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 양은정
  • 승인 2014.07.03 1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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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간증

 
           2013년 7월,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다.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재앙이라는 내 생각을 밀어내고 말씀 편에 서기로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

 

 

 

지위와 명성을 가지면 행복할 줄 알고 옆도 뒤도 보지 않고…
나는 경상북도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서울의 명문대로 유학을 갔다. 당시 주위의 많은 친구들은 중학교를, 심지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체 학교로 갈 만큼 내가 살던 마을은 가난한 곳이었다. 우리 집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당신들이 못 배운 열등감에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 공부시키길 원하셨고, 나는 시골 읍에서 꽤나 공부를 잘했다. 선생님의 사랑과 사람들의 관심,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친구도 내겐 필요한 존재이기보다 그냥 내 주위에 늘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나름 열등감도 있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직장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했다. 나는 인간관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얻고 싶은 욕심밖에 없었다. 그걸 가지면 행복할 줄 알고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장모님이 채소 팔러 새벽시장에 가다가 차에 치여 그만…”
그렇게 살던 중 내 인생에서 첫 번째 죽음을 보게 되었다. 그때 우리 회사는 아침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했는데, 하루는 출근해서 막 자리에 앉자 형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늦가을이라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아, 이른 아침에 웬 전화냐고 투덜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는데, 형부는 “놀라지 말고, 처제. 장모님이 채소 팔러 새벽시장에 가다가 차에 치여 그만…” 하고 말했다. 어떻게 일주일이 지나갔는지 모르게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났다. 자식 공부시키느라 평생 고생하다가 이제 다섯 번째 딸까지 취직해서 좀 편히 살 수 있는 시기가 되었는데, 엄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너무 허무했다. 도대체 인생이 뭘까? 평생 고생하고 살다가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면 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 걸까? 1년을 술도 마셔 보고 방황도 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두 번째 죽음 앞에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직장을 그만둔 후 출산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살던 시어머님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만삭의 몸으로 아침에 병원에 가서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한 달 동안 해야 했다. 출산 예정일이 다 되어서는 아픈 시어머님을 수발하는 일로 형님네랑 심하게 다투었다. 그리고 출산 예정일이 되어 병원에 갔을 때, 임신 9개월째까지 아무 문제가 없다던 의사가 이상하다는 말만 계속하며 이것저것 검사를 했다. 그러더니 아이가 뱃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이미 10개월이 다 되어 수술할 수는 없고 유도분만으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했다.
분만실의 많은 산모들은 살아 있는 아이를 낳기 위해 고통하는데, 나는 죽어 있는 아이를 낳기 위해 밤새 고통해야 했다. 아이를 낳고 내 눈에 들어온 건 죽은 아이의 서늘한 등줄기.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두 번째 죽음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게 닥친 엄청난 일 앞에서 나 대신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고, 퇴원하고는 시어머니와 시댁을 향한 증오가 마음에 가득 찼다. 나중에는 미워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지만 그 미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때 구원받은 큰언니가 수양회에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지만, 예수님은 너무 멀고 내가 너무 불쌍해서 울다가 돌아왔다.

죽음 앞에 서보니 내 손을 잡아 줄 이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또 욕망을 잡고자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둘째 딸을 낳으면서 혈소판 수혈을 받게 되고, 의사들이 수혈받는 동안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무리하게 배를 누르면서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도 연년생 아들딸을 데리고 공부하면서 열심히 1년을 지냈다. 허리 안 아픈 것이 어떤 상태인지 잊어버릴 만큼 허리가 아팠지만, 내 나이 32살이었고 전에 허리가 아픈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곧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둘째 딸 돌 즈음, 속이 메스꺼워 1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만 있는 신세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 죽음 앞에 서보니 내 손을 잡아 줄 이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서 쫓아왔던 명예도 부질없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자식도 내 몸 하나 가눌 수 없게 되자 너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남편은 나름대로 힘들었겠지만 죽음 앞에 나 혼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지금 돌아보니, 하나님이 나에게 그 마음을 주셨던 것이다. 이후 수원에서 있었던 성경세미나에 참석하여 2002년 10월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그럼 하나님이 내 허리도 고치시겠네’
그 후 병명을 찾았는데,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긴 이름의 병이었다. 의사선생님이 “이 병은 평생 아픈 병이에요. 아프면 약 먹고…” 하고 말했다. 참담했다. ‘평생 이렇게 허리가 아프면 어떻게 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석 달치 약 봉투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서울에서 대전도집회가 있었다. 나는 교회를 다녀본 적도,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어서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교회 자매들의 손에 이끌려 참석했다. 그날 오전 설교 말씀을 듣는데, 박옥수 목사님이 창세기 말씀을 전하시면서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Nothing is impossible)”라는 말씀을 열 번 이상 하셨던 것 같다. 말씀을 듣는 중에 나도 모르게 ‘그럼 하나님이 내 허리도 고치시겠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 이후 약을 먹지 않았다. 하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허리 아픈 고통이 극심하기에 ‘아프면 먹어야지’ 하고 찬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갔다. 문득 ‘너, 정말 하나님 믿어? 너는 약이랑 하나님이랑 양다리 걸치고 있잖아’라는 마음이 들어 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로 나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다. 너무 신기했다. 나는 뭐든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줄 알았는데, 그냥 말씀이 마음에 쑥 들어와서 공짜로 얻는 그 세계가 내겐 너무 생소하고 어리둥절했다.

