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성경적인 침례인가?
어떤 것이 성경적인 침례인가?
  • 이한규 (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5.01.1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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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46회)

 
세례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에서 출발한 유아세례
교회사에서 침례만큼이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된 문제도 많지 않다.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아세례가 사도 시대부터 행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런 추론의 근거로 마가복음 10장 14절, 고린도전서 7장 14절, 사도행전 2장 39절과 16장 31절, 에베소서 6장 4절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서신서에 나타난 모든 침례에 관한 말씀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어 있다고 믿는다.
유아세례에 대한 오해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서 ‘물’을 ‘세례’라고 오해한 교부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대부분 발생되었다.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는 2세기 말에 쓴 글에서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어린아이도 성결케 하셨는데, 침례는 영혼을 깨끗케 하는 것이며 거듭나는 것과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다’라고 했다. 오리겐은 “유아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 … 아무도 죄의 오염에서 깨끗할 수 없다. … 침례 의식을 통해 출생의 오염을 씻는 유아세례를 받는다”라고 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부모들은 자식들이 원죄 가운데 죽어 지옥으로 갈까봐 유아들을 급히 교회로 데려가 세례를 받게 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나 노인이나 병자에게는 침례를 주기가 곤란해 사람들은 물을 뿌리거나 붓는 편법을 만들어냈다.
캐롤Carrol 박사의 <피흘린 발자취>에 의하면, 침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초대교회 안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떤 교회의 인도자들은 침례가 구원의 방법인 것처럼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침례를 일찍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결과 유아세례가 생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캐롤 박사에 의하면, 어떤 교회들은 유아세례를 강력히 거부하였으며, AD 251년에는 참된 교회들이 잘못된 유아세례를 받아들이는 교회와는 교제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거듭난 자들만 침례를 받았으며,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실의 간증 또는 증표로 여겼다. 그들은 유아에게 세례하는 자들과는 교제를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거듭난 후에 다시 침례를 받게 하였다. 이처럼 참된 교회는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이라고 거부해 왔기에, 어떤 기독교 역사가들은 재침례교 모임은 결코 16세기에 시작된 교회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미루다가 죽음을 앞두고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
콘스탄틴이 세례를 미룬 사실을 보아도 그 당시 사람들의 세례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2008 민음사 판) 제2권에서 콘스탄틴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엄격한 교회 용어를 따르자면 최초의 그리스도교 황제라는 말은 적어도 그가 죽는 순간까지는 적용될 수 없었다. 대제가 세례 예비자가 되어 안수를 받고 세례를 받은 후에 신자로 입문한 것은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였기 때문이다.”
<피흘린 발자취>의 저자 캐롤 박사와 <교회사>를 쓴 앤드류 밀러 등 여러 교회사가들도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열심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을 죽을 때까지 미루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가 씻어진다고 믿었기에, 세상에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자기가 편할 때 세례만 받으면 된다고 여겼다. 세례가 죄를 씻는 허가증이었던 셈이다. 그랬기에 콘스탄틴은 일찍 세례를 받아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육신이 누리고 싶은 것들에 제약을 받는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는 임종 시 교회 감독을 자신의 궁전으로 불러들여, 당시 니코미디아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교회사가인 가이사랴 사람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임)에게 신앙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 주시면 집회에 나가겠다고 고백하고 다시는 자주색 황제복을 입지 않고 개종자가 입는 옷을 입겠다고 약속했으나, AD 337년 세례 받은 직후 죽었다.

카톨릭 법령으로 정한 유아세례
카톨릭교회는 AD 416년에 유아세례에 관한 법령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법령으로 말미암아 유아세례는 의무적인 것이 되었다. 그 결과 거짓된 교회 안에는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국가교회주의자들은 그 법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았고, 그때부터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산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불안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유아세례가 법령으로 제정된 지 10년 뒤인 AD 426년부터 10세기 이상 기독교회의 암흑기가 시작되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무시무시한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래 이유들을 들어 유아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대한다.
1. 예수님이나 주님의 제자들은 어떤 어린이에게도 침례를 베푸신 일이 없으셨다(막 10:13~16, 요 4:2).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침례 받기 전에 먼저 믿음을 요구하셨다(막 16:16).
2. 세례 요한은 어떤 어린이에게도 침례를 준 일이 없었다. 그는 침례에 앞서 죄의 자백과 회개를 주장했다(마 3:6,8).
3. 유아세례는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개인적으로 구원의 복음과 침례의 참뜻을 깨닫고 받아들일 필요성을 버리도록 만든다(행 2:41).
4. 유아세례는 성경적 근거도 없이 거듭났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하여, 거듭나지도 않은 자가 거짓 믿음을 가져 훗날 자신이 회개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만든다.
5. 유아세례는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 없이 형식적인 신앙 고백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여 실상은 불신자들도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영적 분별을 흐리게 한다(엡 4:12).
6. 유아세례는 순수한 성경적 의식을 의식 중심주의로 오도誤導하는 나쁜 관행을 만든다.
7. 유아세례를 실시할 때 후견인들에게 성취 불가능한 비성서적 서약을 하게 한다. 신약성경에는 결코 대부代父나 대모代母, 그리고 세례명 등이 없다.

