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나를 아프리카로, 안식으로 이끄셨다.
하나님은 나를 아프리카로, 안식으로 이끄셨다.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3.03.0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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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이가 자라면서 기고, 서고,
걸음을 떼고, 뛰고 하듯 거듭난 후 내 마음도
하나님의 품안에서 조금씩 자라갔다.
한 뼘 자랄 때마다 내 마음을 덮고 있던
어두운 생각들이 밀려나갔다. 때론 성장통이 극심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 뒤에는 부쩍 자란
마음의 세계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다음엔 꼭 과자를 주머니에 넣어오겠노라!
구원받고 8년이 흐른 후, 나는 복음만을 위해 살겠노라고 마음을 정하고 모든 삶을 정리한 뒤에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선교학교(현 마하나임 신학교)에 들어갔다. 첫날 환영식 때 박옥수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담당 형제에게 맡기세요. 지금까지는 돈을 믿고 살았지만 이제부턴 하나님을 믿고 사십시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돈을 의지하고 살아온 내 모습이 보였다.
다음날에는 선교학교에서 신입생들을 위한 환영식이 있었다. 환영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가졌는데, 한 형제가 과자를 주머니에 슬쩍 챙겨넣는 걸 보았다. 굉장히 불편했다. ‘목회자가 될 사람이 저렇게 하면 어떡하냐? 첫날부터 너무 심한 거 아냐?’ 형제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법으로 내 마음을 눌렀지만, 형제를 볼 때마다 ‘먹는 걸 탐하는 놈’ 하고 판단했다.
다음날 둘째 아들이 울면서 내게 왔다. 친구가 과자를 먹는데 자기도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앞방에 살던 과자를 챙긴 형제가 자기 아이에게 과자를 주었는데, 그 아이가 과자 먹는 걸 보고 우리 아들이 달라고 했지만 주지 않아서 운 것이었다. ‘나도 좀 가지고 올 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엔 꼭 가져오겠노라고 다짐했다.
얼마 후 다시 다과회 자리가 있었고, 나는 사람들 몰래 과자 반 주먹을 쥐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앞방에 사는 형제는 한 주먹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또 판단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아니, 어떻게 한 주먹이나 챙기냐? 탐해도 적당히 탐해야지…’ 얄미웠다. 똑같이 과자를 주머니에 넣었지만 나는 반 주먹만 넣었기에 괜찮은 사람이고, 한 주먹 가득 넣은 그 형제는 나쁜 놈이었다.
다음날, 생활반장을 맡은 형제가 법을 세웠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들인데, 다과회 때 과자를 챙기고 하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과자를 가져가는 사람은 금식을 시키겠습니다.” 법이 오자 외식(外飾)하기 시작했다. 반장이 볼 때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돌리면 바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왜 이걸 훔쳐왔어?”
대전에 선교센터가 완공되고, 그 기념으로 선교학생들이 뷔페에 식사하러 갔다. 하필 그날 아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당번이어서 혼자 가서 먹으려니까 마음에 걸렸다. 아내를 위해 남편 노릇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선교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아내가 손을 내밀 때마다 돈을 척척 주면서 몹시 흐뭇했지만, 선교학생이 된 후로는 돈이 없으니까 왠지 기가 죽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번 기회에 그런 것을 만회해보고 싶어서 찰밥 한 덩이를 호일에 싸서 주머니에 살짝 챙겼다.
식사를 마치고, 찰밥을 보고 감동할 아내 모습을 상상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달려갔다. “자, 받아! 찰밥이야!” 챙겨둔 찰밥을 아내에게 탁 내밀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받을 줄 알았는데, 아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왜 이걸 훔쳐왔어?” 속마음을 확 들키고 말았다. 그때에야 내 모습이 보였다. ‘아, 내가 제일 탐하는 사람이구나!’ 그 전까지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앞방 형제가 탐하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내가 가장 탐하는 사람인 것을 가르쳐주셨다. 형제를 판단하는 마음이 저절로 끝났다. 주님의 마음 없이 사는 삶이 징계 받는 삶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게 해주셨다.
선교학교는 반듯하고 올바른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거짓되고 악한 우리의 근본이 드러나서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선교학교에서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은 나의 근본 모습들을 보게 하셨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셨다. 그런 나를 참고 받아준 교회와 종들이 감사했다.
선교학교에서의 생활은 은혜롭고 복되었다. 빈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박옥수 목사님이 전해주시는 말씀이 새롭게 들리면서 마음에 은혜가 가득 채워졌다. 말씀이 분명해지고 삶이 새로워졌다. 나를 얽어매고 있던 법들에서 하나하나 풀려 새롭게 하나님을 배우고 믿음의 세계를 배울 수 있는 선교학교에 온 것이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 목회자가 안 되더라도, 믿음을 배우고 영적 변화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에 누구나 한번쯤은 와서 훈련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송정중앙침례교회(현 기쁜소식 송정교회)에서 사역하던 시절. 아내와 함께 제주도에서

