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선물, 건우
하나님이 주신 선물, 건우
  • 김선아
  • 승인 2013.09.1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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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결혼, 그리고 이혼
대학 시절 스튜어디스가 되고자 시험을 보았지만 면접에서 떨어진 후, 연예인이 된 친구를 따라 방송국에 들어가서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그 후 미용 기술을 배워서 미용사가 되었고, 남보다 빨리 미용실을 차렸다. 미용실은 잘되었다.
같이 미용 일을 하던 동생이 먼저 결혼해서 남편을 따라 전주로 내려오면서, 나도 동생과 함께 전주로 내려왔다. 부모님이 전라도 분이어서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동생과 함께 미용실을 했다. 내가 원장, 동생이 부원장을 하고 직원도 다섯 명이나 두고 크게 했다. 꿈과 목표가 있고 재능도 있었기에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남편을 만나 사랑해 결혼했다. 그런데 첫 아들 건우가 태어나면서 우리는 자주 다투었고, 다툼이 점점 심해져서 건우 돌잔치를 하고는 이혼하고 말았다. 말다툼을 주고받다 이혼에까지 치달은, 이혼 같지도 않은 이혼이었다. 건우는 시어머니께서 돌보겠다고 데리고 가셨다.
건우와 떨어져서 보내는 시간이 몹시 힘들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밥도 먹지 못했다.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남편이나 아이 문제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고 원해서 결혼한 남자였지만 갈라서고 말았고, 사랑하는 아이 또한 내가 돌볼 수 없고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내 마음에 찾아온 빛, 그리고 재결합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미용실을 하려고 워킹 비자를 신청하고 영어를 공부했다. 힘겹게 지내던 어느 날, 건우를 낳은 후 같은 조리원에서 지내며 알게 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거듭난 친구는 괴로움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기쁜소식전주교회로 인도했다. 2007년 9월, 당시 기쁜소식전주교회에 계시던 김선영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9월 23일에 창세기 1장 3절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사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비추어서 내 마음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내 모든 죄가 씻어져 내가 거룩하게 되었고, 새 삶이 시작되었다.
구원받은 후, 김 목사님은 나에게 남편과 다시 합하라고 하셨다. 나는 목사님이 이끄시는 대로 남편에게 ‘내가 이런 교회를 만나 구원을 받았다. 전에 내가 교만하고 욕심이 많아서 우리가 이혼하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며 다시 합치자고 했다. 남편이 내 말을 받아주어 교회에 찾아가서 복음을 들었고, 우리는 헤어진 지 5개월 만에 다시 합쳤다.

건우는 나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었다
다시 만난 건우는 전과 많이 달랐다. 나와 눈도 맞추지 않고, 불안해하고, 밤마다 울었다. 시어머니가 직장생활을 하셨기에 아침 일찍 일을 나가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다가 저녁에 데리고 오셨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이가 불안정했다. 남편은 구원받았다고 했지만 다시 합친 후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복음이 마음에 임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함께 지내는 것이 힘들었다. 다툼도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구원받아 기뻤던 것은 잠시, 다시 고통스런 삶이 펼쳐졌다.
얼마 후, 딸 서경이가 태어났다. 서경이는 이유 없이 아파서 병원에 자주 입원해야 했다. 기침을 하면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토했다. 6개월 동안 입원과 퇴원을 일곱 번이나 반복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남편은 노조 일에 빠져서 집안 일은 다 내가 돌아봐야 했다. 남편이 돈은 잘 벌어다 주었지만 마음을 나누지는 못해 한 겹, 두 겹, 세 겹 밀려오는 어려움을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것이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건우 문제만 없으면 나는 부러울 게 없는 사람 같았다.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가 못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에 교회에 나가지만 어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우 문제만 해결되면 신앙생활을 접으려고 했다.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은 맞지만, 그 외의 것들은 잘난 내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건우가 왜 산만하고 이유 없이 자지러지게 우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건우가 네 살 때부터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건우한테서 ADHD(주의력 결핍/과잉행동 장애)의 전조 증상이 보이는데, 아직은 어려서 확실히 알 수 없고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야 분명한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언어 치료, 미술심리 치료, 놀이 치료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건우는 나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었다. ‘내가 이혼해서 그런가? 내 성격 때문에 저렇게 되었는가? 내가 못나서 그런가? …’ 건우가 그렇게 된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더 고통스러웠다. 그 삶이 너무 힘들어서 더 많이 치료 센터를 다니고, 병원을 찾았다.

