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으로 포장된 절망의 늪에서 나와
행복으로 포장된 절망의 늪에서 나와
  • 신해솜
  • 승인 2013.08.1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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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두려움으로 어둡게 채색된 유년시절
 
내 고향은 경남 하동.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고, 아침에 면으로 나가는 버스 한 대와 밤늦게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 한 대가 전부인 깡촌이었다. 한쪽 팔을 못 쓰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무게까지 혼자 짊어지고 5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워내셔야 했던 우리 엄마. 엄마는 머리에 물건을 이고 동네마다 다니면서 행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다.
그런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소죽을 끓이고, 밥을 해놓고는 동생 손을 잡고 엄마를 마중 나갔다. 엄마가 언제쯤 오시는지도 모르면서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동생을 달래가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밤이 깊도록 몇 시간이고 엄마를 기다렸다. 그 어둠을 뚫고 지친 몸을 이끌고, 물건 값으로 돈 대신 쌀이나 무거운 짐을 잔뜩 이고 오시는 엄마. 우리는 날마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반가워했다. 어린 내가 그 짐을 대신 받아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고 억지로 고집을 부리며 나는 씩씩하게 짐들을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날이면 엄마 대신 내 몸보다 몇 배나 더 큰 리어카를 끌고 엄마에게 힘이 되기 위해 애를 썼다.
아버지는 장애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술과 노름, 여자를 좋아하는 한량으로 사셨다. 한 번 집을 나가면 몇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시고, 언제나 만취 상태에서 동네 사람들과 싸우며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셨다. 집에 와서는 물건들을 부수고 가족들을 때리며 하루도 편한 날이 없게 엄마와 우리를 괴롭히셨다. 어린 동생과 나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언제 술에 취해 나타나실지 겁이 나 무서워서 떨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술이 제일 싫었다. 아버지도 얼마나 싫던지 아버지 없는 친구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 형편도 어려웠던 차에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부산행을 결심했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나의 유년의 산하(山河)는 그렇게 눈물과 두려움에 억눌려 아련한 추억 속에 묻어둔 채 희미해져 갔다.

 
꿈 많은 여고생의 방직공장 생활
열여섯, 어린 나이에 중학교 졸업식장에도 못 가보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 3교대의 방직공장은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공장 안은 찜통 같아서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에도 여름 옷을 입고 일했고,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했다. 실을 짜내는 엄청난 소음의 기계 소리와 먼지 속에서 기계가 멈추면 안 되었기에 비 오듯이 땀을 흘리는 가운데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관지가 나빠져 점점 말을 하기 힘들었고, 허리도 망가져갔다. 밤새 일하고 흰 눈을 맞은 것처럼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퇴근했지만,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없어서 야외 샤워장에서 얼음처럼 찬 물로 샤워하고 학교에 가면 머리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리곤 했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비몽사몽 상태로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출근해야 했다. 너무 힘이 들어 밥을 잘 먹지 못했고, 입안이 깔끄러워서 콜라를 마시거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꿈 많던 나의 여고 생활은 방직공장에서 그렇게 끝날 것 같았다.