“김 형제, 손들어.”
1994년 2월 충주제일교회(현 기쁜소식충주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9년 후, 해외 선교 바람이 일었다. 나는 선교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었다. 선교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께서 “너, 목사 되려고 선교학교 간다고? 그러면 설교는 네가 하지 말고 네 아내를 시켜라.” 하셨다. 내 발음이 부정확해서 사람들이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말하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눌렸다.
2년 후 여름, 영동 송호솔밭에서 지역장, 구역장 목회자 모임이 있었다. 당시 나는 구역장이었다. 모임 중에 박옥수 목사님께서 선교사로 보낼 사역자들을 추천하라고 하셨다. 몇몇 지역장 목사님들이 손을 들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목사님이 갑자기 “김 형제, 손들어. 김 형제, 손들어.” 하며 내 옆구리를 계속 찔러서 나도 모르게 갑자기 손을 들었다. 박 목사님께서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으셨다. 전에 휴양지인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사진에서 본 적이 있어서 “크림반도요.” 하고 대답했다.
별 생각 없이 지나갔는데, 한달 후 사역자 이동 공문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영삼 -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황당했다. ‘아프리카? 내가 선교를 간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100% 하나님이 하셨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이지리아로 떠나기 전, 박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목사님은
“아프리카, 참 좋은 곳이네. 아프리카를 사랑하게 될 걸세.” 라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목사님, 아프리카 너무 부담스러워요!’ 하고 소리쳤다. 그때는 목사님의 마음을 잘 몰랐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세계를 볼 눈이 없었다.

▲ 전도집회에 참석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필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선교하러 간다고 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우리 부부에게 많은 물질을 주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가나에서 두 달 있다가 나이지리아로 갔다. 이전의 사역자가 두 번이나 교회를 떠났기에 우리를 보는 형제 자매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당신들도 조금 있다가 떠날 거지?’ 하는 눈빛이었다.
26년 동안 영어와 담쌓고 살아온 내가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설교를 시작했다. 형제 자매들이 이상해서 관심 있게 듣다가, 나중에는 들어보려고 애를 쓰다가, 그래도 안되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안 그래도 설교 내용을 외워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는 형제 자매들을 보면서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다. 외웠던 내용들이 다 날아가버려 멍하니 서 있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어색함과 어려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예배당의 외적인 형편도 열악했다. 예배당이 사거리 언덕에 있어서, 많은 낡은 차들이 내뿜는 매연이 예배당으로 들어와 찌는 듯한 여름에도 창문을 비닐로 다 막아야 했다.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매연을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 집밖으로 나가면 옷이 금방 새까매지고 숨쉬기가 괴로워 가능하면 숨을 쉬지 않고 다녔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돈을 달라고 달라붙고, 말도 안 통하고…. 견디지 못해 떠났던 전임 사역자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며 모든 것에 믿음을 붙여서 의지로 넘겼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말이 서툴러서 일어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한번은 집회 때 아이들이 많이 와 있기에 어른들만 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른’이라는 단어 ‘adult
(어덜트)’를 정확히 몰라서 ‘adultery(어덜터리, 간음한 사람)’만 오라고 하고 말았다. 더 웃지 못할 일은, 내 말을 듣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만 앞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지낸 1년 동안 현지인 목사 부부가 구원받고 그가 속한 모임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50~60명의 형제 자매들이 모였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1년 후 예배당 계약 기간이 끝나고는 위치도 좋고 공기도 좋은 곳으로 예배당을 옮겼다.
내 희생과 수고를 몰라주다니…
나이지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감사할 때도 있었지만, ‘힘들다, 피곤하다’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는 늘 기쁘고 좋았는데….
예배당을 옮기고 얼마 후, 현지인 목사 3명이 한국 월드캠프에 참석했다가 도망가버렸다. 불법 취업을 위해 우리 교회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걸 볼 만한 눈이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기 시작하셨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나는 ‘믿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살았기에 힘들지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박옥수 목사님이 아프리카를 방문하셨을 때였다. 하루는 가나에서 가진 사역자 모임에서 내가 간증을 했는데, 고생을 많이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말라리아에도 몇 번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전에 있던 사역자들과 달리 나는 나이지리아를 떠나지 않고 믿음으로 어려움들을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지만….
박 목사님이 나에게 “설교는 어떻게 하는가?” 하고 물으셨다. “예, 제가 하는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제 말을 알아듣지만, 새로운 사람이 오면 제가 영어로 말하면 옆에서 현지인이 영어로 통역합니다.” 목사님은 “영어를 영어로 통역해?” 하며 나를 책망하기 시작하셨다. 마치 목사님은 나를 간섭하려고 작정하고 오신 것 같았다. 당시 한국에서 매달 3백 달러를 보내주었는데, 가나에서 갖는 서부 아프리카 사역자 모임에 오가는 차비로 쓰면 딱 맞았다. 결국 선교비를 하나도 받지 않은 것과 같은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는데, 몰라준다고 생각하니 서운했다. 내 속에는 내가 한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의 의’가 아닌, ‘내 의’가 튀어나왔다.
하나님의 종은 ‘네가 했냐, 하나님이 하셨냐?’ 하고 ‘출처’가 어디인가를 물으시는데, 나는 항상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길과 반대 길로 달음질한 나!

