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막,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단원이 되어
제3막,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단원이 되어
  • 강성채 목사
  • 승인 2013.03.13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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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라이프 |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

 
1993년부터 걸은 목회자의 길 10년,
그라시아스 합창단 단원으로 보낸 10년, 그리고 다시 목회의 길을 걷다가 얼마 전,
선교학교(현 마하나임 신학교) 졸업 20년 만에 목사 안수를 받은 강성채 목사.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많았지만
그 은혜를 모르고 어리석게 살았던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들이 얼마나 귀한 보석들인지 알기까지 아주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 사실을 알기까지 고통스럽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고 미련한 자신을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훈련하셨다고 말하는 강성채 목사.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란 찬송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의 인생 속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의 삶 속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날개 꺾인 새처럼
2001년, 선교학교에 입학한 지 10년 만에 사역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강성채 형제. 이제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집에서 한 달 가량 무얼 할지 고민하던 중 서울에 살던 외삼촌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다가, 전주에서 올라온 외가 쪽 6촌 동생(조상완)을 만났다. 중고차 사업을 한다는 동생에게 그는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중고차 사업에 대해 가르쳐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일을 계기로 동생과 함께 중고차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이 서툴렀지만, 동생이 도와주고 가르쳐주어서 금방 자리를 잡았어요. 몇 달 지나자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지요. 그러자 마음에 공허가 찾아왔어요. ‘전에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뛰었는데, 지금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렇게 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무척 괴로웠어요.”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속에 있을 때에는 괴로울 틈이 없었는데, 돈을 벌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괴로움이 강성채 형제의 마음을 뒤덮어왔다. 하늘을 날던 새가 날개가 꺾여 땅을 기어다니는 삶을 사는 것 같은 괴로움이었다.
“교회에 나가긴 했지만, 괴로움과 번민에 사로잡혀서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술에 취해서 잠이 들면 새벽 2시나 3시가 되어 꼭 잠이 깼어요. 그때부터는 또 잠이 오질 않는 거예요. 불면증이 사람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인 줄 처음 알았어요.”
몇 달을 그렇게 지낸 강성채 형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아서 어느 주일 예배 때 앞으로 나가 자신의 삶을 고백했다. 밤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다고. 삶이 너무 괴롭다고.

형이 다시 복음 전도자로 살면 좋겠다
얼마 뒤, 동전주교회(현기쁜소식전주교회)에 사역자 이동이 있어서 임민철 목사가 부임해 왔다. 임 목사는 곧 교회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광고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강성채 형제 속에 함께 사업을 하던 동생을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동생은 대학에 다닐 때 총학생회장을 하며 학생운동을 해서 나름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았어요. 그런데 집회 첫날 동생에게 ‘오늘부터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한번 가보지 않을래?’ 하니까 생각 밖에 따라나서는 거예요. 동생은 그날 말씀을 듣고는 ‘그럼 내가 죄가 없는 게 맞냐?’고 하며 구원을 받았어요.”
강 형제의 6촌 동생인 조상완 형제는 이후 교회에 자주 가며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동생을 구원하셔서 저를 위로하시는 것 같았어요. 동생이 구원받은 다음 날부터 출근하면 함께 성경 말씀을 가지고 교제를 나누었지요. 동생은 구원받기 전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힘들고 형편이 어려웠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집회에 가자고 했을 때 순순히 따라나선 거예요. 인생이 다 망했다고 여겨 죽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말씀을 듣다 보니 예수님이 자기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거예요. 그 예수님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고 동생이 이야기하는데, 제 마음에 크게 위로와 힘이 되었어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 삶을 찾은 조상완 형제는 복음을 사랑했고, 강성채 형제에게 ‘형이 다시 복음 전도자로 살면 좋겠다’고 하며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그 일이 강 형제로 하여금 박옥수 목사 앞에 다시 나가게 했다.