짜증에 찌들린 중국집 아줌마의 모습만 남아
힘든 삶에 지쳐 친구를 따라서 간 교회에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그때부터 하나님께 매달려(?) 복을 받고 싶어서 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그런데 당시 우리 교회에는 안 되는 게 왜 그리 많던지…. 못 하게 하니까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 어릴 적 꿈이 연예인이었는데, 내 몸에 흐르는 그 끼를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터 교회에 다니기 싫은 마음이 일어났다. 결국 1988년 여름 부산에 엄청난 홍수로 물난리가 나던 날, 나는 다시 집을 나섰다. 교회가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아버지를 피하고, 이제는 다시 교회를 피해서….
거제도에 있는 큰언니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내다가 유치원 교사를 했다. 나름대로 꿈도 가지고 열심히 하다가 생각보다 일찍 인연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대우조선에 다니면서 중화요리집을 차렸는데, 종업원들을 통솔하며 식당을 꾸려가는 일은 경험 없는 20대의 어린 나이였던 우리에게 역부족이었다. 주방장은 밤새 술을 먹고 사흘에 한 번씩 결근했고, 배달하는 아이들은 수금한 돈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주방 아줌마는 아프다는 핑계로 자주 나오지 않았다. 직원들을 야단이라도 치면 오히려 칼을 가지고 협박까지 했다. 참다못한 내가 오토바이를 배워 직접 배달이나 시장 보는 일을 하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잘못하여 공중에 몇 미터를 붕 떴다가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온 몸에 부상을 입었고, 오토바이 공포증이 생겨서 지금도 오토바이는 타지 못한다.
할 수 없이 만삭의 몸으로 커다란 배달통을 들고 직접 배달을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경리와 주방장이 눈이 맞아 우리 부부를 속이고 돈을 모두 들고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그래도 가게문을 닫을 수는 없어 남편은 주방을 보고, 나는 배달도 하고, 짜장면도 뽑고, 그릇도 씻고, 카운터도 보면서 초인적으로 일을 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소녀 시절에 가졌던 화려한 연예인의 꿈은 어디 가고, 머리 질끈 묶고 밀가루 묻은 옷에 슬리퍼 질질 끌며 짜증에 찌들린 중국집 아줌마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결국, 중국집은 2년 후 보기 좋게 망했다.

화려한 암웨이의 리더 거제도 공주가
그 즈음 시동생을 통해서 ‘암웨이 사업’을 알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이 사업이야말로 내 꿈을 이룰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미친 듯이 일했다. 젖먹이 아이를 업고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가서, 그 집 유리창을 다 닦아주고 7천 원짜리 세제 하나를 팔고 돌아오기도 했다. 일이 어느 정도 되어가면서는 서울, 대전, 대구, 부산 … 자가용 두 대가 부서질 정도로 전국을 뛰어다녔다. 비가 너무 쏟아져서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고속도로를 목숨을 걸고 달렸다. 거제도의 새벽 도로는 해무(海霧)에 가려 1미터 앞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그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일주일에 사나흘 밤을 새는 건 기본이었다.
인생 전부를 암웨이에 걸었다. 암웨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덧 내 아래에 5천 명 이상의 그룹을 두고 강의하고 후원하며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침내 나는 무대에서 드레스를 입고 손을 흔드는, 전국에서 몇십 위 안에 드는 유명한 리더가 되었다. 내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울었고, 연설 내용이 녹음 테이프로 만들어져 전국에서 팬들이 숱하게 일어났다. 두 달만 지나면 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 전용 헬기에, 별장에, 요트에,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이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의 미래가 그렇게 열릴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TV 뉴스에 암웨이가 나쁘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10배 희석해서 쓰는 고농축 세제를, 희석하지도 않은 채 그 안에 금붕어를 넣고는 금붕어가 다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노했지만 방송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고, 반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업, 끝까지 함께하자던 그 많던 나의 조직은 파도가 지나간 해운대 백사장의 모래알들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제발 꿈이기를…’ 나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정신 나간 여자처럼 멍하니 지내다가. 결국 보따리 두 개만 들고 다 망해서 다시 부산으로 왔다.

 
암웨이 사업을 다시 할 거라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에 사무실 한 칸을 얻어 전기장판 하나로 2년 동안 추운 겨울을 났다. 자다가 너무 추워서 눈을 뜨면 코가 얼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죽고 싶었다. 꽃처럼 화려한 암웨이의 리더 거제도 공주가 식당에서 그릇을 닦을 수도 없고, 노래방에 가서 탬버린을 흔들지도 못하고, 아는 사람 볼까봐 식당에서 서빙을 할 수도 없었다. 죽기 딱 좋은 형편이었다. 천 원이 없어서 밖에 나가질 못했다.
남편과 나는 더 이상 대화가 없었다. 1주일이고 2주일이고 한 집에 살아도 말 한 마디 않고 지냈다. 잔소리나 부부 싸움도 서로에게 어느 정도 희망이나 애정이나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것이었다. 우린 더 이상 싸우지도, 잔소리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 깔딱깔딱 숨만 쉬고 있었다.

