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25) - 니케아 종교회의
교회사(25) - 니케아 종교회의
  • 이한규 목사
  • 승인 2013.04.1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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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25회)

 

박해 후의 교리 논쟁
오랜 기간에 걸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종식되고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리적 논쟁이었다. 초대 기독교 교리 논쟁의 최대 주제는 ‘삼위일체’ 문제와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문제였다. 이 논쟁은 아리안 논쟁(Arian Controversy)이라고 불렸다. 당시 정치적 안정을 이룬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가 종교적으로도 안정되기를 바랐다.

 


아리우스(Arius)
아리우스는 리비아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키가 크고 변설(辨說)이 명쾌하고 나름대로 논리가 정연하였다. 또 정열적인 데에다 금욕적인 생활을 하여 그의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는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이면서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260~272)에게서 배운 안디옥 신학교의 교장이었던 루시안(Lucian)의 제자였다.
아리우스(Arius)는, 성부 하나님은 시작이 없지만 성자 예수는 시작이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출현은 영원 전이 아니고 특정한 시간에 창조되었다고 했다.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에 의해서 창조된, 죄가 없는 최초의 피조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성부만이 하나님이며, 성자 예수는 본질과 영원성에서 성부와는 다른, 제2의 신이라고 하였다. 그가 내세운 주장의 기본 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일신론)이었다. 선하신 창조주가 유혹을 받을 수 없고, 신성(神性)은 유일하고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자 예수는 하나님일 수 없다고 했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개최 배경
아리우스의 안디옥 신학교 동문으로 루시안에게서 배웠으며 당시 대단한 권세를 가졌던 니코메디아(Nicomedia,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의 유세비우스(Eusebius)는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측근으로 당시 헬라어권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존경받던 자였다. 동방의 교인들도 대부분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와 그의 집사 아타나시우스, 코르도바(Cordova)의 호시우스(Hosius, 황제의 기독교 자문)는 아리우스 주의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알렉산드리아파와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는 안디옥파들 사이에 논쟁과 함께 반목이 증폭되어갔다.
콘스탄틴 황제는 자기가 보기에 ‘하찮은 문제’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스페인 감독인 호시우스를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고 종교적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황제는 최후 수단으로 AD 325년 5월 20일 니케아(Nicea, 터키의 이즈니크)에 있는 자신의 화려한 별장에서 전 로마제국의 기독교 감독 회의를 소집하기로 한다.
콘스탄틴은 각 지방의 감독들에게 약 400장의 안내장을 띄웠다. 각 지방에서 감독 외에 2인의 장로와 3인의 수행원이 회의에 참석하는데, 국가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도록 하고, 체재 비용과 왕복 여비는 모두 황실에서 지출해주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에서 최초의 세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42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은 황제의 영향력이 교회에 작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세 부류의 감독들
니케아 회의에는 각처에서 온 약 300명의 감독들이 모였는데, 대부분 헬라(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에서 왔으며,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에서는 겨우 6명만 왔다. 그 이유는 길이 먼 데에다 헬라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또 서방 감독들 중에는 박해 때 투옥되고 고문을 당한 이들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몸에 장애를 얻어서 참석이 어려운 탓도 있었다.
서방 신학의 중심적 주제는 ‘죄의 제거’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고, 우리는 그분 앞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서 있다. 우리 죄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고는 다시는 그분의 은총을 누릴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주셨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이 아니라면 구원은 없다’는 것이 서방 신학의 중심이었다.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였다.
①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니케아·칼케돈·에베소의 감독들
②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아타나시우스, 호시우스 등 소수 감독들
③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등 대다수의 중립파 감독들
아리우스파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 수행자 대표는 아리우스였다. 알렉산드리아파의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알렉산더 감독이었고, 수행자 대표는 아타나시우스였다. 거의 대다수였던 중립파 중 수석 책임자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는데, 그는 최초로 교회사를 저술한 유명한 역사가이지만 어용신학자라고 혹평을 받던 자였다. 이때 로마 교회는 감독이 연로하여 2명의 장로로 대리케 하였다.


