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33) - 왈도파의 신앙생활과 카톨릭의 박해
교회사(33) - 왈도파의 신앙생활과 카톨릭의 박해
  • 이한규(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3.12.1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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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왈도파의 자녀 교육
왈도파 사람들은 영적인 부분뿐 아니라 교육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학교를 세웠다. 왈도파 사역자들 가운데 다수가 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재위 1198~1216)는 ‘왈도파 가운데 교육을 받은 평신도가 설교자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 왈도파 젊은이들은 존경할 만한 믿음과 학식이 있는 목자 아래서 배웠다. 그들은 일반 학문뿐 아니라 성경을 중요한 과목으로 배웠다.
왈도파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가 어릴 때부터 성경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성하게 여기도록 교육시켰다. 그들은 인자하면서도 지혜로웠기에 자녀들을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사랑함으로써 방종하거나 나쁜 버릇을 가지게 하지 않았다.
왈도파 사람들의 앞에는 시련과 고난이, 심지어는 순교의 길이 놓여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환난을 견디고 다스림에 복종하며 심사숙고하여 행동하도록 가르쳤다.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책임감과 말을 조심하는 법을 배웠다. 한 마디라도 경솔하게 해서 그 말이 로마군의 귀에 들어가면 개인의 생명뿐 아니라 많은 동료들의 생명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검소한 삶과 어려움을 이기는 삶을 엄격하게 배웠으며, 진리를 위하여 사는 삶이 소중함을 깊이 배웠다.

 

열정적인 전도자들
왈도가 리옹을 떠나면서 제자들도 그를 따랐고, 남은 사람들은 핍박을 피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렇게 흩어진 왈도의 제자들에 의해 북유럽 전역에 복음이 퍼져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 전도에 큰 무기였으며 영적인 보화를 캐낼 수 있는 부유한 재원(財源)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이 그들의 유일한 안내자였다.
왈도파 사람들은 순례자, 장인(匠人), 노동자 등으로 위장하고 다녔다. 그들의 옷은 가장 귀중한 보물인 성경 사본(寫本)을 감출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수고하여 필기한 성경 사본을 가지고 다니면서,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성경 말씀을 보여 주었다. 이따금 그들의 전도를 받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학교 안에서 일어나 복음의 역사가 온 학교를 뒤덮기도 했다.
왈도파는 유럽에서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수백 년 전에 벌써 그들이 사는 곳의 언어로 필사(筆寫)한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왈도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밤새워 베껴서 손수 만든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러 먼 길을 떠나곤 했다. 그들은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먼 곳에 있는 시장에 가지 않으면 쉽게 얻을 수 없는 비단과 보석, 그 밖의 물품들을 가지고 다녔다. 선교사로 가면 추방당할 곳이라도 행상으로 갔으므로 환영을 받았다. 장사를 하다가 기회를 얻으면 손님들에게 필사한 성경을 보여 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면 복음을 전했으며, 성경의 사본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일부분을 즐거운 마음으로 주었다. 이런 활동으로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교회가 생겨났다.
왈도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 구원에 대한 깊은 관심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며, 십자가의 보혈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죄를 사함받을 수 없음을 믿었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대부분 복음을 몰랐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자신으로 인해 언제나 고통해야 했다. 양심과 가책과 정죄에 시달리며 하나님의 형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마음이 늘 무거웠다. 영혼이 굶주려 죽어가는 그 사람들에게 왈도파는 생명의 떡을 나누어주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기쁨과 평안을 그들 마음에 불어넣었다. 사람들은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만났고,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이 그릇된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소리쳤다.
“이제는 먼 순례의 길이 쓸데없다. 이상 더 고행해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죄 많고 불결한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겠다. 아! 그분께서는 나의 죄, 나의 죄까지도 사하여 주셨다!”
기쁨의 물결이 그들의 마음을 채웠고, 그들은 찬미와 감사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다. 그들은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찾은 새로운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했고, 받은 빛을 전해주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복음의 일꾼들은 종종 한번 보이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갔거나, 혹은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진리를 증거한 곳에서 생명을 잃기도 했다. 그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창에 찔리고 나무에 묶여서 불에 타죽는 자리에도 두려움없이 섰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은 불태워졌고, 1212년에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80여 명의 설교자가 화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증거한 왈도파로 말미암아 중세의 암흑시대에도 진리의 등불은 빛났다.

초대교회의 정신을 지킨 신앙생활
첩첩이 싸인 알프스 산악은 여러 세기 동안 박해를 받는 왈도파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궁벽한 산중에 외로이 있으면서도 결코 외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난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을 기뻐했다. 때때로 핍박자들이 추격해 왔지만 험준한 산들이 견고한 산성이 되어 주었다. 그곳에서 진리의 횃불이 중세의 암흑을 뚫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왈도파 사람들의 삶의 지향점은 초대교회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경건하고 청빈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교회 의식으로는 성찬과 침례만 행했고, 유아 세례의 무효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성경을 교리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자국어로 번역한 후 그 성경을 읽고 암송하며 말씀을 좇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왈도파 교회는 신학적인 논쟁이나 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
왈도파 사람들은 시장이나 넓은 들판에서 가진 모임에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기에 아무도 그런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겸손하고 검소하며 부지런하고 정직하며 정절을 지키고 절제하는 이들'이라고 칭송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나 삶에서나 그리스도에 대한 고결한 증인들이었다. 왈도파 사람들의 삶은 카톨릭이나 그리스정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 것의 열매였다.