“망하는 건 거기까지만요. 아들은 안 됩니다!”
상처뿐인 마음을 짓이기듯, 그 고통스런 날들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이를 데리고 암웨이 사업을 할 수 없어서 아들을 시골 시댁에 맡겨둔 때였다. 아들을 자주 남에게 맡기다 보니 예민해져서 엄마가 자기를 두고 어디 갈까봐 잘 때마다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잠드는 아이였다.

 
그런 아들을 시골에 떼어놓고 오려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밤새 울고, 아이가 깨기 전 새벽녘에 시댁을 나서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흙 마당에 주저앉아 입을 막고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시아버지께서 일어나셔서 울고 있는 내 등을 토닥이셔서 ‘아버님, 죄송합니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속으로 말하며 아버님께 큰절을 올렸다. 남편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차에 오르며 ‘불쌍한 내 아들. 사랑하고 미안하다. 엄마가 꼭 성공해서 데리러 올게’ 라고 맹세했지만, 망해서 아들을 찾으러 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트럭을 타고 가다 달리는 차안에서 문이 열리면서 떨어져 트럭 바퀴가 아들 발 위를 지나가 새끼발가락 뼈가 완전히 부서지고 발등의 살이 다 짓이겨져서 큰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온 방을 맴돌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가도 마음이 급한데, 차에 기름 넣을 돈도, 빌릴 데도 없었다.
그제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하나님”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 제발 제가 망하는 건 거기까지만요. 아들은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아들만 살려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하다가 “하나님, 제 인생에 간섭하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하나님만 저 안 따라다니면 저 진짜 잘살 수 있다고요!!” 하며 악을 써댔다. 하나님이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까봐 귀를 막아버렸다.
세월이 흘러 아들은 새끼발가락이 조금 자라지 못하긴 했지만 다행히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 잘 회복되었다.

‘항복! 하나님, 항복합니다.’
그 후에도 남편은 안 되는 일만 골라서 선택해 하는 일마다 망했고, 빚진 데다가 남의 빚 보증까지 섰다.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남편. 빚을 갚기 전에 남편을 떠나면 자살할 거 같아서 빚을 갚고 나면 반드시 헤어지리라 결심하고, 남편에게 “빚만 갚으면 당신과는 이혼이야!” 하고 선포했다.
그 후 나는 어렵게 외국계 보험회사에 입사해 영업을 시작했다. 부산 지리도 모르는 데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처음엔 지하철역 안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거나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마음이 들어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개척을 하기 시작했다. 첫 달에 5명, 그 다음 달에 25명, 다음 달에 50명…. 하루 종일 걸어 다녀 발바닥에 물집이 터지고 굳은살이 박혔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수없이 쫓겨나 골목에 서서 혼자 울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배워야 잘 살겠다는 마음이 들어 새벽 5시면 일어나 영어를 공부했고, 낮에는 출근해서 일을 했으며, 저녁에는 대학 공부를 했다. 산더미와 같은 빚을 갚으라는 독촉이 끊임없는 가운데 ‘다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각오로 죽을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느 정도 형편이 풀리자 나는 나와 동생의 신용으로 여러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지인들에게 빌려서 남편 앞으로 된 징글징글한 사채 빚을 모두 청산했다. 그러자 얼마 후, 남편은 좋은 여자가 생겼다며 이혼하자고 했다. 남편과 싸우기도 싫고, 붙잡기도 싫었다. 한편으론 돈을 버니 자신감도 생겼다. 금방 좋은 남자가 나타날 것 같았고, 빚도 다 갚았기에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IMF 사태가 터졌다. 남편 빚을 갚느라 대출받은 돈에 이자가 붙기 시작했다.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아이까지 빼앗기다시피 하며 반강제로 이혼을 했다. 아이도 보내고, 남편도 떠나고, 빈방에 누워 사흘 밤낮을 지칠 만큼 울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더 이상 우는 것도 나에겐 사치였다. 갚아야 될 빚 때문에. 그 빚을 10년 동안이나 갚았다. 30대의 내 청춘을 빚 갚는 데 다 써버리고 말았다. 비로소 내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그래, 항복! 하나님, 항복합니다.’ 15년 만인가, 나는 교회로 돌아왔다.