회의의 전개 과정과 결과
개회일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회의장에 참석하였다. 사회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맡았고, 황제가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 회의의 의사 진행은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가 맡았다.
먼저 아리우스파의 거장이었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아리우스는 감독이 아니어서 공의회의 공식석상에 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비슷할 뿐(homo-iousios, 유사본질=like substance) 본질이 동일한 것(homo-ousios 동일본질=one substance)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히고 회의가 중단되었다. 그때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절충안을 제출하였는데, 그가 쓴 <교회사>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나뉘어 싸우기보다는 서로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제의하고 적당한 절충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지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니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졌을 뿐이다’고 하였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과 위격(位格)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신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아들은 시간 속에서 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하다고 하였다. 그는 구원자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라면 어떻게 인간으로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결합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한 분이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체구가 왜소한 당시 30세의 젊은 집사였다. 그는 니케아 논쟁의 중심은 구원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우리 인간을 거룩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회의의 대세를 주도하였다. 그래서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동일 본질론이 다수의 동조로 가결되었다. 그 결과로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것을 수정하여 니케아 신조를 채택했다. 이 신조에 참석한 회원들이 전부 서명했는데, 이집트의 감독 데오나스와 세쿤두스는 서명을 거절하였으므로 아리우스와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니케아 총회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이라 선포하였다.
이 외에 니케아 회의는 교회 정치에 관한 22개조를 결정하고, 부활절을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대로 춘분 후 만월 다음의 일요일로 정한다. 5월 20일에 시작한 니케아 회의는 7월 29일, 황제의 아우구스투스 즉위 20주년 기념 축연을 갖고 폐회된다.
이렇게 막을 내린 니케아 공의회는 초대교회의 교리 논쟁에 있어서 바른 교리를 정립하는 역할을 했다. 무수한 이단들이 대두되던 초대교회 시대에 니케아 회의는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등 전통신학의 근간을 세웠다는 점에서 교리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4세기 초, 교회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다. 그는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아타나시우스였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고, 그의 여생을 그것을 옹호하는 데 바쳤다. 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소유한 그는 신학자,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교회 지도자였다.
니케아 종교회의 당시 아리우스파에 정면으로 맞서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한 소수 감독들의 지도자는 알렉산더였다. 알렉산더를 따르는 무리 가운데 젊은 집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참 믿음을 변호하고 이단 교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헤쳐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니케아 회의 당시 라틴어권에서 온 서방교회 감독들은 니케아 회의의 관심사가 ‘오리겐의 전통을 잇는 동방교회의 문제’로 보고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서방교회 감독들은 터툴리안이 오래 전에 가르친 ‘3위와 1본질’에 대한 답을 이미 갖고 참석했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의 초두에 화해를 모색하다가, 박해 후 새로운 시대에 교회의 연합을 위협하는 교리 논쟁이 발생한 것을 개탄했고, 알렉산더를 보좌하러 회의에 참석했던 아타나시우스는 이 논쟁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공의회는 결국 예수님은 완전한 신성을 소유한 분으로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신조를 작성하기로 하고,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것이 ‘니케아 신조’로 불리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3년 뒤인 328년에 33살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다. 그는 젊은 시절 수도사들에게서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그의 강점은 사변적(思辨的)이지 않고 실천해가는 신앙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주님을 향한 불같은 정신과 심오하고 흔들림 없는 확신 때문에 누구에게도 정복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니케아 회의 이후 황제는 뜻을 여러 번 바꾸어 아타나시우스에게 핍박을 계속 가했다. 한번은 콘스탄틴이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받아들이라는 칙령을 내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독의 지위에서 파면시키고 유배를 보낼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자 아타나시우스는 전 교회의 결정에 의해 정죄된 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답변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의 이론을 이단으로 공격하며 아리우스의 잘못된 사상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싸우면서 평생을 보냈는데, 373년 사망할 때까지 45년간 니케아신조를 옹호하다가 다섯 번 이상 추방되었다. 그리고 온갖 핍박, 중상모략, 유배를 당했다. 그가 황제에 의해 다섯 번에 걸쳐 추방을 당한 후, 아타나시우스의 정통 입장은 교회 전체적으로 지지를 얻었다. 그는 여러 번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따라 잘못된 교리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진리를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았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이 되는 것은 신앙의 정절을 지킨 순수함이다. 그는 거짓된 교리와 싸우면서도 사람을 미워하거나 매도하려 하지 않았다.
헬라어의 정경(kavav)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도 아타나시우스(AD 352년경)이다. 또한 아타나시우스는 27권 신약성경 체제의 목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아타나시우스가 남긴 “인간은 본성상 필멸(必滅)의 존재이나, 은총으로 불멸(不滅)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짧지만 그가 복음적 신앙의 기초 위에 서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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