▲ 한국에서 이헌목 목사님이 나이지리아를 방문해 집회를 가진 후 교회 성도들과 기념촬영

하나님을 빙자해서 나를 섬겼구나!
나는 곧 가나 아크라로 사역지를 옮겨갔다. 그곳에서도 어려운 형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당 재계약 기간이 2개월이 지났는데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나님은 계속 나를 어렵게 하셨다. 넘어져 있는 나를 짓누르시고, 또 짓누르시고…. 예배당은 어찌어찌해서 겨우 2년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다.
아크라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신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경만 대했다. 박옥수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해가 잘 안 가고, 또 교제해주는 이도 없지만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왜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고 하시는가? 뭐가 문제인가? 믿음으로 사는 게 뭔가?’
1년을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나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살폈다. 처음에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힘들었지만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시편 127편 말씀을 보여주셨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힘들다, 어렵다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걸렸다. 교회에서 배운 대로 살았고, 교회도 좋아지고, 영어를 잘 못하지만 집회 때 전할 9시간 원고를 쓰고 외워서 말씀을 전할 만큼 어려움도 믿음으로 뛰어넘었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다. 잠을 준다는 것은 쉰다는 의미인데, 나는 쉬지 못했다.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복음을 위해 살려는 마음,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려는 마음, 근신하며 마음을 다해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이 ‘경성함’에 속한 것이었다.
경성함! 내 눈에는 참 좋아 보였다. 나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수고의 떡을 먹는 것이 믿음의 삶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였다. 여호와의 지키심이 빠진 파수꾼의 경성함, 그것은 파수꾼의 것이었다. ‘파수꾼의 경성함’과 ‘여호와의 지키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경성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지키심보다 더 큰 것은 자기를 신뢰한다는 것이요, 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이요, 결국 내가 나를 위하려는 마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빙자해서 나를 섬겼구나!’ 주님은 내게 출처가 어디냐고 물으셨지만 나는 내가 복음을 위한다는 좋은 모양에 속아 경성함이 좋아 보였다. 박 목사님께서 왜 나에게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고 하시는지, 왜 나는 안 된다고 하셨는지 의문이 다 풀렸다.
안식이 찾아왔다. 이런 나를 기다리고 받아준 하나님의 종이 너무 감사했다. 모든 소리가 끝나고 삶이 바뀌었다. 내가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선이 그어졌다. 나는 성격이 가만히 집에 있지 못하는 사람인데,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쉽고 신기한 길
나는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돈이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살게 하셨다.
전도집회를 가졌을 때였다. 집회 하루 전에 한 사람이 우리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들어와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로, 현지 교회의 장로였다. 그는 후속집회까지 참석하고 100달러를 헌금했다. 교회 형편이 어렵고, 한 달에 교회 전체 헌금이 50달러 정도 나올 때였다.
임마누엘 형제님은 자기 집에서 집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그분이 살고 있는 아키모다를 방문했다. 목재소를 운영하는 큰 부자였다. ‘아프리카에 이렇게 잘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님은 영국에 돈을 벌러 갔다가 죄 때문에 괴로워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회개했지만 죄를 씻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견딜 수 없어서 영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가나로 돌아왔다고 했다. 고넬료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형제님의 집에는 목사 몇 사람이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종을 섬기고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대가 없이 그들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 동안 집회를 하려고 계획하고 갔는데, 형제님의 아내 되는 분이 우리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핍박해 다음날 아침에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새벽, 나는 ‘물이나 한번 길어볼까?’ 하고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었다. 그런데 형제님의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는 마음을 활짝 열어 말씀을 받아들였고, 구원을 받았다. 나는 심심해서 한번 해본 것뿐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셨다. 임마누엘 형제님 가정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아키모다 지역에 교회가 개척되었고, 50여 명이 구원받았다. 그리고 옆 도시에도 20명 가량이 구원받아 두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하루는 부인회장 자매님이 복음을 전해달라며 한 아가씨를 교회로 데리고 왔다. 그 아가씨는 직장을 구하고 있었는데, 꿈에서 똑같은 휴대폰 번호를 두 번이나 연속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상해서 그 번호로 전화를 했는데, 바로 우리 교회 부인회장 전화번호였던 것이다. 아가씨는 그날 구원받았고, 지금은 현지인 목회자의 사모가 되어 복음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이 신기한 방법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셨다. 내가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 하나님이 하시니까 너무 쉽고 신기했다. 내 마음에 선이 그어지면서 내가 빠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들을 받을 수 있었다. 아크라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고, 나와 상관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행복했다.

▲ 아크라에 있을 때 한국에서 김성훈 목사님이 방문해 전도집회를 가졌다. 아크라 단기선교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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