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27) - 초기 교회의 교부(敎父)들
교회사(27) - 초기 교회의 교부(敎父)들
  • 이한규
  • 승인 2013.06.1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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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교회의 아버지’란 뜻을 가진 교부들
사도들의 뒤를 이어 기독교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며 신학의 발전에 공헌한 지도자들을 보통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교부(敎父)라고 칭한다. 교부란 ‘교회의 아버지’란 뜻을 지니고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나가고 복음의 진리를 체계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대교회가 많은 핍박과 도전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동안, 복음의 진리를 학문적으로도 정립하고 체계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교부들의 신학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침과 동시에 외부의 도전들에 대한 변호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변호에 직접 참여한 교부들을 ‘변증가’라고도 부른다.
교부의 자격 중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교리에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상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정통적이지 못하면 교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통성의 문제도 ‘정통’에 대한 정의가 달라 표준 척도가 되지는 못했다. 한 예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의 경우 서방교회에서는 그 사상의 비정통성 까닭에 교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동방교회에서는 교부로 받아들였다.
첫 번째 교부로는 1세기 말에 활동한 로마의 클레멘스를 꼽고, 마지막 교부로는 동방교회에서는 다메섹의 요한(725년 사망)을, 서방교회에서는 그레고리 1세(604년 사망)를 꼽는다. 교부들의 신학 사상은
2세기경부터 7~8세기까지 계속된다. 교부들의 신학 사상은 주로 예수님이 계시하신 진리,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 구약 성경의 예언, 기독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이방 철학과 관련된 변증 등이었다.

교부들의 구분
학자들은 속사도와 교부들을 구분하기도 하고, 속사도들을 교부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30~100년경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헤르마스, 알렉산드리아의 법률학자 출신 바나바, 히에라볼리의 파피아스, 서머나의 폴리갑 등은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이라 할 수 있다. 서머나의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로마의 히폴리투스,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그레고리 등은 3세기까지의 교부들이다.
니케아 회의 이후의 교부들로는 이탈리아의 락탄티우스, <교회사>의 저자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 갑바도기아의 바질,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암브로스), 안디옥의 요한 크리소스톰, 로마의 제롬, 북아프리카의 어거스틴 등이 있다.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데에 맞서 복음과 교회를 수호하는 데 힘썼던 교부들을 ‘변증 교부’라 부르기도 한다.
사료(史料)로만 볼 때, 이들 교부들이 영원한 속죄와 부활과 거듭남을 이루는 복음의 기초 위에서 교회를 인도한 지도자들이었는지는 분명히 검증하기 어렵다. 후세의 복음주의적 역사가들은 ‘교부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관해 한 말 가운데 십자가의 보혈로 영원한 속죄를 받고 거듭나는 구원의 복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평가하고 있다.
교부들은 동방 교부와 서방 교부로 나누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가이사랴의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요한 크리소스톰 등은 동방 교부이고,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제롬, 히포의 어거스틴 등은 서방 교부이다. 지역적으로는 소아시아 헬라 교부들(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 신학 교부들(클레멘스, 오리겐), 라틴 신학 교부들(터툴리안, 키프리안 등)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교부들 중 니케아 회의 이전의 속사도들이나 변증가들은 이미 언급했으므로 니케아 이후의 대표적인 몇 사람을 소개한다.

밀라노 감독이 된 교부 암브로스(암브로시우스)
암브로스는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던 귀족 집안의 출신으로 339년 트리에(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며, 아버지는 로마의 속주 갈리아제국의 총독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암브로스는 로마로 가서 신자(信者)인 프로부스(Probus) 밑에서 일하며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와 수사학자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 후 32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밀라노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프로부스는 “이제 법관이기보다는 감독이라는 기분으로 정치하시오”라는 덕담을 건넸는데, 정말 그는 감독에 오르게 된다.