부산 선교학교로
2002년 8월, 강성채 형제는 여름 수양회 기간에 박옥수 목사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놓았다. 중고차 장사를 한 이야기, 생활이 안정되면서 마음이 공허해서 술을 먹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이야기, 그리고 염치없지만 다시 은혜를 입어서 전도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 목사는 돌아와줘서 고맙다며, 지낼 곳을 생각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2002년 늦은 가을, 저희 부부는 부산대연교회에 있는 부산 선교학교에 다시 들어갔어요. 승합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을 가득 채웠어요. 굉장히 평안했어요.”
부산에 있는 동안 강 형제는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에 교회 성도들이 소개해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만나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그의 아내는 여전히 어두운 생각에 잡혀 지냈다.
“저는 정신 없이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데, 아내는 생각에 잡혀서 힘이 없었어요. 제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어요. 따듯한 말로 위로도 하고 이 방법 저 방법을 써봐도 약한 아내의 마음을 강하게 해줄 수 없었어요.”

그라시아스 합창단 단원이 되어
해가 바뀌고,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그 해 겨울에 북경에서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하게 되어 5월에 특별 단원을 뽑았다. 사역자들 가운데에서도 몇 명을 뽑았는데, 강성채 형제도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전에 목회를 할 때 전도집회가 있으면 다른 사역자들과 함께 찬양을 하곤 했었다. 그가 사역을 그만둔 후로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만들어져서 전도집회의 찬양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보기에 참 좋았기에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갔어요. 합격했지요. 이후로 그라시아스 합창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고 감사했어요. 한편으로는 합창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선교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요.”
2003년 겨울, 그라시아스 합창단은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위해 중국 북경으로 떠났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공연할 극장을 빌려주고 공연할 수 있도록 당국의 허락을 받아준 ‘세기극장’의 사장이 외부의 압력을 받아서인지 ‘종교 행사는 절대로 안 된다’는 태도로 돌아선 것이다. 결국 공연은 무산되었다. 공산국가 중국 땅에 울려퍼질 성탄 노래, 그리고 전해질 복음,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날 복음의 역사들을 마음에 그리면서 연습해온 합창단원들은 다 울었다. 다른 장소에서라도 하자고 하여 급히 어느 학교의 강당을 빌려 공연을 하면서 합창단원들은 또 울었다.
“칸타타 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던 박 목사님도 일방적으로 공연이 취소되자 마음에 한을 가지셨어요. 그래서 ‘하나님, 공산국가인 이 땅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이 힘있게 전해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셨지요. 그때 저는 목사님이 그라시아스 합창단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보았어요. 목사님께서 ‘여러분은 세계 최고의 합창단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그라시아스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때만 해도 합창단이 내 눈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지만 하나님이 목사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주시겠다는 소망이 제 마음에도 들어왔어요. 다만, 너무 모자란 내 모습을 보며 ‘나는 빼고’ 하고 생각했지요.”

