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목 같은 인생
조각목 같은 인생
  • 김창영 목사
  • 승인 2013.07.11 18: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경 강좌_거기에서

 

 

조각목(가시나무)으로 궤를 만든 후 그것을 정금으로 싸서 완성되는 법궤. 조각목 같은 우리를 정금으로 온전히 덮어 영광스런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이야기의 두 번째 내용으로 조각목, 곧 우리 인생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두 가지 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죄와 성경이 말하는 죄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죄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여기에 두 가지 악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두 번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린 후 목이 마르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웅덩이를 파는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선을 떠나서 선해지려고 하는 인간
인간은 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이야기하기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체적으로 말고 세분화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안에는 선도 있고, 거룩도 있고, 평안도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것은 선을 떠난 것이고, 거룩을 떠난 것이고, 평안을 떠난 것이고, 행복을 떠난 것입니다. 선을 떠난 인간이 선이 없어서 고통스러우니까 스스로 선을 만들어내려고 웅덩이를 판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떠난 인간이 행복이 없어서 고통스러우니까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려고 웅덩이를 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선을 떠나서 선해지려고 하고, 거룩을 떠나서 거룩해지려고 하고, 행복을 떠나서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스스로 그 상태에 도달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처럼 스스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두 번째 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는데, 그것이 정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줍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터진 웅덩이여서 결코 물을 저축할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에게 포도를 맺으라고 한다면…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도둑질, 미움, 음란, 이런 것들이 악하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이해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해지려고 하는 것이 악하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성경은 바로 그것이 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가시나무가 포도를, 엉겅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만약 가시나무에게 포도를 맺으라고 한다면, 엉겅퀴에게 무화과를 맺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로 선하게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상합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가시나무요, 엉겅퀴라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난 죄의 나무에서 어떻게 선이 맺히겠습니까?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모으려는 것과 같아서, 선이 쌓여지는 것 같다가 결국 다 새나갑니다.
지금은 중학생인 제 딸이 일곱 살 때 일입니다. 당시 저는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 아내가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있다가 딸아이가 씻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씻지 않아서 “시은아, 빨리 씻고 자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딸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엄마가 씻으라고 하니까 갑자기 “에이씨”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깜짝 놀라고, 저도 옆에서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가 “너, 방금 뭐라고 했어?” 하고 다그치자 딸이 “어, 쉬 마렵다고.”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 아내도, 저도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습니다.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즉각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그 지혜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배운 게 아니라 아버지인 저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저는 그 마음을 배웠습니까? 저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시나무인 것은 가시나무 같은 성품을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출생할 때부터 가시나무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선을 떠난 죄악된 성품이 인간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미워하고 도둑질하고 음란하고….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쏟아내는 악들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행하는 두 번째 죄입니다.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 것이 우리 조상 아담이 행한 죄라면, 그 상태에서 스스로 선해지려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행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스스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절대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사람이 아닌 이웃에게 사랑받아야 할 사람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자기 삶에 제대로 적용한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은 표면적으로 대할 때에는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그렇게 살려고 해보면 ‘아, 내가 성경 말씀대로 살 수 없구나!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처럼 우리 속에 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데, 율법사는 거꾸로 율법을 행해서 영생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서 영생을 얻겠다며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인을 만나서 살아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사랑할 대상인 이웃’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과 ‘그에게 사랑을 베푸는 이웃’에 대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이웃인 사마리아 인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율법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강도 만난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모습을 모르고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했기에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사 59:6)
요즘 옷은 패션이지만, 옷의 본디 목적은 사람의 부끄러운 것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9장 6절에서 말씀하기를, 인간이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고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있는 부끄러운 것들을 가립니다. 양심으로, 윤리로, 체면으로…. 그러나 그것은 옷을 이루지 못하기에 결국 부끄러움을 가리지 못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혹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 말씀에서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죄’가 더러운 옷 같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보기에 선하고 깨끗한 ‘우리 의’가 더러운 옷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쇠패함이 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 같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려 있는 잎과 낙엽이 다른 것은,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 그 자리에서 왔다갔다하지만 낙엽은 바람에 몰려갑니다. 사람이 의를 행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의로운 것 같다가도 죄악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면 누구라도 그 바람에 쓸려가고 맙니다.
웅덩이를 깊이 파는 사람도 있고 얕게 파는 사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는 사실입니다. 선하게 살려고 깊이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결국 선을 행하지 못하고 죄를 짓습니다.

율법사는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사랑할 이웃이 아닌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그 이웃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그곳은 바로 거반 죽어 있는 곳입니다. ‘내가 정말 더러운 인간이구나! 하나님을 떠난 나는 악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마음이 무너진 곳입니다. 쓰러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에게 다가가 모든 것을 이뤄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 질병, 삶에서 당하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은 당신이 다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