암브로스 총독의 공관은 북부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이탈리아 제2의 도시였던 밀라노에 있었는데, 당시 밀라노의 교회 감독은 황제의 후원을 받는 아욱센티우스(Auxentius)였다. 아욱센티우스는 아리우스파(派)로 분류되었는데, 암브로스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374년) 후임자 문제로 도시의 평화가 위협을 받았다. 정통파(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가 서로 자기 파 사람을 감독으로 세우려고 격렬히 대립했다.
암브로스는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치안과 질서를 유지시킬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선거 현장에 참석했다. 그는 긴장감이 감도는 교회에 나타나 뛰어난 연설로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때 한 어린이가 일어서서 “암브로스가 감독입니다!” 하고 외쳤다. 그 말이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람들이 “암브로스가 감독이다!” “암브로스를 감독으로!”라고 외쳤다. 그 말이 급속히 확산되어, 대립 관계에 있던 두 파가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암브로스는 34세가 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고, 신학적 지식을 충분히 지니지 못한 행정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지지했다. 물론 인정받던 행정가였기에 감독으로 추대했겠지만, 그들이 볼 때 종교적 경험이 없는 총독이야말로 신학적 논쟁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적임자로 보였던 것이다.
나중에 암브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감독으로 부름 받는 데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속에 헌신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주님]의 은혜로 저는 바로 제가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감독직 수락을 애써 거부했지만 시민들은 어떠한 실수라도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며 열띤 성원을 그에게 보냈고, 주위의 감독들이나 황제까지도 그를 감독으로 승인했다. 그리하여 암브로스는 성직자가 밟아야 할 모든 절차를 8일 만에 마치고 374년
11월 24일 세례를 받고, 12월 1일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감독으로서의 직임에 충성했다. 이러한 면을 보면, 4세기 말 교회의 인도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과 소신이 있고 겸손했지만, 정확히 죄 사함을 받고 복음적 신앙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암브로스와 아리우스주의자와의 싸움
신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암브로스는 배우기도 전에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배우기와 가르치기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신학과 성경 공부에 몰입했다. 또한 청빈한 삶을 살며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죽기까지 감독의 위치에 있으면서 당시 로마의 수도였던 밀라노의 감독으로서 여러 황제들에게 큰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
암브로스가 교회의 내분을 수습해 교회들이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이 정통파 감독임을 드러내 아리우스파에 적극적으로 맞섰다. 아리우스주의자들도 그를 감독으로 지지한 것을 후회하면서 시종일관 그를 반대했다.
이 대립 관계는 378년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벌어진 로마와 고트족과의 싸움에서 노골화된다. 그 전투에서 로마 군사의 2/3 이상이 죽고 발렌스 황제까지 전사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포로가 되었으며, 피난민들이 밀라노로 몰려들었다. 고트족은 그들이 사로잡은 포로들의 몸값을 요구했고, 암브로스는 교회 기물을 팔아서라도 포로로 잡힌 기독교인들을 석방시키려 했다. 그때 그의 약점을 잡으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물(聖物)을 파는 감독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교회 소유의 금, 은, 장식물을 녹여 피난민들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도록 명령한 암브로스를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암브로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주님을 위해 황금보다는 영혼들을 보존하는 것이 더 낫다. 사도들에게 황금을 주지 않고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황금 없이 교회들을 모으셨다. … 저들이 가장 값지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 기물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영혼인가? 금그릇들보다 살아 있는 그릇들을 차지하는 것이 낫다.”
