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제로니모와 형
눈먼 제로니모와 형
  • 구원열차
  • 승인 2012.11.0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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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아르투어 슈니츨러
 
형 카를로와 동생 제로니모는 형제입니다. 제로니모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형 카를로는 제로니모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카를로가 제로니모를 사랑하는 데
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 형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카를로가 창가에서 정원에 있는 나무를 향해 활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로니모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 나무 뒤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로니모가 고개를 드는 순간, 카를로가 쏜 화살이 빗나가  오른쪽 눈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제로니모의 오른쪽 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로니모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왼쪽 눈마저 차츰 시력을 잃어가더니 일 년 뒤에는 양쪽 눈 모두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제로니모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자 카를로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동생의 눈이 멀었다는 죄책감에 카를로는 죽으려는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목사님이 카를로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카를로를 타일렀습니다.
“네가 죽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단다. 차라리 그런 결심으로 동생을 잘 보살펴주려무나.”
카를로는 목사님의 말대로 동생 제로니모를 평생 보살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앞을 못 보게 된 제로니모는 한동안 슬픔에 빠져 있다가 기타와 노래를 배우면서 밝고
명랑한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목소리가 고운 제로니모의 노래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제로니모가 겨우 웃음을 되찾을 즈음, 또 다른 불행이 닥쳤습니다. 집안 형편이
기울더니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카를로와 제로니모에게
남은 것은 낡은 기타와 입고 있는 옷뿐이었습니다. 두 형제는 집도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 마을을 떠나야 했습니다. 카를로 형제는 마을마다 떠돌며 여행객이 있는
곳에 가서 노래를 불러 돈을 벌기로 했습니다.
 
그때 카를로는 스무 살, 제로니모는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이 오기 전, 카를로와 제로니모는 알프스 산이 보이는 고개의 낡은 여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고개는 험한 알프스 산을 넘는 길목이어서 여행객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 여행객이 구걸을 하고 있는 카를로 형제에게 다가왔습니다. 제로니모의 노래가 끝나자 그 여행객은 1프랑짜리 동전을 카를로가 들고 있던 모자에 넣어 주었습니다. 카를로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 여행객이 제로니모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자네 이름이 뭐지?”
“예, 제로니모입니다.”
“자네, 노래를 정말 잘하는군. 그런데 제로니모, 제발 속지 말게!”
“속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자네와 함께 있던 친구에게 20프랑짜리 지폐를 주었거든.”
“아이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러니 조심하라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제 형이에요. 저를 속일 리가 없습니다.”
여행객은 놀란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때 카를로가 돌아왔습니다.
여행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차를 타고 떠나 버렸습니다.
“형, 20프랑짜리 금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줘 봐. 만져 보게. 응?”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금화 있잖아. 빨리.”
제로니모가 카를로를 재촉했습니다.
“갑자기 금화라니?”
“방금 떠난 마차 있잖아. 거기에 탔던 사람이 나에게 말해주었어. 자기가
형에게 20프랑짜리 금화를 주었다고.”
제로니모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뭐라고?”
“그러면서 날더러 혹시 형이 나를 속일지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하던데.”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니? 그럼 너는 그 말을 정말 믿는단 말야?”
“그 사람이 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니?”
“형 목소리가 왜 그리 떨리지? 거짓말이니까 그런 거 아냐?”
“아마도 그 사람이 우리를 놀리려고 그랬나본데, 제로니모야,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너에게 맹세할 수 있어.”
“응, 그런데 난 형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지금 형은 웃고 있겠지? 나를 잘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카를로는 가슴이 답답해 오면서 제로니모에게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제로니모, 내가 너에게 단 한번이라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니? 왜 날 못
믿는 거야?”
“형이 지금까지 날 속여 왔는지 모르잖아. 난 앞이 보이질 않으니까.”
그날부터 제로니모는 형 카를로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는
형과 같이 있었으나 전처럼 열심히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주는
돈에 일일이 참견을 했습니다. 씀씀이 또한 헤퍼졌습니다. 카를로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로니모가 날 의심하는구나. 난 한평생 제로니모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이런 의심을 받고 사느니 차라리 제로니모 곁을 떠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카를로는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안 돼. 제로니모의 곁을 떠나면 불쌍한 제로니모는 어떻게 되라고.’
카를로는 어떻게 하면 제로니모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궁리를 했습니다.
며칠 후 저녁 무렵. 여관에 마차 한 대가 도착했습니다. 돈이 많아 보이는 신사 두 사람이 여관에 묵었습니다. 잠자리에 든 카를로는 생각했습니다.
‘아까 본 신사들이 돈이 많아 보이던데 사정 이야기를 하고 20프랑짜리 금화를 달라고
하면 주지 않을까? 아니야. 20프랑이면 아주 큰 돈인데 선뜻 내줄 리가 없지. 아, 나에게
20프랑짜리 금화만 있다면…….’
생각다 못한 카를로는 슬그머니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신사들이 묵고 있는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카를로가 제로니모를 깨웠습니다.
“제로니모, 이제 우리 여기를 떠나자. 올해는 가을이 빨리 오려나 봐.”
카를로는 여관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 길을 걷다가 카를로는 슬그머니 제로니모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제로니모의 손에 20프랑짜리 금화를 쥐어 주었습니다. 카를로에게 뜻밖의 금화를
건네받은 제로니모는 그 금화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말했습니다.
“역시, 그 여행객의 말이 사실이었군.”
“그래, 사실은 네가 돈을 함부로 쓸까 봐 내가 말하지 않았던 거야.”
“거짓말. 형은 계속 나를 속였던 거야.”
제로니모가 소리질렀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야.”
카를로는 더욱 서글픈 목소리로 제로니모에게 말했습니다.
“게다가 형은 시치미까지 뗐잖아.”
카를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 제로니모는 아직도 날 믿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나? 난 제로니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도둑질까지 했는데…….’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을 향해 걸었습니다.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는 전부터 낯이
익은 테넬리 순경이 있었습니다. 카를로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테넬리 순경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러나 테넬리 순경은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네. 아침에 자네들을 경찰서까지 데려오라는 전보를 받았거든.”
“예? 무슨 말입니까?”
제로니모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왜 그러지요?”
카를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나도 모르지. 고개 위 여관에서 묵은 신사가 돈을 잃어버렸다는군.
그래서 자네들을 의심하나 봐.”
카를로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빨리 들통이 나다니! 내가 동생을 위해 돈을 훔쳤다는 것을 어느
누가 믿어 줄까?’
곁에 있던 제로니모가 입을 다물고 있는 카를로에게 재촉하듯 말했습니다.
“형, 뭐라고 말해 봐. 형이 돈을 훔친 거야?”
“곧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
제로니모는 허공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카를로는
제로니모가 ‘역시 그랬어. 형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것도 훔쳤던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제로니모야, 미안해. 그러나 너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단다. 나는 오직
네가 날 믿어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어. 날 믿어 주기만 한다면 난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어. 10년 동안 감옥에 있으라고 해도 좋아.’
그때 제로니모가 갑자기 멈춰섰습니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기타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카를로의 뺨을 더듬었습니다. 제로니모가 기쁠 때 하는
손버릇이었습니다. 카를로는 제로니모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동생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제로니모는 어린 시절 이후 보이지 않았던, 부드럽고 복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아, 나는 동생을 다시 찾았다. 아니 처음으로 동생을 얻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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