 
남편은 내가 구원받고 기쁜소식수원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자 이웃에게 나를 광신도라고 소개했다. 그때 나는 수영장 간다고 부인예배 빠지고 저녁 예배에도 안 가는 사람이었는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구원받아 그 친구 때문에 저녁 예배에 참석하면서는, 교회에 갔다오는 나를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남편을 병으로, 사고로 어렵게 해서 구원받게 하실까봐 두려워, 구원받으라고 남편을 까맣게 탈 만큼 들볶았다. 싸움도 많이 했다.
내 삶이 교회 편으로 많이 옮겨졌지만 나는 나를 위해 살고 싶었지 복음을 위해 살고 싶진 않았다. 내 마음은 하나님과 멀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습성이 있어서, 교회 일도 이 일 저 일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런 내 신앙을 목사님 부부나 자매들이 간섭하면 겉으로는 “예” 하지만 속에서는 화와 억울함이 치밀었다. 하나님은 내 의로 똘똘 뭉쳐진 나를 깨뜨리기 위해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교회 안에서 하셨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누군가 당신을 지켰다”
2013년 9월 7일 토요일, 대전에 가서 벌초하고 동료 결혼식 간다고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고가 나서 수원으로 이송될 거라고 했다. 남편은 원래 느긋하고 낙천적인 데에다 그날 목소리도 차분해서 조금 다친 줄 알았다. 나중에 병원에 가서 보니, 응급실에서 왼쪽 다리를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나를 향해 씩 웃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사고의 충격으로 온몸이 경직되어 소변도 볼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드디어 하나님이 일하셨구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중에 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은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자 출발했고 사고를 낸 차량은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 빨리 지나가려고 속도를 내서 오다가 남편을 측면으로 친 것이었다. 아주 조금만 상대 차가 늦었거나 남편이 빨랐다면, 차가 남편 오토바이를 통째로 들이박아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사고 순간,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도로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헬멧은 벗겨져서 없고, 대신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양복을 돌돌 말아 넣어준 배낭이 자기 머리 밑에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 온 경찰이나 보험사 직원 모두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누군가 당신을 지켰다”라고 했다고 한다.

너는 재앙으로 받아들일래, 평안으로 받아들일래?
왼쪽 발목을 수술하려고 의사가 남편 다리를 들어 보니 무릎이 덜렁거렸다. MRI를 찍어 보니 무릎에서 나갈 수 있는 인대(전방, 후방, 좌측 2개)는 다 나가고 옆에 있는 뼈까지 부러져 있었다. 의사가 이러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고 하며 다른 데로 가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목사님께 전화를 했다. 정말 막막하고 길이 없을 때 물어볼 곳이 있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목사님이 기쁜소식강남교회 성도를 통해 서울에 있는 한 병원을 소개해 주셨다. 다음날 병원을 옮기고 남편이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지금은 광주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박희진 목사님이 수원에 계시면서 가장 많이 전한 말씀이었다. 여러 번 들었지만 그냥 듣고 지나갔는데, 그 말씀이 떠올랐다. 울면서 하나님께 따졌다. “하나님, 이래도 재앙이 아니에요? 내가 봐도 재앙이고, 남편이 봐도 재앙이고, 세상 모든 사람이 봐도 재앙인데, 그래도 이것이 평안이고 소망입니까?”
마음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래, 너는 둘 중에 어느 것을 믿을래? 재앙으로 받아들이면 고통과 원망과 슬픔만 가득하고, 평안이라는 말씀을 받아들이면 나에게 소망이 있는데….’ 나는 말씀 편에 서기로 했다. 내가 말씀을 믿기로 마음을 정하자 하나님은 어려움을 견디고 넘어설 힘을 주셨다.