그는 목소리가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설교자여서 인기가 많았고, 연속 설교를 좋아했다. 또한 당시 밀란에 있던 어거스틴에게 회심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후에 어거스틴이 가르친 타락과 죄에 대한 교리의 기초를 놓았다. 암브로스는 “아담 안에서 나는 타락했고, 아담 안에서 나는 낙원에서 쫓겨났으며, 아담 안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아담 안에 있으므로 나는 죄인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황제를 굴복시킨 감독
암브로스와 관련된 일화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390년 마게도냐에서 데살로니가 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로마군 장교 한 사람을 살해했다. 그 배경은 이러했다. 데살로니가에 유명한 전차 경주자가 있었는데, 그가 황제의 장교에게 체포당할 만한 범죄를 저질렀다. 경기 날짜가 다가오고, 사람들은 전차 경주자의 출전 모습을 보기 원했지만 그를 출전시키지 않자 그 장교를 살해해버린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격노해 양민 수천 명을 데살로니가의 원형경기장에 모은 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데오도시우스는 3년 전(387년)에 안디옥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크리소스톰의 설복 때문에 용서한 바 있지만, 이번에는 본때를 보이려고 작심했던 것 같다. 주둔군 사령관을 살해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신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황제가 자행한 일은 변명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명령을 시달한 후 황제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당시 로마법은 사형을 명령하면 유예 기간 없이 즉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거대한 원형경기장 안으로 7천여 명의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군인들 역시 들어갔다. 경기장에 사람이 가득 차자 군인들은 문을 걸어 잠근 뒤 세 시간 동안에 사람들을 모두 학살했다. 황제의 새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군인들은 7천여 명의 데살로니가 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해버린 것이다. 야만적인 처벌에 익숙해 있던 당시에도 그런 규모의 피의 보복을 보고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암브로스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신중하게 황제에게 공개 편지를 썼는데, 파문을 당하든지 회개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요구했다. 암브로스는 자신의 교인인 황제의 사건을 목회와 연관된 문제로 보았기에 데오도시우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황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로마제국이 아무리 기독교 제국이라 해도 황제를 향한 공개적인 질책과 출교시키겠다는 경고는 암브로스의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는 황제를 파문시킨다는 용단을 내리고 그에게 성찬 참예 금지령을 내렸다. 황제는 후회하며 암브로스의 준엄한 책망을 달게 받아들였다.
황제는 성급한 분노로 야만적 행위를 한 부분에 대해 통회하고 암브로스를 찾아가 자비를 간청했다.
“진실로 참회하는 모든 자들에게 문을 여시고 결코 닫지 않으시며, 이 모든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주시는 자비로우신 주님의 뜻 안에서 당신의 용서를 구합니다.” 암브로스는 현관에서 그를 만나 “당신이 사람의 피로 물든 손을 그대로 지닌 채 이곳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하고 황제가 참회의 증거를 보일 때까지는 교회에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하였다. 황제는 자신이 통회하고 있음을 확신시키려 하였으나, 암브로스는 사사로운 후회는 공적인 죄를 사함받기에 불충분하다고 했다.
황제는 이후 심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황제는 감독에게 굴복하고 8개월 간 회개의 은둔생활을 했으며, 홧김에 일을 처리하는 일이 없도록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30일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배경 아래서 로마제국 역사상 최초로 사형선고에서 사형집행까지 유예를 주는 제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황제는 예복을 벗고 평민 복장으로 교회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공중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호소하였다. 전에는 꼿꼿이 선 채로 기도하였지만 땅에 꿇어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사람들은 울면서 그와 함께 기도했고, 그의 슬픔과 겸손에 감동 받았다. 황제는 성찬 금지를 당한 지 8개월 만인, 그 해의 성탄절에 다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후 데오도시우스와 암브로스의 관계는 대체로 평온하였다.

암브로스에 대한 평가
데오도시우스의 일로, 동방에서는 황제가 교회를 지배했으나 서방에서는 교회가 황제를 제어하게 되었다. 교회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암브로스는 가난한 자와 눌린 자를 돕는 한편,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시켰다. 사실상 교회의 권위를 국권 위에 올려놓는 토대를 구축했다. 서방교회에서 그 전까지 암브로스를 능가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는 없었다. 그는 감독의 목회적 업무를 복음이나 신학적 업무보다 중시했다.
이후에 카톨릭교회는 교황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데 암브로스를 십분 활용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암브로스가 정착시킨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카톨릭주의’ 또는 ‘교황주의’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암브로스는 로마카톨릭의 권위를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쨌든 암브로스는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중세에 교회의 힘이 커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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