하지 마십시오. 빈말이라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 아들도 예수님이 역사하시면 변하겠구나.” 하십시오. “술주정뱅이가, 게임중독자가, 도박꾼이 변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가면 우리 마음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제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