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과 복음의 역사가 함께 숨쉬었던 가이사랴
화려함과 복음의 역사가 함께 숨쉬었던 가이사랴
  • 관리자
  • 승인 2014.10.2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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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3회)

 

 

초승달처럼 휘어진 아름다운 항구
가이사랴는 옛 시돈의 왕이었던 ‘스트라토’라는 사람이 만든 작은 마을로,
‘스트라토의 탑’ 혹은 ‘스트라토의 망대’라고 불렸다. 그 후, 헤롯 1세가 이곳에 인위적으로 큰 항구를 만들고 그 이름을 로마 황제의 칭호(가이사)를 따서 ‘가이사랴’라 칭했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의도적으로 항구의 규모를 아테네의 피레쿰 항구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깊이가 약 37미터에 달하는 앞바다를 돌로 매워, 바다에 너비 60미터가 넘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아름다운 항구를 만들었다. 이 항구 위에 성벽, 탑, 망대들을 세워 국제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이사랴는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디옥과 함께 지중해의 3대 항구로 이름을 얻었다.

헤롯이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탄생시킨 도시
가이사랴를 만들고 도시화 한 헤롯 1세가 아기 예수를 찾아서 죽이려고 했던 헤롯 왕이다. 그는 원래 이두메인으로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에 귀화하여 유대인이 되었으나, 정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늘 유대의 귀족들과 종교인들, 특별히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에게 강한 비난을 받았다.
헤롯 1세는 BC 37년부터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왕이 되고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한 일들은 가상하다 할 만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외적으로 로마 황제와 황족들, 그리고 로마 원로인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정통성을 문제삼으며 왕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유대 종교인들과 제사장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헤롯은 한때 로마에 망명하여 사는 동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유대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황제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한때 자신을 지지하며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유대 땅의 옛 추종자들을 반역자들로 몰아 몰살시켰다. 그리고 황제의 이름을 딴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고, 동시에 자신의 왕권이 견고함을 과시하게 된다. 그리고 가이사랴를 로마처럼 꾸며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신전을 드나들고 로마의 문화와 향락을 즐길 수 있게 해줌으로써 이스라엘에 있던 로마 귀족들의 지지도 얻었다.
헤롯은 가이사랴를 건설함으로써 당시 욥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이스라엘의 해상 무역을 가이사랴 지방으로 넓혔다. 무역으로 사마리아 지방의 질 좋은 열매들을 수출하고, 로마에 국제무역의 길을 열어 주어 당시 어렵던 로마 경제에 활로를 제공해 로마 황제의 골치 아픈 숙제를 덜어 주었다. 또한, 당시 지중해 최고 상권 중 하나였던 이집트로 가는 길에 이스라엘에는 폭풍이나 기상이변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는데, 가이사랴가 페니키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가는 모든 해상 무역상들에게 여관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 가이사랴는 국제항구로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헤롯은 또 하나의 숙제인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옛 성전 터 위에 화려한 성전 재건을 명한다. 성전이 지어지는 동안에도 성전 터 옆에 임시 처소를 만들어 속죄제사를 드리고 유월절 등의 절기를 지킬 수 있게 해준다. 그 일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 그리고 모든 유대교인들이 들먹이던 정통성 논란을 한 번에 잠재운다.
이런 일들을 행하여 어렵게 왕의 자리를 세우고 지켜왔는데, 어느 날 동방에서 별자리를 연구하던 박사들이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하고 물은 것이다. 새로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격분한 헤롯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는 대학살을 지시한다.

 


헤롯 왕의 계보
가이사랴를 이해하려면 헤롯 왕가를 지나칠 수 없기에, 잠시 헤롯 왕의 계보를 살펴보자. 헤롯 1세에게는 세 아들 헤롯 아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이 있었다. 헤롯 1세 이후 그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했는데,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요단과 사해 동편을 다스렸다. 그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주님을 직접 만났던 헤롯 왕도 그이다. 그는 갈릴리 땅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디베랴)’라 이름을 붙였다. 역사가들 가운데에는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며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헤롯 아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는데, 그의 실정失政으로 로마에서 총독을 파견하여 총독 통치가 시작되었다. 총독들은 가이사랴를 행정 수도로 삼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특별히 가이사랴를 좋아했으며, 가이사랴에 그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헤롯 빌립은 헐몬산 자락에 도시를 만들고 ‘가이사랴 빌립보’라 이름지었다.