“자매님은 왜 마음을 안 옮기세요?”
무릎 수술을 잘 받고 입원해 있는 동안, 남편은 싫으나 좋으나 내가 읽어 주는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도 듣고, 복음반 설교 말씀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착한 사람으로 살아온 남편의 마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퇴원해 집에서 쉬면서도 설교 말씀을 들었지만 남편 마음은 한결같았다. 온 교회가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목사님이 온 마음으로 남편을 섬겨 주었기에, 남편은 교회에 가긴 가야겠기에 ‘한번 들어보자’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변화는 없었다.
10월에 서울에서 성경세미나가 있었다. 남편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면서, 의자에 앉아 있으면 다리가 퉁퉁 부어 너무 아픈데도 오전마다 집회에 참석해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이한규 목사님과 한 시간 이상 상담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면 4시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집회가 다 끝나 가는데도 남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내 마음은 몹시 초조했다. 결국 집회가 끝날 때까지 남편은 구원받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쌓아두었던 온갖 원망들이 위로 올라왔다. ‘왜 다리는 부러뜨려 가지고? 구원도 못 받게 할 거면서! 하나 더 부러뜨리시지! 목사님은 기도를 하시는 거야, 안 하시는 거야?’ 악다구니를 주체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남편은 입을 굳게 다물고 운전만 하는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날 나는 하루종일 하나님과 교회와 목사님을 원망했다.
주일인 다음날, 일찍 교회에 갔다가 사택에 들렀다. 나이 많으신 자매님들과 사모님이 차를 마시고 계셨다. 한 모친님이 “형제님, 구원받으셨어?” 하고 물으셨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질문인지, 구원을 받아야 형제라 부르는데…. 나는 긁적거리며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때 사모님이 “자매님은 왜 마음을 안 옮기세요? 목사님이 마음을 옮기라고 하셨잖아요!”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마음에 불이 들어왔다.

”마음을 합한 자는 하나님과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작년 가을 성경세미나의 주제는 마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강사인 박옥수 목사님이 강단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폴짝 뛰시면서 “여러분, 이렇게 마음을 옮기세요”라고까지 말씀하셨는데, 나는 내 마음은 옮기지 않고 자꾸 남편에게만 마음을 옮기지 않는다고 온갖 욕을 해대고 있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나님은 이 말씀 편으로 내 마음을 먼저 옮기길 원하시는구나!’ 그때 나는 마음을 옮겼고, 내 마음에서 남편이 구원을 받았다. 예배를 마치고 남편에게 내 마음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굉장히 행복했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박옥수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다. 정말 감사하게도, 남편이 목사님과 상담할 수 있는 시간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다. 목사님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한 목동이었던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과 마음을 합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 죄를 깨끗하게 씻어놓았어, 네 죄가 없어’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니야, 나는 그래도 죄가 있어’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을 합한 자가 아닙니다. 마음을 합한 자는 하나님과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은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원을 받았다. “얼떨떨하지만, 죄가 씻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남편을 위해 그분을 보내셨음을…
남편이 사고를 당했을 때 발목이 차에 직접 부딪혀, 발목뼈는 망치로 호두를 깬 것같이 부서지고 그 부근의 살은 다 죽었다. 혹시 살이 살아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4개월을 기다렸지만 가능성이 없자, 의사선생님이 ‘한 달 뒤에도 상태가 똑같으면 수술을 하자’고 했다.
한 달 뒤 병원을 찾았을 때,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피부 피판술에 있어서 최고인 의사를 이틀 전에 그 병원에 보내 주셨다. 종아리에서 머리카락 같은 혈관과 함께 살을 떼어서 피부가 썩은 발목으로 옮겨 붙이고, 종아리의 피부는 다시 옆구리의 피부를 떼어 붙이는 수술을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4개월이 지나 수술 부위가 다 아물었을 때 신기하게도 그 선생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하나님이 남편을 위해 그분을 보내신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사고가 난 지 이제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남편은 양쪽 목발을 짚고 다니다가, 한쪽 목발을 짚고 다니고, 다시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지금은 지팡이 없이 걷는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사람으로
지난 날들을 돌아보니, 나는 내가 잘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했기에 교회 안에서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나를 다듬고 이끌어 오셨다는 마음이 든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 62:1)
이사야 말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잠잠치 아니하시고 쉬지 아니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금은 땅 속에서 나오고 싶은 의지가 없지만 광부에 의해 채굴되고 수많은 과정을 거쳐 순금으로 만들어지듯, 하나님은 나를 교회에 두시어 정금으로 만들어 가신다.
나는 늘 보이는 것을 믿는 사람이었지, 믿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믿는 것을 보는 세계로 이끄시려고 많은 일을 하셨고, 또 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계시기에, 오늘 또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제는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 가실지, 또 남편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어 가실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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