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일'과 '영의 일'
'육신의 일'과 '영의 일'
  • 이헌목
  • 승인 2013.06.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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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에서 이스마엘이 아들로 행세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

 
지 누가 보아도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그가 쫓겨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장막에 이삭이 태어나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결국 쫓겨나고 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이뤄지는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자신이 애씁니다. 더 잘해 보려고 안달입니다. 그처럼 자신이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하려고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나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야 할 거짓 아들로 드러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영이 탄생하면서 내가 잘하려고 하는 ‘육신의 일’이 쫓아내야 할 거짓 신앙임을 알게 됩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영의 일입니다.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고 하나님만 일하시는 것이 영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만 일하셔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이후의 신앙생활도 오직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는 세계를 깨닫도록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가 받아들인 믿음도 우리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입니다.
“…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영의 일’은 이삭이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영의 일’을 모르면 육신을 좇아 태어난 이스마엘처럼 멸망당할 육신의 일에 빠져서 평생을 종교인으로 살면서도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일을 좇는 자는 반드시 쫓겨납니다. 반대로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얻습니다. 사탄은 이 사실이 중요한 것임을 알기에, 우리로 하여금 늘 자신이 일을 잘하는 것에 마음을 두게 해서 이 놀라운 세계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영의 일을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3~4)
이 말씀에서 인자는 영어로는 mercy로, 자비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truth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진리’(요 14:6)라고 하신 것처럼, 여기서 ‘인자와 진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와 진리’는 ‘오직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영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교회 일에 봉사하고 헌금하고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영의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내가 하면 ‘육의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영의 일’입니다.
잠언 3장에서는 이것(영의 일)이 떠나지 않게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의존해야 하는 흙과 같은 존재임을 알 때 우리 마음에 ‘영의 일’을 새길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내가 잘한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고 삶에도 유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자와 진리’에서 떠난 마음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습니다. 남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여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영의 일’을 믿을 때 우리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우리가 어떠한 존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다”(고후 12:10)라고 한 것은, 자신이 약할 때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 곧 ‘영의 일’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자신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행위적인 ‘육의 일’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나의 존재가 흙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늘의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약할 그때에 하늘의 것, 즉 ‘영의 일’을 믿음으로 끌어올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강한 자, 이긴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도록 해주시는 예수님이 그런 삶을 우리 안에 이미 주신 것을 우리는 약할 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소유(to have)하지 못한 데에서 인간은 불행이나 부족함을 느끼고 그로 인해 삶이 늘 힘들게 느껴지며, 설령 삶의 원하는 것을 소유(to have)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얻는 만족감, 행복감, 설레임 등은 한순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존재(to be)를 알게 될 때에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그때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성도들도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해서 교회에서 세움을 입고, 그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처럼 소유(to have)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렵고 안됩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잘했느냐, 즉 소유(to have)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to be)가 어떠한가를 정확히 알게 될 때 거기서 영적 풍요와 참된 행복이 발견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위치(to have)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악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존재(to be)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에 흙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to be)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이 비워져 있는 우리에게 비로소 부어집니다. 이것이 참된 복입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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