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 좀 도와줘!!' 하는 외침을 들으시고
'누가 나 좀 도와줘!!' 하는 외침을 들으시고
  • 박진수
  • 승인 2013.04.1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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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생겼다
나는 직업군인이다. 스무 살 때 군인이 되어 8년째 군생활을 하고 있다. 공군 산하의 고등학교를 졸업

 
했으니, 그 기간까지 합하면 11년째 군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군대가 많이 편해졌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군생활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TV에서 본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항공(航空)과 관련된 공부를 주로 하는 공군 산하의 특수학교가 아주 멋있게 그려져 있었다. 기계 계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마음이 끌렸고, 그 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꿈이 생겼다.
나는 어려서부터 꿈이 많았다. 한번에 많은 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번 목표가 정해지면 그곳에 마음을 다 쏟을 만큼 꿈에 대한 열정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공부에 관심도 없고 성적도 썩 좋지 않았지만,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으로 3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입학시험을 치러 운 좋게 합격했다. 내가 원했던 학교였기에 무척이나 기뻤다.


외롭고 두려운 길
2003년, 부모님을 떠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군대와 같은 생활방식이 처음에는 굉장히 좋았다. 마치 수련회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딱 1주일 갔다. 1주일 후 정신을 차려보니,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멋진 생활은 일주일 뿐이었다. 항공기에 관련된 지식을 배우는 것은 새롭고 흥미로웠지만, 생활하는 것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속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는 어려움의 연속이었고, 내 마음은 점차 닫혀갔다. 군대 규율을 배우고, 그에 따라 생활했다. 모든 결정을 내가 내려야 했고, 그에 따르는 책임도 내가 져야 했다.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제한되어 있어서 항상 만나는 사람만 만났다. 그런 생활에 마음이 닫혀 계속 혼자 지냈다. 눈치가 늘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동기들과 어울리려고 노력도 했지만 마음이 닫혀 있어서 불편했다. 그런 거북스런 관계를 동기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동기들과 어울리기 위한 나의 노력이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 같아서 전학을 생각했지만, 학교가 국방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교육부에 속한 학교로 전학이 불가능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7년을 복무해야 하니, 그런 상태로 지내야 할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 캄캄했다. 내 인생의 10년이, 내가 바라지 않던 ‘외로움과 두려움의 길’로 정해져버린 것이다. 혼자라는 마음에 서글프고, 부모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어두운 밤, 계단에서 울며 부모님께 전화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날씨에 거기 들어가면 추워!”
무척 어려웠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잘해보겠다!’고 다짐했다. 힘들다는 생각을 잊으려고 몰두할 일을 찾았다. 관심이 있었던 항공기 관련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자연스레 공부에 몰두했고, 성적에 집착했다. 동기들과 더욱 단절되어 우울증과 강박증까지 생겨났다.
가끔 외박을 나가거나 방학을 맞아 집에 갔다가 학교로 복귀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내가 탄 버스가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학교에 돌아가면 밥도 먹지 못하고 며칠 동안은 넋이 나가 지냈다. 그나마 학교 내에 있는 상담소를 찾아가 눈물로 답답한 마음을 토하고, 마음이 통하는 몇몇 친구들 덕분에 근근히 버틸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2학년이 끝나갈 무렵, 학교에 있는 호수 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제 곧 3학년, 졸업하면 부사관(副士官)으로 임관, 그리고 의무 복무 7년! 도무지 해낼 자신이 없었다.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저 호수에 들어가면 죽을 수 있을 거야.’ 그 생각이 마음에서 자꾸 커졌다. 하지만 겁이 났다. 죽는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때 뒤에서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학교 선배이자 존경하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지금 날씨에 거기 들어가면 추워!” 하고 지나가셨다. 눈물이 났다. 현실은 싫고 죽기는 겁나고,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죽을 용기도 없는 나는 ‘그래, 스물 일곱까지 보장된 인생을 산다!’는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날아갈 듯
2006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원하던 정비병과를 받아서 본격적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임관하니 좋았다. 힘들었던 학교 생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내가 3년 동안 배운 것이 인내구나. 앞으로 무엇이든지 견뎌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좋은 기분으로 힘차게 군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을 떠나 독립하겠다는 마음으로 일부러 근무할 부대도 집과 먼 강릉으로 지원했다.
자대(自隊)에 배치된 후 막내 하사로 지내면서 이리저리 치이는 생활을 했지만 나름 재미도 느끼며 지냈다. 외로움과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낯선 환경이 오히려 신선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군생활을 익혔기 때문에 부대 생활도 익숙했고, 그동안 배웠던 정비 관련 이론들을 실제로 적용해보니 재미도 있었다. 얼마 뒤에는 영외(營外) 거주가 가능해져 출퇴근하였고, 일과 후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기분이 날아갈 듯 행복했다.


