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恩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恩惠)
  • 김창영 (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3.10.15 22: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경 강좌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한 학생이 홧김에 자기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집이 다 탈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집이 크게 타지는 않고 불이 꺼졌습니다. 불을 낸 학생은 ‘내가 집을 다 태웠으니 이제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실 거야.’, ‘화를 내고 나를 내쫓으실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로 통화하면서 만난 아버지의 태도는 아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너, 어디니? 빨리 와라. 너, 경찰서에 빨리 자수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대.”
“저, 차라리 감옥에 가면 좋겠습니다!”
“아니야, 너 빨리 와서 자수해야 돼!”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아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잘못한 자기를 혼내고 내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아들이 잘못했을 때 혼을 내기도 하지만 잘잘못과 상관없이 아들을 감싸 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약하고 부족해도 잘 자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부모님이 은혜로 보호하며 양육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을 향한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날 뱀이 하와를 찾아와서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말을 겁니다. 하와는 뱀에게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대답합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하와가 한 대답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달랐습니다.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정확히 자리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뱀은 ‘너희가 그 실과를 먹으면 결코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하와의 머리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이 넣어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생각, 두 가지 사실이 자리 잡았습니다.
‘죽는다’와 ‘죽지 않는다’, 머리에는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을 담아둘 수 있지만 마음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제 하와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뱀이 넣어준 말이 싸웁니다.
하와는 그 전까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자세히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하와의 눈에 그 실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사단이 넣어준 말을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고, 곧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추하고 더러운 자기 마음을 양심으로, 도덕으로, 체면으로 가리며 삽니다. 그렇게 가리고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마주 앉아 있을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에 악하고 거짓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서로 그런 것들을 보면서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자기를 적당히 가리고 함께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절대 가릴 수 없습니다.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사 59:6)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수고하지만 온전히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입은 것입니까, 벗은 것입니까?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며 자기가 벗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옷으로는 자기를 온전히 가릴 수 없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벗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자신을 가릴 수 없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2장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은 은혜의 세계이기 때문에 벌거벗은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담과 하와를 안타깝게 여기시고 다시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떠난 인간과 만나고 싶어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
바로 속죄소(贖罪所, Mercy Seat),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려면 ‘거기’로 가야 합니다. 내가 애쓰고 수고하는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내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곳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는 은혜를 떠나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인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다시 은혜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서는 한 짐승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짐승이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한 짐승이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것을 가리기 위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보게 된 첫 죽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입은 가죽옷은 바로 그 희생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 대신에 한 짐승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 옷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만든 온전하지 못한 옷이고 희생이 없는 옷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가죽옷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신 은혜의 옷이고, 그 옷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는 세계가 있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짐승을 희생시켜 아담과 하와를 다시 은혜의 세계 안으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네 수고로 안 돼. 네 노력으로 안 돼. 내가 너를 위해야 돼.’ 하시며 온전한 가죽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죽임을 당한 짐승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한 짐승이 아담과 하와에게 온전한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 희생된 것처럼, 예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죽음의 결과로 만들어진 의(義)의 옷을 우리가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부끄러움을 온전히 가리지 못했고,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자신의 수치나 죄를 결코 가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입혀 주신 ‘가죽옷’ 만이 온전히 내 죄와 허물을 가립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서 고통하며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아무 한 것 없이 완전한 의(義)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기’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
‘거기’는 바로 은혜의 자리(Mercy Seat), 내가 나를 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는 곳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수고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덮고 ‘난 네가 잘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아. 내가 너를 위할게. 내가 너를 사랑할게. 내가 너를 온전하게 할게.’ 하신 곳입니다. 그곳 시은좌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자 하십니다.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다면 시은좌는 모든 사람에게 참된 자유와 안식을 주는 곳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