종교재판관들의 등장
로마카톨릭이 최초로 종교재판관을 임명한 것은 왈도파 때문이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자신이 손수 모든 사람의 신앙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어떤 수도사들을 종교재판관으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단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 유죄 선고를 내리도록 했다. 그들은 모든 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 세력은 제한을 받지 않았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들에 의해 정죄되어 투옥된 사람들은 무고히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해야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로마카톨릭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성경을 따르는 독자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과 연관만 있다고 밝혀져도 그는 재산과 생명을 빼앗겨야 했다.

참혹한 박해
왈도파 사람들은 처음에는 로마카톨릭과 교류하는 데에서 이탈할 생각이 없고, 다만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제3차 ‘라테란 공회’(1179년)에 갑자기 나타나서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번역한 성경을 교황에게 주기도 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에서 축출당했다. 그들은 곧 두 명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러 다녔고, 이에 위협을 느낀 리옹의 대주교는 그들에게 파문 선고를 내렸다. 그 소식을 들은 교황은 ‘누구도 나에게 특권을 받지 않고는 설교할 수 없다.’며 설교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왈도는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왈도파에게는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들은 알프스산맥 동부에 위치한 험한 산골짜기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거기서 수백 년 동안 살았다. 그들은 교황의 권세가 굳게 서 있는 땅에 살면서, 성경의 약속을 딛고 서서 순결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거짓 종교에 당당히 저항했다. 그들의 믿음과 삶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궁벽한 곳에서 양떼를 치고 포도원을 가꾸며 고된 삶을 살면서도 그들이 지켰던 귀한 믿음은 그들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왈도가 죽은 지 160년 후 왈도파가 거주하던 골짜기의 평화는 이단을 근절하기 위해 한 수도사가 종교재판관으로 파송되면서 깨지고 말았다. 13년 동안 230여 명이 화형을 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종교재판관들과 나라의 권세자들이 나눠가졌다. 1400년 겨울에 박해가 가속되자 왈도파의 많은 사람들은 더 높은 산지로 피신하였고, 산 속에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왈도파를 ‘삼손의 여우’라고 불렀고, 여러 곳에서 붙잡아온 왈도파 사람들을 함께 묶어 태워 죽였다.
1486년에는 교황 이노센트 8세의 지시로 크레모나의 부(副)감독이 이단 근절의 책임을 부여받아 1,800명을 이끌고 왈도파 사람들이 살던 골짜기로 침입했다. 왈도파는 산지를 이용하여 그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했고, 싸움은 100년 동안 계속되었다. 1655년에는 악명 높은 대학살이 일어나 수많은 왈도파 사람들이 기둥에 묶인 채 화형을 당해 죽어갔다.
박해는 매우 심하여 왈도파를 쫓던 사람들은 왈도파가 살던 지역을 불질러 황폐화시키고,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는 등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왈도파가 묻힌 묘를 파내 뼈를 태우기도 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드몽(Piedmont) 지역에서의 박해가 특히 심했다. 박해를 피해 동굴에 살고 있던 왈도파 남자들이 행상과 전도로 피에드몽 골짜기를 비웠을 때, 카톨릭 군사들이 공격해 들어가 불을 질러서 부녀자 3,000여 명을 모두 죽였다. 왈도파의 본거지인 피에드몽 골짜기에는 피가 흘러 넘쳤다고 한다. 이처럼 잔혹한 일을 벌인 카톨릭 박해자들이 왈도파에게 품었던 불타는 증오심은, 왈도파 사람들이 날카로운 진리의 칼로 부패한 그들 종교의 환부를 건드리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었다.

종교재판소의 고문
당시 종교재판소에서 행해진 고문들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사람의 뼈와 사지를 늘어뜨리는 도르래와 밧줄, 펜치 등등 무시무시한 살인도구들이 있었다. 종교재판 집행자들은 잡혀온 사람을 몇 주일이고 고문하다가 결국에는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어떤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스페인 세빌레 시(市)의 종교재판소 소장으로 18년간 일한 ‘토르크마다’라는 성직자는 10,220명이나 되는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고, 97,322명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투옥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종교재판소가 1808년에 파괴될 때까지 그곳에서 산 채로 불에 타죽은 사람이 31,912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박해자들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고문을 가하여 그 이단을 포기하게 하여야 그들이 지옥이나 연옥에 가서 받을 형벌이 감해진다’고 믿어, 자신들이 하는 고문이 이단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왈도파는 끔찍한 박해를 받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박해자들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기도 했다. 어떤 모양이든 왈도파 사람들이 극심한 박해 속에서 복음을 지켜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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