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 이유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 이유
  • 박영준 목사
  • 승인 2013.07.1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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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육체의 욕망에 빠져 산 고린도 교회 성도들
고린도전서 5장을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는 분명히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모인 하나님의 교회인데,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사셔서 그들을 도우시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분쟁이 있고, 음행이 있고…. 고린도 교회는 성도들이 계속해서 흩어지고 죄악 속에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그런 문제들을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들이 변할 텐데, 하나님은 왜 당신의 교회인 고린도 교회를 돕지 않으실까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를 보면, 먼저 그들의 마음에 하늘의 소망을 갖게 하고, 다음에 복음을 위해 자신들을 불사를 수 있게 그들을 이끌어 갔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바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바울은 구원받은 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난 뒤에 도리어 자신이 버림당할까봐 두려워했고, 자신과 싸웠습니다. 그에 반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다 되었다’ 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서는 버림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육체의 욕망에 자신을 내주며 살았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
요즈음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에서도 고린도 교회와 같은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나? 하나님이 하셔야지’ 하면서 태만하게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삶 속에서 도우시는 것이 없고 그들의 마음에 일하시지도 않는데 그냥 삽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말은 잘했지만 능력은 없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도우심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외형으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에 닥쳐오는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고 골리앗이 나타나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사울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자기 딸을 주겠다며 딸을 내놓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모습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문제 앞에서 사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살며 믿음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죄악 속으로 흘러갑니다. 오늘 우리는 ‘내게 닥치는 문제들을 내가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서 자신이 믿음이 있고 괜찮은 성도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갈처럼, 어떤 사람은 아비가일처럼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생각해봅시다. 사울의 딸 미갈은 골리앗을 죽인 다윗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미갈의 마음을 살펴보면, 미갈은 다윗과 결혼한 후 형편을 따라 흘러갔습니다. 미갈이 남편 다윗을 보니까 늘 아버지 사울에게 쫓겨다니며 광야에서 지내는 겁니다. 그래서 미갈은 다윗을 버리고 발디엘과 결혼했습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미갈은 자기가 보는 형편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미갈은 얼마나 부끄럽고 마음이 어려웠겠습니까? 이것이 믿음 없이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은 미갈과 달리 믿음의 눈을 가진 성도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시 다윗은 광야에서 600여 명을 데리고 다니는 볼품 없는 사람이었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치리자로 보았습니다. 똑같은 형편 앞에서 아비가일은 미갈과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구원받은 성도 가운데 어떤 사람은 미갈처럼, 어떤 사람은 아비가일처럼 살아갑니다.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였지만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작은 사람, 만물의 찌끼처럼 여겼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던 것처럼, 바울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참 많은 성도들이 바울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간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이 말씀에서 누룩은 죄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 빛이요 온전한 자들인데 왜 묵은 누룩을 가지고 있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희생하셔서 우리의 죄를 끝내 놓으셨는데, 왜 육신의 성품을 좇느냐? 옛 성품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에, 어린양의 피로 심판이 넘어간 유월절에 이어서 바로 무교절이 시작됩니다. 무교절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입니다. 구원받은 후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순결하고 신령한 것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누룩이 들어간 떡처럼 자신들을 부풀리고, 자신들의 신앙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희생하셨지만, 그들은 누룩을 내버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세우며 타락한 삶을 산 것입니다.

겉모양을 갖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외형적으로 아름다웠지만 그 안은 소와 양을 파는 등 더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것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겉모양을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마음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죄악으로 마음이 흘러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새 마음을 얻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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