교수가 되어 한 가지 소원을 이루었지만…
교회로 돌아왔으니 하나님께서 금방 복을 주실 줄 알았는데 새로 시작한 일이 잘되고 있을 때 교통 사고를 당해 1년 동안이나 호전되지 않아 병원들을 전전해야 했다. 다시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닫았다. 교회는 멍하니 껍데기로만 다녔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친분이 있던 교수님을 통하여 ‘문화 예술’ 분야와 ‘골프’를 가르치는 대학원 CEO 과정의 교수가 된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일하면서 대학원까지 다닌 덕분이기도 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장사하는 어머니의 리어카를 끌고 먼저 뽀얗게 나는 신작로를 달리던 산골 소녀가 그야말로 출세한 것이다.

 
부산의 내로라하는 기관장들과 부산 경제를 움직이는 경영자들이 나를 보고 “교수님, 교수님” 했다. 명예도 갖고 싶고 부자도 되고 싶었는데,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야간 고등학교, 야간 대학교, 야간 대학원을 전전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공부해서 교수님 소리도 듣고 말이다. 정말 열심히 가르치고 마음을 다 쏟았다. 하지만 나의 희망과 달리 대학에서 보낸 몇 년은 지옥을 연상케 할 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인품도 그만큼 존경할 만한 줄 알았는데, 돈만 번다고 인품은 멀리 팔아버린 사람이 많았다. 푼돈에 목숨 거는 사람도 많고, 여자라고 무시하고, 잘난 척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서 소문을 퍼뜨리고….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교수고 명예고 다 필요 없었다. 결국 다시 하나님 앞에 주저앉았다.
“하나님, 암만 해도 안 되네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이제 진짜 못 살겠어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이제는 다 버리고 하나님 안에만 머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다 내려놓고 교회에서 그릇 닦고 봉사하고 전도하며 살고 싶었다. 일요일에 몸만 나가다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교회는 따뜻했다. 언제나 나를 반기고 기다려주는 교회가 있어서 감사했다. 그 무렵 교회에서 집회가 있었는데, 집회 때 전해진 룻기 말씀에 나오는, 남편과 두 아들도 죽고 모든 것을 잃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가 바로 나였다. 말씀을 들으면서 계속 눈물이 났다. 나오미가 보리 추수할 때 베들레헴에 돌아왔다고 했는데, 집회 말씀을 듣는 그때가 나에게는 추수 때였다. 길고 지겹던 말씀들이 어찌나 달게 느껴지던지…!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기도하면서도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울었다. 교회의 인도를 받아 사는 형제 자매님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살까?’ 하고 의아했는데, 처음으로 그분들이 행복해 보이고 부러웠다. 세상은 폭풍우 속에 있는데, 교회 안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해 보였다.
그 무렵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 한 구절을 주셨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아,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케 만들어 주신다는구나….’ 이 말씀으로 그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받았던 억울함이 한 번에 다 풀리는 거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사무엘상 30장에 시글락이 불탔을 때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계속 생각이 났다.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삼상 30:8)
그 즈음 길을 가다가 우연히 친구가 운영하다 문을 닫아놓은 피부관리 숍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이거 하라 하시는구나’ 싶었다. 친구에게 확인하고 한 달을 준비해서 가게를 시작했다. 그런데 장사한 지 1주일이 안 되어서 건물 주인이 경찰을 대동해 가게에 들이닥쳤다. 친구와 건물주 사이에 계산이 안 된 부분 때문에 진행된 소송이 주인의 승리로 끝난 걸 모르고 내가 덥석 차고앉았던 거였다. 주인은 나를 무단주거침입죄로 고소를 했고 당장 나가라고 했다. 아무리 부탁하고 빌어도 막무가내로 무조건 나가라니, 기가 막혔다. 가게를 보러 다녔지만 하루 만에 이사할 가게가 나올 리 없었다.
밤새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형편은 기가 막힌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했다. 하나님께 길이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기도하다가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의 말씀을 주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신 26:1)
‘하나님께서 나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시는구나. 좋은 가게를 주시겠구나.’