‘나는 원래 안 되는 사람이라고!’
2012년 8월, 교회의 은혜로 나는 우석대학교의 IYF 간사가 되었다. 나를 늘 옭아매는 건우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신앙생활을 잘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은혜를 입을 수 있겠다는 소망이 생겨서 감사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제법 하나님의 일을 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 같았다. 건우에게서도 벗어난 것 같아 즐거웠다. 그런데 열심히 할수록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김선아가 나타났다. 어긋난 길로 가는 나를 교회에서 간섭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간섭들을 마음으로 받지 못했다. 잘못된 내 마음을 지적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도 한계에 이르렀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런 내가 무슨 신앙생활을 한다고. 다 연기였어!’ 결국 2013년 1월 초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교회를 떠나서 살면 그냥 살 줄 알았는데, 힘들고 공허했다.

나는 나아만이었다
2013년 봄, 건우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전주 예수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건우는 보통 아이와 ADHD 아이의 경계선에 있다고 했다. 건우는 특수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들어갔는데,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자주 전화해서 “아이가 산만해서 힘들어요, 어머니.” 하고 말했다. 건우가 네 살 때부터 안 해본 치료가 없을 만큼 열심히 했는데, 선생님한테서 아이를 방치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말씀하셨다. “네가 나 없이 할 수 있어? 무얼 할 수 있지?” 내가 한 일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건우가 입학하고 힘겹게 한 달을 보낸 후, 나는 실패자가 되어 다시 교회를 찾았다. 마침 교회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워크숍을 갖고 있었다. 홍오윤 목사님은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하셨다. 나아만은 문둥병자였지만 군대장관이었기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웠다. 그런데 나중에 마음을 돌이켜서 자기 생각을 버리고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 깨끗하게 나았다. 문둥이였지만 군대장관이라는 마음으로 살았던 나아만! 그의 이야기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아, 내가 나아만이구나!’
홍 목사님과 신앙상담을 시작했다. 목사님은 죄와 복음부터 말씀을 전해주셨다. 나는 구원받았기에 복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목사님은 한 부분 한 부분 세밀하게 가르쳐 주셨다. 나는 ‘나를 믿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예수님의 보혈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바라봐야 하는구나!’
마음에서 분명하게 정리가 되고 선이 그어졌다. 나는 회개할 수 없는 자인데, 예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이끌어 주셨다. 내가 마음을 돌이키면서 하나님께서 건우 담임 선생님의 마음도 바꾸어 주셨다. 선생님이 애틋한 마음으로 건우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겠다
하루는 부인회 모임 때 목사님께서 ‘하나님은 애매한 것을 싫어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하신다’며 신앙생활이 애매하면 굉장히 힘들기에 정확해야 한다고 하셨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건우가 무엇이 문제인지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 후 전북대병원을 찾아가 4월부터 석 달 동안 심리 검사, 뇌파 검사 등 여러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건우가 종양으로 인해 뇌에 미세한 손상을 입은 것이 드러났다. 약물 치료가 꼭 필요한 상태였다. 뇌 손상으로 인해 과잉행동이 나오고 학습 능력이 뒤처지는 것이었다.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되어 아이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끝없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했다. 나와 달리 남편은 굉장히 힘들어했다. 아이가 단순히 산만한 줄로 알았다가 뇌가 손상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쏟았다.
건우는 약을 먹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독한 약이 정신과 약이고, 그 중에서도 뇌를 치료하는 약이 독하다고 한다. 약을 먹기 전에 교수님이 부작용이 있다고 이야기한 대로, 건우는 약을 먹으면서 토하고, 설사하고, 온몸을 박박 긁고, 사흘 간이나 코피를 쏟았다. 그리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금니로 자기 입안을 깨물어서 입안이 터지고 퉁퉁 부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형편은 거짓이야. 말씀만이 사실이야’ 하는 선(線)이 약하게나마 그어져 있었기에, 어려운 형편을 담담히 맞이하며 ‘이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이야!’ 하고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교수님은 건우의 부작용을 관찰하면서 건우에게 맞는 약을 찾아갔는데, 9번의 수정 끝에 마침내 건우에게 맞는 약을 찾을 수 있었다.

장애 등록증까지 받게 된다니…
건우의 담임 선생님은 약으로 인한 부작용 증세를 보이는 건우를 감당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교수님은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잠시 있는 부작용이니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건우가 다니는 학교는 완주군에 있는 작은 시골 학교로 양호실이 없어서 건우가 갑자기 아프면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 교수님은 건우를 위해서 ‘장애 판정’을 내려주겠다고 했다. 장애 등록증이 나오면 아이에게 좋은 학교로 어디든지 옮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 학교에 장애를 가진 아동들을 지도하는 교사가 있는 ‘통합 학교’나 장애 아동들만 다니는 ‘특수 학교’로도 옮길 수 있었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남편은 마음이 사망의 골짜기로 내려갔다. 뇌가 손상되어서 아들이 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데, 장애 등록증까지 받게 된다니…. 자신이 돈 벌어서 아들을 얼마든지 잘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몹시 괴로워했다. 남편은 나에게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러 교회에 가자고 하며,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남편은 목사님 앞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날 남편 마음에 복음이 임했다. 그날 이후 건우에게서 이상 행동이 사라졌고, 건우에게 맞는 약도 찾게 됐다.