 

 

사도 바울이 갇혔던 감옥이 있고, 고넬료가 구원받았던 땅
나는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궁 터를 돌아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헤롯 1세는 궁 안에 지금의 수영장과 같은 인공 연못을 만들어 놓고 육체의 쾌락을 누렸다고 한다. 궁 안에는 감옥도 있었다. 반역자나 도망친 노예들, 특히 중죄인들을 감금했다고 한다. 훗날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와서 이 감옥에 갇힌다.
바울이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 때,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말한다. 바울과 동행하던 사람들과 가이사랴 성도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하나,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대답한다. 그 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히며, 유대인들이 매복하여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천부장이 이를 알고 호위부대를 만들어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고,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헤롯 궁에 가두었다.
바울은 헤롯 궁에서 벨릭스 총독의 후임인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구원받은 것과 자신이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사도가 된 것을 자세히 증거한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라고 외친 곳이 바로 이 헤롯 궁 안이었다.
가이사랴는 바울의 이야기 외에도 고넬료가 욥바에 있던 베드로를 청해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곳으로,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10장 43~44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할 때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왔다. 이 대목은 읽고 다시 읽어도 통쾌하고 감격스럽다. 이 역사가 바로 가이사랴에서 있었다.

 

가이사랴의 유적들
가이사랴 유적지는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로마의 신전•원형극장•전차 경기장 등을 비롯하여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해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이 티투스 장군에게 짓밟혔을 때 가이사랴는 보존되었는데, 가이사랴가 작은 로마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유적들 가운데 야외 원형극장은 2,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콘서트 무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3,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음향장비 없이도 무대에서 내는 소리가 관람석 제일 위 끝자리까지 선명하게 전달되도록 설계되어 있어 더욱 놀랍다. 원형극장을 둘러보는 동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저마다 무대에 올라가서 자기 나라의 국가를 부르거나 애창곡을 한 곡씩 부르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한 아저씨는 노래 솜씨가 아주 형편없었음에도 그 소리가 제일 윗자리까지 쩌렁쩌렁 울려퍼져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전에 마하나임사이버신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을 때 몇몇 자매님들이 이 무대에서 찬송을 무척 은혜롭게 불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차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에는 영화 ‘벤허’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전차 경기장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단지 관중석의 규모가 조금 작아 보일 뿐. 전차 경기장 입구에는 공중화장실 유적이 남아 있었다. 2,000년 전에 좌변기에 앉아서 용변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좌변기 옆으로 홈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여 그 물로 뒤처리를 하게 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수동식 비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같이 갔던 유대인 친구 가이드가 “여기가 전차 경기장 공중 화장실이었다”는 말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자 당시의 변기 위에 털썩 걸터앉아서 어떻게 볼일을 보고 처리했는지 직접 포즈를 취하며 시범을 보여 주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발달된 문명생활을 누려, 화장실에서도 지금의 스펀지와 비슷한 물건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차 경기장 근처의 화장실이나 다른 장소에서 발견된 유골이나 미라의 목에 스펀지와 같은 물체가 걸려 있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전차 경주에서 진 사람이 처벌이 두려워서 혹은 경기장에서 죽기로 예정된 노예들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화장실에서 쓰던 스펀지를 삼키고 자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이사랴의 전차 경기장에서도
헤롯 왕은 전차 경기장에서 5년마다 전차 경주, 죄수와 맹수와의 결투, 노예들의 죽음의 검투 경기 등을 열었다. 로마 사람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열광했던 것같이 가이사랴에서도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가이사랴의 화려한 모습 속에서 수많은 노예, 잡혀온 유대인들이 피 흘리며 죽어 나갔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박해 시대에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잡혀 가이사랴의 전차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 역시 로마와 발맞추어 같은 죄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유대인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은 일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머물다가 잡혀 박해를 받았다. 특별히 가이사랴 지방은 빌립과 바울 같은 분들을 통해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었기에, 구원받은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사적으로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로마의 귀족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얼마 전에 로마 박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희생을 당했는지 들은 적이 있다. 전차 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지만, 여러 사람을 한 사람씩 나무에 묶어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믿음이 어려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광적으로 지르는 군중들의 소리를 거스려 큰소리로 그들에게 믿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지켜 주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 선교회에서는 주님이 주신 마음과 말씀을 계속 간증하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없고, 서로 나누는 믿음의 교제와 간증이 우리 마음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서로 마음을 비추어보는 동안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감동케 하셔서 우리를 악한 생각에서 지켜 복음을 위해 살게 해주심을 본다.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
얼마 전, 내가 아는 유대인 친구가 대학에서 주제발표를 하면서 자기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들고 나와 ‘우리 할아버지는 쉰들러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죽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유언하기를 “독일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 절대 잊지 말거라. 그리고 쉰들러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도 절대 잊지 말거라. 이 두 가지를 대를 이어 영원한 유산으로 지켜 나가거라”고 했다고 전했다.
가이사랴나 로마 시대의 기독교 유적지 등을 통해 우리도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나 믿음의 선진들이 지켜 나갔던 주님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을 통해 전해지는 참된 복음과 주님의 마음들을 지켜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가이사랴를 돌아보는 동안, 이 두 가지 사실이 마음을 강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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