다음날, 여기저기 가게를 보러 다니다가 얻지 못하고 직원들과 함께 늦은 점심을 먹는데, 한 직원이 지나가는 말로 자신이 근무했던 피부관리실이 오늘 철거 작업을 하는데 이미 했을 거라고 했다. 가게가 무척 커서 한 번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곳인데, 그날은 그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급히 전화하니 뜯기 직전이라며 빨리 오라고 했다. 이른 아침에 철거 작업을 하러 온 사람이 ‘인테리어가 너무 아까워서 못 뜯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가버려서 아직 뜯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라는 마음이 들어 그날 바로 달려가서 계약했다. 기적적으로 하루 만에 규모가 네 배쯤 되는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수억 원을 들여서 인테리어를 해야 할 넓고 큰 가게를 최소 금액으로 얻게 된 것이다.
남다른 나의 열정과 재능을 믿고 죽을힘을 다해 살았던 지난 날에는 모든 일이 실패했기에, 이번만큼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싶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 안에서 살고 싶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말씀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셨다. 나는 큰 가게에 소요되는 경비와 많은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형편 속에서 자주자주 직원들이 퇴근한 빈 가게에 남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마음이 어려울 때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묵상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전국 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고, 우리 숍에서도 매주 수요일 강운학 목사님을 모시고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네일(nail)을 담당하는 직원이 구원을 받고 펑펑 울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 같아서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 피부관리실은 직원 구하기가 무척 힘든데,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소중한 직원 두 사람이 있다. 그 가운데 실장님은 성품이 무척 좋아서 늘 나에게 큰 힘이 되는 분이다. 하지만 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잘 무너지지 않기에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하나님 앞에도 마음을 열고 있어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게다가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링컨스쿨을 추천했는데, 엄마보다 아들이 선뜻 링컨스쿨에 가겠다고 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던지…. 오랜만에 하늘을 붕붕 나는 기분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교회와 연결되어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다.
얼마 전부터 근무하기 시작한 한 직원은 피부관리실에서 받는 박봉으로 남편 없이 아들 둘을 키우며 살고 있다. 늘 술을 마셔야 잠이 들고, 아침 출근길이 힘들어 보이는 직원이었다. 그 직원이 하나님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던 차에 사고가 생겼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위에 출혈이 일어나 중환자실로 실려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직원에게도 일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머지않아 복음을 듣고 두 아들도 교회에 연결될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가오는 여름 수양회에는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다 가기로 약속해, 이번 수양회는 우리 직원들을 위한 수양회가 될 것 같아 소망스럽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온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늘 가슴 한편에 짠한 마음이 드는 아들은 울산 링컨스쿨에서 공부했는데, 나는 고3 엄마 노릇 한번 해보지 않았지만 교회의 은혜로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서도 공부를 곧잘 하고, 브라질에 단기선교도 다녀왔다. 아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는데, 아들이 구원받아 함께 살고 있어서 요즘은 참으로 든든하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어릴 때 가족이 다 함께 믿었던 남묘호렝게쿄(창가학회)를 아직도 믿고 있는 우리 엄마와 가족들.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도 일하실 것이라 믿는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구덩이에 빠지고, 노예로 팔려가고,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히고,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늘 원망하고 도망 다니며 생고생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온 것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 동안 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통만 했는데, 요즘은 마른 땅 위를 걷듯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끝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나를 따뜻하게 감싸준 교회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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