다시 시작된 우울한 삶
시간이 흐르면서 반복적인 생활이 점점 지루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부대에서 정비 일과 기타 일들을 하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시간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고.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면서 마음이 다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또 마음을 닫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다. 강박증이 다시 생겨서 무슨 일을 하든지 완벽을 추구했다. 상관들이 지적하거나 훈계하면 속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찾아 비판했고, 부하들에게는 대놓고 훈계하고 나무랐다. 나는 어떤 일이든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따돌림을 받기 시작했다. 자연히 군생활이 힘들어졌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혼자라는 외로움에 우울한 마음만 커져갔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과 어울려 보았지만, 학생 시절처럼 닫힌 마음에서는 불편한 마음만 올라올 뿐이었다. 역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일에만 집중했지만 공동생활을 하는 군대에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술도 마셔보았지만 실수가 이어지고 결국은 몸만 상하고, 취미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집에 들어가면 누워 있는 것이 가장 편했다.
군생활이 점점 무서워졌다. 사람들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편했다.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은, 고등학생 때처럼 ‘스물 일곱까지 보장된 삶을 산다’는 것이었다. 의무복무가 끝나는 날을 1개월 단위로 계산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마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하루는 퇴근하는 길에 내 마음이 너무나 황량한 것이 느껴졌다. 사막에 모래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TV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 내 마음속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마음이 그렇게 황량한데, 마음을 나눌 사람은 없었다. 가끔 부대의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마음의 삭막함을 하소연하지만, 그들과 마음이 흐르지는 못했다.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상관과 의논해서 근무 부서를 옮겼다. 지내던 곳을 떠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옮겨간 부서에는 너무나 강압적인 사람이 있었다. 전에 있었던 곳을 나오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날짜가 가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나 좀 도와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주위에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상담 시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충고해준 대로 말과 행동을 바꾸어 보았지만,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 날 밤, 야근을 하다가 생각에 잠겼다. 결국 바보 같은 생각을 다시 했다. 자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또 겁이 났다. 또 눈물이 흘렀다. 나 자신이 한심했다. 앞날을 생각해보니, 의무복무 기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지만 그 훗날도 불투명하여 걱정스럽기만 했다. 죽고 싶은 생각은 커지고, 겁이 나서 실행할 용기는 없고, 버텨볼 대안은 없고,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다른 길!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이제는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서 간절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누가 나 좀 도와줘!!’
야간 근무를 마치자마자 나를 도와줄 대상을 찾았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밤 10시에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부대 안에 있는 헌병대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당직근무를 서던 분이 ‘오늘 담당 대기자가 민간인인데 군인하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며 누구에겐가 연락을 했다.


2012년 9월 24일!
1시간쯤 기다린 후, 연락을 받고 온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윤준용 중사님
(기쁜소식강릉교회 집사)이었다. 중사님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아, 너냐?” 했다. 그날 윤 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주 일요일에 윤 중사님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개인적으로 하실 이야기가 있나?’ 하며 긴장하며 같이 저녁을 먹었다. 서로 근무지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마쳤는데, 윤 중사님이 “이번에 교회에서 성경세미나를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었다. 하지만 각기 종파들마다 서로 옳다고 싸우는 모습에 회의를 느껴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고참에게 밥을 얻어먹은 상황에서 성경세미나에 가자는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는 다음날 기쁜소식강릉교회가 횡계 지역에서 개최한 집회에 참석했다.
집회에 앞서 여러 공연들을 보면서 ‘좋구나~’ 하고 앉아 있었다. 이어서 강사인 정용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목사님은 사무엘상 30장에 나오는 다윗이 머물던 시글락 성이 불탄 이야기를 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 편으로 돌이키게 하시고, 돌이킨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말씀을 들었다. 불탄 시글락 성은 내 마음과 같았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참고 노력하고 발버둥쳤지만, 아무리 해도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처럼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나를 하나님은 집회로 인도해주신 것이다.
전해지는 말씀이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졌다. 강사 목사님이 꼭 나 들으라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았다. 강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끝나고 어느 전도사님과 상담을 나누었다. 그날 밤, 나는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내 죄가 사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나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2012년 9월 24일! 나는 그렇게 구원을 받았다.


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돌아보면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세상이 주는 위로로 나는 그 시간들을 겨우 견디고 있었다. 세상에는 좋은 말들이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 성공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등등. 또 쌓인 스트레스를 풀라고 취미생활을 권장한다. 코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다 잊으라고 한다. 가리지 말고 친구를 사귀라고 한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따라 살려고 했다. 나를 격려하고, 나에게 용기를 주고, 노력했다.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텼으니까.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없었다. 힘든 일이 생겨서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겼다. 또 적절한 방법을 찾고 찾아서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닫혀갔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구원받은 후에도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상황들, 일들, 그리고 사람들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전에는 분명히 나를 힘들게 만든 것들이었는데, 더 이상 힘들지가 않았다. 힘든 상황에서도 평안을 얻게 된 것이다. 오히려 내 마음의 평안함이 나를 어렵게 했던 일들을, 사람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진정한 평안을 찾은 것이다. 의무복무가 끝나는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던 내가 어느새 나를 힘들게 한 상황들, 일들,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또 그들에게 참된 진리인 복음을 전하고 싶고,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어졌다. 내 마음에서, 그리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신기해서 부대 내에 있는 구원받은 형제님들께 이야기하니, 그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얼마 전, 2012년 한 해 동안 해외 80여 개국에서 봉사하고 돌아온 굿뉴스코 단원들의 귀국 발표회인 ‘굿뉴스코 페스티벌’을 보러 간 자리에서, IYF를 설립한 박옥수 목사님이 전하신 ‘공기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흘러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었다. 나는 전에 마음과 마음이 흐르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마음을 닫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그로 인해 늘 괴로움을 겪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그 은혜에 젖어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교회로 인도해주셨다. 교회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도 배우고, 믿음에 대해서도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다!’ 하고 마음에 깊은 곳에서 공감이 된다. 그리고 부대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마음에 담고 구원받은 형제님들과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가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마음이 다 무너져서 ‘누가 나 좀 도와줘!!’ 하고 마음속으로 외쳤을 때, 그 외침을 듣고 내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 형편없는 나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내가 가진 이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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