 
“형제님은 합창단이 40명이면 50등을 합니다.”
북경에서 돌아온 후, 강성채 형제 마음에 ‘아내 때문에 다시 사역을 하기 힘들다면 그라시아스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복음을 섬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부산대연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조성화 목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고향 전주로 돌아갔다.
“다시 동생과 중고차 사업을 했어요. 내 차들을 동생에게 팔아 달라고 맡기고 저는 합창단 활동을 했지요. 당시는 지금처럼 해외 월드캠프가 많지 않았던 때라 대전도집회 기간에만 합창단이 모였기에 개인 사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합창단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동생 조상완 형제가 중고차 사업을 그만두고 완주군 장애인복지관 관장이 되었다. 자신의 차를 맡길 곳이 없어진 강성채 형제도 중고차 사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설렁탕 집을 차렸다. 식당 일과 합창단 일을 함께 할 수 있었기에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합창단의 공연 횟수가 많아졌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는 월드캠프의 주강사로 나가는 박옥수 목사와 동행해야 했고, 공연이 없는 날에는 음악 공부를 해야 했다. 또, 1년에 두 차례씩 미국에 있는 마하나임 학교에 가서 성악 레슨을 받아야 했다.
큰돈을 들여 식당을 시작했기에 합창단 활동에 쏟아야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강성채 형제는 고민이 커졌다. 하는 수 없이 직원들을 뽑아서 일을 맡겼지만,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는 합창단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복음을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라시아스 합창단이라고 생각했기에!
결국, 2년이 지난 후 식당 문을 닫아야 했다.
“수입이 없어지면서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합창단에 가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평안하고 좋았어요. 그렇게 복음을 섬기는 것이 기뻤어요. 이후 합창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일들이 많이 생겨났지요. 저는 주로 당시 합창단을 이끌었던 임규선 단장님을 모시는 일을 했어요. 단장님 집이 전주에서 가까운 논산이어서 서울에서 모일 때면 논산에 들러 단장님을 모시고 갔지요. 하루는 그분이 저에게 ‘형제님은 합창단이 40명이면 40등은 해야 하는데, 50등을 합니다.’라고 하셨어요. 이해가 안 돼서 ‘꼴찌면 40등이지 어떻게 50등이 됩니까?’ 하고 묻자 조금 지나면 이해가 될 거라고 하셨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보니까, 후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저는 늘 밀렸어요.”
그라시아스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것이 좋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 때, 강성채 형제는 러시아의 공훈음악가 아나톨리 교수를 만난다.
“그분이 저를 테스트하더니 ‘당신은 베이스가 아니라 테너입니다. 그냥 테너가 아니라 드라마틱 테너입니다.’ 하며 극찬을 하셨어요. 지금은 노래를 못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차근차근 연습하면 안에 감추어져 있는 놀라운 소리가 나올 것이라는 거예요. 저에게는 그 이야기가 소망이었어요.”
그 후 그는 베이스 파트에서 테너 파트로 옮겼다. 하지만 굵은 그의 소리는 다른 테너 단원들의 고운 소리와 섞이지 않아 다시 베이스 파트로 옮겨야 했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실력은 좀체 늘지 않았다.

인생의 한 막(幕)이 또 닫혔다
그 즈음 러시아의 아발랸 교수가 합창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해 왔다.
“2008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 때 아발랸 교수님을 처음 만났는데, 첫인상은 작은 키의 평범한 노인이었어요. 그런데 그분과 함께 연습하면서 합창단원 모두 그분의 카리스마에 마음이 녹았어요. 교수님은 첫날부터 ‘여러분이 내는 도는 도가 아닙니다’ 하고 정확한 음을 내도록 우리 소리를 다 뜯어고치기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1년 후, 우리는 2009년 제주국제합창제에서 대상을 받았지요. 2010년엔 그보다 규모가 큰 부산국제합창제에서 또 대상을 받았고요. 박 목사님이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세계 최고의 합창단이 될 거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이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신 거예요. 놀랍고, 감격스러웠지요.”
합창단은 놀랍게 성장해가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강 형제는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합창단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내가 너무 싫었어요.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솔피(솔페이지의 준말)’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그 음을 맞춰야 하는데, 젊은 단원들은 금방 음을 알아냈지만 저는 항상 헷갈렸어요. 그리고 해외 월드캠프 때에는 그 나라 말로 된 노래의 가사를 외워서 불러야 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학창시절엔 곧잘 외웠는데, 분명히 외웠다 싶은데 돌아서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어요.”
2011년 겨울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이 시작되기 전, 강성채 형제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박은숙 단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공연까지만 함께하고 합창단을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단장님이 ‘합창단을 그만두면 뭘 할 겁니까?’ 하고 묻기에 ‘이젠 사업이나 하면서 물질로 복음의 일을 뒷받침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지요. 단장님은 내 마음이 정해진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어요.”
인생의 한 막(幕)이 또 그렇게 열렸다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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