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천국으로 가신 아버지

기쁜소식 서부산교회 김성국 목사 간증

2015-05-19     굿뉴스데일리

가정의 달, 오월.
멸망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천국에 가신 김성국 목사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첫 딸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께서 병원에 찾아오셨다. 처음 얻는 손주를 보려고 할아버지가 오시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색한 분위기, 그렇게 아버지의 방문은 초라했다.
아버지는 6.25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우연히 얻은 성경책을 읽으시다가 ‘이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을 말하다니 놀라운 책이구나. 이제부터 하나님을 섬겨야겠다’는 맘이 드셔서 계속 성경을 읽으셨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교원양성소를 나와서 장래가 촉망되던 아버지는 전쟁 후 자신을 다 드려 교회에 헌신하시면서 총각 집사도 되시고, 교회의 소개로 결혼도 하셨다.
아버지는 교회 개척을 사명으로 받으시고는 부산에서 가족 7명으로 교회 개척을 세 번이나 하셨다. 전 재산을 다 드리고 단칸방으로 간 우린 어렵고 힘들었지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고, 노회에서 오시는 목사님들마다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

“집사님 같은 분이 한국에 열 명만 있으면 우리나라 기독교가 달라질 겁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다만 전쟁터에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섬겨야겠다고 작정했는데 이렇게 교회를 개척해서 목사님들을 초빙하는게 제 사명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쟁 후라서 사람들이 많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성도가 200명 이상 되면 한 목자가 이끌기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때 제 가족과 저와 함께하려는 사람들을 보내주시면 또 개척하겠습니다.”
“아, 예. 그러지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헌신하셨고 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르는 분들도 많았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교회 규모가 커지자 아버지를 향해 등을 돌렸다.
어떤 목사님은 아버지 몰래 권리금까지 받고 교회를 팔고 미국으로 야반도주를 했는데, 그날 밤 아버지는 처음으로 술을 드시고 들어와 어머니 무릎에 누워 한참을 우셨다. 늘 무섭고 크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세 번이나 그런 식으로 속으셨고, 우린 지칠 대로 지쳤다.
“아버지, 큰 교회도 하나님 섬기잖아요? 큰 교회 좀 다녀요.”
결국 가족회의를 열어 그런 결정을 내렸고, 큰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이제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2년 후 아버지는 참된 종을 만났다며 다시 한 작은 교회를 다니자고 하셨는데, 모두 싫었지만 아버지가 완고하시니 따르게 되었고, 결국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칠 때 까지 그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군대에서 모은 물질까지 느타리버섯 농사하신다고 빌려가셨다.
우리는 완전히 지쳤다. 가족들 모두 마음속에서 아버지가 미웠다.
나 역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아버지가 이 모든 삶의 원흉으로 여겨졌다. 내 삶의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아버지...

첫 딸이 태어나던 날, 나도 아버지가 되던 날, 아버지는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병원에 오셨다. 한참 첫 손주를 보시고 묵묵히 일어나 나가시는 아버지의 등 뒤를 따라 입구까지 갔을때, 아버지는 신문조각에 써오신 이름을 보이시며 무거운 입을 여셨다.
“빼어날 수, 보배 진... 난 수진이가 좋은데... 너는 어떻노? ...”
벌써 책을 사서 딸의 예쁜 한글 이름을 정해두고 있었는데... 그렇게 어둠 속으로 걸어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얼마 후 나는 구원을 받았다. 가장 먼저 아버지가 생각났다.
“ 아, 아버지...” 목이 메여왔다. 이 모든 원인이 하나님을 잘못 만난 것임을 알았다. 아버지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박옥수 목사님 아버지가 구원받으신 간증이 내 마음에 힘이 되어서 할 수 있는 대로 아버지를 찾아가 복음을 전했고 참 많은 마음의 싸움이 있었다.
몇 년 뒤, 아버지는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보훈병원으로 오셨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아버지와 마주앉았다.
“아버지, 수진이입니다.”
“...수 진 아...”
아버지는 첫 손주의 이름을 부르시며 너무나 기뻐하셨다. 수진이도 할아버지에게 잘 따르면서 아버지는 조금씩 마음을 여셨고, 우여곡절 끝에 중풍병자를 메고 가듯 아버지를 수양회에 모셨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하셨다. 자기 의를 내려놓지 못하시는 아버지 마음이 보이지만 길이 없었다.
다음 주는 나와 우리 가족이 수양회를 가는데 아버지는 위독한 상태였다. 복음반 테이프를 눈물로 권해드리고 우리는 수양회 장소로 떠났다. 수양회에서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안 되는구나’라고 절망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이 생각도 죽은 거라고?...’

“오빠 빨리 와. 아버지가... 흑흑.”
수양회 마지막 날 아침, 여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돌아가시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다.헬기를 타고 날아간들 무얼 할 수 있는가?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수양회에 간 뒤 일주일 동안 저승사자를 두 번 만나셨다고 한다. 화요일 밤에 가위눌려 꼼짝 못하는 아버지 머리맡에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서서 말했다.
“야, 가자...”
아버지는 벌벌 떨며 식은 땀을 쏟았는데, 다행히도 그날 돌아가시지 않았다.
“둘째가 주고 간 테이프 틀어라.”
아버지는 큰소리로 우리가 권해드린 테이프를 찾으셨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밤낮으로 종일 복음반 말씀을 들으셨다. 하지만 황금 모래성 같은 자기 의를 내려놓지 못하셨다. 감사하게도 금요일 밤에 다시 저승사자가 찾아왔다. 이번엔 이름을 불렀다.
“야, 김진석. 가자.”
이름을 찍어 부른 것이다. 그날 자기 의가 다 무너져 아버지 마음에 복음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환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셨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남기셨다.
“내가 그때 그 수양회에 가길 참 잘했다. 둘째 그놈한테 고맙다...”
내가 그 둘째다.
나는 박옥수 목사님의 아버지께서 구원받으신 간증을 테이프로 여러 번 듣다가 마음에 힘이 일어나서 아버지께 복음을 전했었는데, 그 긴(?) 여정을 하나님은 헛되게 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셔서 아버지를 미워했던 내 마음의 빚을 다 풀어주셨다. 할렐루야!

가정의 달, 오월.
멸망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천국에 가신 아버지 생각에 하늘 가득 기쁨의 눈물이 고인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