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미국 유학 시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라이프] 미국 유학 시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 글 | 박영국(기쁜소식뉴욕교회 선교사)
  • 승인 2022.01.11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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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 1회

나는 2007년에 미국으로 파송받아 올해로 15년째 선교하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 안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잘 알지 못했던 나인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일하신 후로는 나와 상관없이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1974년 7월,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나는 우리 선교회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 삶의 모든 것은 교회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도 교회 안의 친구들이었고, 어쩌면 교회의 이모 삼촌들이 친척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어릴 때를 돌이켜 보면 부모님은 항상 집회에 다니셨고, 늘 바쁘셨다. 1년이면 거의 270일을 외부에서 집회를 하셨기 때문에 나와 두 살 터울의 누나는 교회 안에서 이모들의 손에 자랐다. 
부모님은 우리를 항상 엄하게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마다 내 마음을 꺾어주시고 내 욕망을 자제하는 일들을 많이 하셨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내 마음으로 살 때가 많았다. 내가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교회 안의 이모들은 나에게 잘해주려고 했고, 나와 싸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마음은 점점 높아만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살도록 그냥 놔두지 않으셨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하면서 내 마음을 조금씩 훈련하셨다. 내가 얼마나 교만했고 얼마나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기 시작하신 것이다. 
1990년 초에 아버지가 대전으로 이동하시면서, 나는 서울에 남아 1991년까지 고등학교에 다녀야 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시기였다. 은혜도 많이 입었지만, 내 마음에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나는 그렇게 비자 받아 보낼 생각 없다”
1991년 말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먼저 미국 비자를 받급 받기 위해 인터뷰를 해야 했는데, 유학원 원장은 나에게 ‘너는 비자를 받기 힘들겠다.’고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미 대사관에서 목사와 목사의 가족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내 학업 성적이 썩 좋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었다. 그때가 1991년 10월이었고 이번에 비자 심사에서 떨어지면 당시에는 3개월 후 재신청이 가능했지만 1992년이 되면 내 나이가 18세가 되어 여권이 만료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학원 원장은 내가 이번에 꼭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며, 아버지에게 돈을 좀 쓰라고 말씀드리라고 했다. 돈을 좀 쓰면 확실히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말씀드리자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나는 그렇게 비자 받아서 유학을 보낼 생각 없다.” 그리고 내가 인터뷰를 하기 전에 다시 전화를 주셨다. 
“비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돈을 써서 비자를 받을 거라면 돈을 안 써도 비자를 받고, 돈을 안 써서 비자가 떨어질 거라면 돈을 써도 떨어지는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날 편안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했고,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갈 무렵에는 미국에 있는 우리 교회는 규모도 작았고, 형제 자매님들도 많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한국에서처럼 나를 잘 돌보아 줄 수 있는 분도 별로 없었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어렵기도 했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여러 형편들이 많았던 것도 어려웠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내가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형제 자매님들이 나에게 잘해주셔서 내가 하는 일들이 다 잘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분들이 없어서 내 마음이 어려움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동안은 내가 잘나고 똑똑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에서 여러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 ‘그것은 네가 잘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너에게 은혜를 입혀준 것이고, 형제 자매님들의 은혜를 입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었던 것’임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한번 낮추어 주시니까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과 교회 형제 자매님들의 은혜 속에 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형제 자매님들이 정말 감사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교회를 무시하고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알려주셨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셨다.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나는 유학생이기 때문에 사립학교 입학을 전제로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왔다. 당시 뉴욕교회는 플러싱이라는 곳에 있었고, 내가 다니는 학교도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교회가 롱아일랜드로 이사했다. 교회에서 학교까지 자동차로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롱아일랜드에는 내가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도 없고, 이런 부분을 알아봐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롱아일랜드 가까이 있는 공립학교로 옮겨야 했다. 
미국 유학생은 F1이라는 비자를 발급받는다. 그리고 F1 비자를 받기 위해서 I-20이라는 입학허가서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I-20은 사립학교에서만 발급해주기 때문에, 내가 공립학교로 옮기면 전에 다닌 사립학교에서 발급해준 I-20가 취소된다. 공립학교에서는 발급을 받을 수 없기에 많이 고민하고 있었다. 
새로 간 학교에서 내 신분을 알면 쫓아낼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어서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십시오.’ 
수업이 끝나고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어디를 봐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어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어느 날 수업 중에 교장실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장실에는 교장 선생님과 나를 담당하고 있던 상담 선생님,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네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니? 네가 전에 다닌 학교에서 우리에게 너의 성적증명서를 보내줘야 하는데 일부러 안 보내주고 있어. 왜 그런 거니? 전에 다닌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니? 학비를 내지 않았니?”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이미 학비는 다 냈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그런데 왜 그 학교에서 네 성적표를 보내주지 않는 거지? 너는 도대체 어떤 비자로 여기에 있는 거지?”라고 다시 물었다.
그때 내가 “유학생 비자로 있습니다. F-1 비자로 있습니다.”라고 하자 옆에 있던 어떤 분이 “그러면 I-20 서류가 필요할 텐데....”라고 말했다. 그분은 학교 일을 담당하는 변호사였다. 나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여권을 보여주었다. 내 생각에는 그 사람이 나를 쫓아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가 나를 도와주었다.
“네가 유학생이면 I-20이 필요한데 왜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니?”라고 말하면서 “네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성적증명서는 법적으로 받을 수 있어. 하지만 그것보다 너는 I-20이 필요해. 내일은 학교에 오지 말고 내 사무실로 와서 I-20을 받아서 가.”라고 했다. 그렇게 다음 날 나는 I-20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하나님이 정말 나를 도와주시는구나.’ 
그전까지 나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다. 교회의 은혜 안에서 형제 자매님의 보호 아래에서는 단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아도 잘살 수 있었고, 하나님께 구하거나 의지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일로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려울 때마다 기도했고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학교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지만 내게 가장 큰 어려움은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부분이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모르는 언어로 공부해야 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고, 그러면 하나님이 공부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길도 열어주셨다. 하나님과 마음이 가깝게 연결되어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감사했다. 
지금도 그때 내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 ‘맞아,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나를 도우시지.’ 하면서  당면한 문제를 놓고 주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아버지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지혜뿐 아니라 항상 신앙을 가르쳐주셨고, 하나님을 믿는 삶을 보여주셨다. 나는 교회에서 생활했는데, 아버지는 내게 항상 ‘뉴욕교회 목사님에게 인도를 받으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 내가 아버지에게 “한국에 언제 갈까요? 무엇을 공부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면 아버지는 뉴욕교회 목사님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매번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여쭈어도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그렇게 나는 뉴욕교회 목사님의 인도를 받아서 공부하는 부분이나 신앙적인 부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은, 당시 뉴욕교회 목사님의 신앙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 목사님의 잘못된 부분을 절대 영국이에게 이야기하면 안 되고 그 목사님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가 사역자에 대한 불신을 가져 내 신앙이 잘못되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다. 

나를 하나님께 맡기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버지는 정말 나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를 믿음으로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결혼하여 현재 아이가 셋인데, 불가피하게 내가 자식을 누구에게 맡겨야 한다면 ‘신앙이 안 좋은 목사님에게 아이를 맡겨도 될까?’ 하는 마음이 든다. 당시에 아버지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야 해.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해야 해.”라고 하실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줄곧 
“뉴욕 목사님에게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나를 그 목사님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뉴욕 목사님은 문제가 있어서 후에 사역을 그만두시게 됐지만 그때 나는 교회의 은혜를 입고, 뉴욕 목사님의 인도를 받으며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은혜를 입는 계기가 되어 감사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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