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26) - 로마 카톨릭의 형성과 교황 제도의 등장
교회사(26) - 로마 카톨릭의 형성과 교황 제도의 등장
  • 이한규 목사
  • 승인 2013.05.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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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기독교 공인 이전의 참된 교회
기독교 역사의 이면은, 예수님이 인류를 모든 죄에서 온전히 구원하신 복음을 전파하려는 교회와 이 복음을 대적하고 변질시키려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의 역사이다.
로마제국에서 무수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복음을 지켜왔던 교회는 박해를 이기고 승리하여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제위에서 물러날 때인 AD 305년까지 기독교는 국가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3세기 말까지 꾸준히 성장해 갔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는 사지(死地)로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교회에는 어떤 형태의 교파도 없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세상의 누룩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사탄은 죄 사함의 복음과 거듭난 교회를 세상에서 없애버리려고 온갖 공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고난 속에서 오히려 더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사탄은 다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핍박만으로 세상에서 교회를 말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 사탄은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 안에 세상이라는 누룩을 집어넣어 교회를 부패시키기 시작했다. 하늘에 속한 교회가 새로운 양상으로 세상에 속한 국가와 타협하고 변질되어 갔다. 박해는 종식되었지만,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는 부패와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무서운 속도로 세속화되었다.

세속화의 길로 가는 교회
약 200년간 박해와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로마제국의 핍박. 그 핍박의 칼은 칼집에 꽂혀졌고, 그대로 녹슬어버렸다. 콘스탄틴은 과거에 이방 종교들이 누리던 특권들을 교회에 부여했다. 로마제국과 교회의 관계는 갑자기 호전되었고, 로마 전역에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파괴되고 공격당했던 교회 건물들이 복원되고 예배당은 다시 문을 열었다.
기독교 공인 전까지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빌레몬서 2절의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대목처럼 주로 가정이나 비밀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3세기에 들어서서 예배를 위해 따로 마련된 건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밀라노칙령 이후에는 여기저기에 거대한 예배당들이 세워졌는데, 로마의 바실리카 궁정과 같은 형태로 지어졌다. 로마 교회의 감독에게는 로마제국에서 지은 라테란 궁전이 주어졌다.
콘스탄틴 사후에는 예배당에 상징적인 조각들이 나타나는데,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들이 성도들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할까봐 염려했다. 제롬은 베드로성당을 가리켜 말하기를 “바실리카(예배당을 가리킴)는 국가의 재정으로 세워졌다. 지붕은 금으로, 기둥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한때는 불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책이 이제는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져 화려하게 제본되어 있다.”라고 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성 소피아(신성한 지혜)’ 교회당은 아주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 건물은 교회의 감독이나 대(大)감독이 쓰는 금으로 된 왕관과 아주 잘 어울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법인 단체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등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는 등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의 예배는 궁중의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쓰이던 향불이 교회의 예배에도 사용되기 시작했고,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던 인도자들이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고 그 위에 밝은 빛의 망토를 걸치고 나타나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에 비해 속은 텅 비어 있는 인도자들이었다. 또 순교자의 무덤이 있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한 일들은 점차 순교자 숭배로 이어졌다.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 교회의 외적 문제를 감독하도록 임명하신 주교’라고 했지만, 기독교에 국교의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할 당시 기독교인은 서방 인구의 1/10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의 콘스탄티노플 천도(遷都)
콘스탄틴은 새 로마를 건설하여 옛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였다. 그 일을 위해 유럽과 아시아가 접하는 헬라의 도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는데, 그곳은 2,500년 이상 외침을 받은 일이 거의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일반적으로 ‘콘스탄틴 황제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플’로 알려져 있는 이 도시는 330년에 건립되었을 당시 가장 기독교화된 지역이었으며, 이방 종교의 영향이 가장 적은 곳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후 약 1,000년 동안 로마의 정치적, 문화적 유산을 계승하는 로마제국의 중심지가 된다.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고, 그 새 수도에서는 황제와 교회의 감독이 나란히 이웃하여 살며 교회는 극한 영광을 누렸다. 반면에 교회는 황제의 권력에 의해 심한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 결과로 후에 동방교회는 로마제국에 예속되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라틴어를 쓰는 로마와 유럽 쪽의 교회를 서방교회,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 외 지역의 교회를 동방교회로 구분한다.)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해 나가면서 공인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얼마 후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로마제국 정부와 결탁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를 원했는데, 영혼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도 없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사회적 위치나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욕망에 차 성직(聖職)을 원했다. 또한 예배의식이 부실해지고, 이방 종교 의식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퍼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자리에 선 콘스탄티노플 교회 감독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기 전까지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교회 감독들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높아져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교회 감독의 위상은 그가 속한 도시의 위상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 위상은 종교적 논쟁을 결정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는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명예와 위엄에 있어서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왕궁은 교회에 세속의 많은 것들을 주었지만, 교회와 세상에 속한 국가의 완전한 연합은 결코 있을 수 없는 합금(合金)이었기에 로마제국 정부는 한편으로 교회를 간섭하고 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동방교회의 감독들은 황제에게 의존하거나 황제와 갈등해야 했다. 그리고 통치자인 황제로 인해 감독의 권위는 교회에서 두 번째 위치에 있었다.