“우리 아이를 위해 푸른학교를 선택했습니다.”
건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보통 아이들과 다름없이 지내며 공부도 곧잘 따라갔다. 하지만 선생님은 “장애증을 받을 거니 전학 가실 거죠?” 하고 전학을 종용하듯 말했다. 나는 전주시와 완주군에 있는 통합 학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중간에 내 생각을 따라가면 망한다는 마음과 ‘통합 학교에 가서 잘 적응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상처가 깊어질 수 있어. 그럴 바에야 아예 특수 학교에 보내자’는 마음이 들었다. 완주군에 있는 장애인 학교인 ‘푸른학교’를 찾아가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아픔과 상처만 주시지 않아. 하나님이 건우를 위해 예비하신 학교가 있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이 건우를 특수 학교에 보내시면 기뻐하자’ 하고 마음을 정하고, 선생님에게 2학기에는 특수 학교로 갈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2013년 7월 8일, 교수님이 장애 등록 서류를 만들어 주어서 동사무소에 가서 등록했다. 막상 아이를 장애인으로 등록하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어려웠다. 그날 둘째 서경이가 사고로 이마가 찢어져서 네 바늘을 꿰맸고, 나는 골반 인대가 늘어나서 왼쪽 다리가 퉁퉁 부었다. 내 마음에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말 어렵고 힘들었다.
특수 아동의 경우, 도 교육청 산하에 있는 특수교육기관청에서 아이의 상태를 심사한다. 장학사, 소아정신과 의사, 특수교육 담당 교사 등 9명이 아이를 특수 학교에 보내야 할지를 결정하고, 장학사가 해당 학교에 아이의 입학을 허락하라는 공문을 보내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이는 왜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왜 특수 학교에 가려고 하는지 등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까다롭게 물었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는 “우리 아이를 사랑하고 감싸줄 수 있는 학교에 보내려고 저는 푸른학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그 학교에 공문을 보내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모두 의아하게 여겼다.

“저 때문에 전학 가는 거라면 안 가시면 좋겠어요.”
건우 학교 문제로 마음이 무척 어려워서 “하나님, 저를 이 어려움에서 건져내 주세요!” 하고 울며 기도했는데, 하루는 시편을 읽던 중에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정말 감사했다. 그 동안 남편과 마음을 나눈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남편에게 “여보, 내가 이 말씀을 받았어.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줄 거야. 형편은 어렵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하여 우리가 오히려 찬송을 한대.” 하며 마음을 나누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 앞에서 같이 울었다. 그 말씀을 붙잡았다. 말씀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 주었다.
그 후 학교에 갔더니, 건우 담임 선생님이 교장실로 가자고 했다. 선생님은 “저 때문에 전학 가는 거라면 안 가시면 좋겠어요. 건우가 지금은 잘하고 있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요.” 하였다. 교장 선생님도 장학사에게서 전화가 왔다며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보통 장애아 엄마들은 심사를 받을 때 울며불며 ‘우리 아이가 통합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애원하는데, 나는 오히려 아이를 특수 학교에 보내 달라고 했으니 장학사가 이해가 안 간다며 교장 선생님에게 ‘건우 엄마 좀 말려 달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그리고 공문도 건우가 다니던 학교에 계속 다니게 하라고 그 학교에 보낸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건우가 졸업할 때까지 담임을 맡을 수 있는 모든 교사들과 함께 의논했는데, 선생님들이 다 건우를 돕기로 마음을 모았다’며 계속 그 학교에 다니라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건우를 그렇게 이끄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정말 감사했다.

 

전에는…, 이제는…
전에 남편은 돈만 벌어다 주는 남자 같았다. 그런데 건우 일로 구원을 받고 가족을 위하는 자상한 가장으로 바뀌었다. 남편을 그냥 함께 사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던 내 마음도 바뀌었다. 마음을 나누고 내가 존경하며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편의 위치가 달라졌다.
전에 나는 건우만 건강해지면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믿으며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건우가 나에게 가져다준 창살 없는 감옥, 그리고 그 안에서 겪은 고통에는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는 섭리가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면 건우는 하나님이 우리 가족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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