커져가는 로마 감독의 영향력과 교황제도의 등장
동방에 비해 서방인 로마에서는 감독의 위치나 권위에 대한 논란이 없었다. 황제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것은 로마 교회 감독의 권력이 커지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군주는 떠났으나 로마는 여전히 실질적인 수도로 대우받았고, 로마 교회의 감독은 서방 세계의 실질적 통치자의 겉옷을 물려받는 계승자가 되었다. 콘스탄틴이 33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면서 황제의 특권이었던 대신관(Pontifex Maximus) 직함이 로마 감독에게 위임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다는 주장이 퍼져갔다. 로마의 감독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이 로마의 위상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서 이어지는 천국 열쇠와 권위의 직계 계승자들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로마에 25년간 살면서 사역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으로 있었다거나 로마에 머물렀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고, 역사적 증거도 없다. 그런데도 로마 교회가 ‘사도 전승(傳承)의 수호자’라는 교리가 5세기 초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 같은 논거와 주장을 통해 로마 교회는 교회 전체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교회는 순수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가 아니라 권력에 눈이 멀어 군림하는 교회로 변해간 것이다.
최초의 교회 회의였던 니케아 회의 후에도 로마 감독의 우월성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로마의 초기 감독들은 교회사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러나 AD 402년 ‘이노센트 1세’가 로마의 감독이 되면서 서방교회의 이 같은 교리에 힘이 실렸다. 이노센트 1세는 ‘로마 감독의 승인과 찬성 없이는 서방교회가 독단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고, 다음 감독인 ‘조시무스’는 한 술 더 떠서 ‘로마 교회의 결정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권한이 없다’고 하였다.
440년부터 21년간 로마의 감독을 지낸 ‘레오 1세’는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재능으로 로마 교회의 모든 주장은 사도로부터 계승된 것이며, 베드로가 소유한 것은 그의 계승자들에게 전수된다고 주장해 로마 감독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로마의 대(大)감독은 모든 교회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스스로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교회가 정치적 야심으로 몸집을 키워나가면서 서방교회는 점점 거대한 정치조직체로 변질되어갔다.
로마의 대감독이라는 이름은 6세기 초에 ‘교황(Pope)’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초대 교황이 된 그레고리 1세는 금욕적인 삶을 살고 구제와 자선에 대한 열심이 남달랐으며 겸손했지만, 이후 교황들은 교황의 무오성(無誤性)을 주장하고, 교리적인 이견(異見)을 가진 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며, 연옥 교리를 주장하고,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드리는 등 성경에서 동떨어진 교리들을 주장해나가기 시작했다.
로마의 교황들과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들 사이에서 일어난 세력 다툼은 결국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교리에 있어서도 서로 차이가 생겼다.

교회의 타락이 주는 역사적 교훈
교회와 국가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시기에는 교회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힘있게 증거했다. 끊임없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고, 거듭난 사람들을 거룩한 교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성령이 인도하시던 그 자리에 인간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영광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영적인 순결과 탄력을 잃었다. 교회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면서 급속도로 타락하고 부패해 갔다.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밝힐 빛이 되지 못했고, 병들고 썩어들어가는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교회도 병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변방의 여러 민족들이 대규모로 이동하고 로마를 강타하면서 로마는 서서히 망해갔다. 사치와 교만, 안일과 쾌락에 빠져 있던 로마는 정복자들에게 약탈되고 도시가 파괴되면서 476년 서로마제국은 몰락하고 만다.

교권제도의 확장과 그리스도인의 반대
교회는 국가와의 연합을 통해 교권제도를 형성시켜 나갔다. 이 교권제도는 오늘날 카톨릭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교회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자 이에 동조하지 않고 참된 믿음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타락한 기독교인들에 반대했고, 사탄은 어용 기독교인들을 이용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국가 교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법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으로 몰리며 산골짜기나 동굴 등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교회와 국가의 동맹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수사(修士)들의 사막 은둔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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