성경적인 침례와 변형된 세례 의식
한글 개역성경에서 ‘세례’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 성경에 총 115회 나타난다. 세례로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물로 뿌리는sprinkling 세례’가 아니라 ‘물 속에 담그는immersion 침례’를 의미한다. 세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Baptismo, 영어로는 Baptism이다. 그 뜻은 ‘잠기다, 침수하다, 장사지내다, 매장하다’ 등이다.
세례 의식儀式으로는 물을 머리에 뿌리는 살수례撒水禮, 머리에 물을 붓는 관수례灌水禮, 몸 전체를 물 속에 잠기게 하는 침수례浸水禮 등이 있는데, 본래 기독교회는 예수님 당시나 사도 시대부터 물 속에 잠기는 침수례(침례)만 행해 왔다. 그런데 12세기 이후부터 로마카톨릭이 편의에 따라 만들어낸 관수례가 더 우세하게 행해졌다. 그리고 13세기부터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방법으로 관수례와 살수례가 서방 세계에 널리 퍼졌다.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의 참뜻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몸 된 교회에게 꼭 지키라고 명하신 두 가지 의식이 있는데, 침례와 성찬이다(마 28:16~20).
침례는 예수님의 죽음, 장사 지냄, 부활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셨으므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장사 지낸 바 되며 또한 주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이다(골 2:12, 롬 6:3~11). 전신이 물 속에 완전히 잠김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물에서 올라옴으로써 부활에 참예했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죽은 자는 장사를 지내야지, 그냥 두면 썩는 냄새 때문에 몹시 괴로울 것이다. 옛사람을 장사지내지 않으면 옛 생각, 옛 생활에 의한 괴로움이 계속 따른다. 또한 죽음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도 없다(고전 15:3~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세상)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고 가나안을 향해 가기 위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는 과정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것이 침례라고 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는 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광야 생활이 고통스럽고 때로 애굽을 그리워해도 돌아가지 못했던 것은 홍해를 건넜기 때문이었다. 구원받은 성도 역시 영적으로 출애굽한 사람들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기에,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마음에서 홍해를 건너는 것은 그처럼 중요한 것이다.
또한 침례浸禮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은 표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고백이다(벧전 3:21). 구원받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겠다는 마음의 표요, 세상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포하는 것이며,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한 지체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사탄에게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하며 살겠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침례가 지니고 있는 의미들을 변형된 세례洗禮 의식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침례는 반드시 거듭난 사람이 받아야 한다. 거듭난 사람이 침례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 마귀와 그의 사자들 및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을 믿고 거듭난 뒤에 침례를 받는 것이지 침례를 받아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행 8:12). 침례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일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면 십자가에 달려서 구원받은 한 강도는 침례도 안 받았는데 어떻게 낙원에 갔겠는가?
에티오피아 내시가 빌립에게 침례를 받는 모습에서도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인 줄 믿노라.’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행 8:37~38)

침례는 언제 받는가?
사도행전 2장 38~41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3천여 명이 그날 침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의 내시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사야 53장에서 약속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바로 집사인 빌립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9장 18절에서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 다메섹 교회의 평신도인 아나니아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0장 47~48절에 보면, 백부장 고넬료의 가족과 친구들 역시 베드로가 전해 주는 복음의 말씀을 믿고 죄 사함을 받자 성령이 임했으며 그날 침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가 믿는 즉시 침례를 받았으며(13~14절), 같은 16장에서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집에 있는 권속들 역시 구원을 받은 그날 침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8장 8절을 보면 회당장 그리스보의 온 집안과 고린도 사람들도 주를 믿고 그날 침례를 받았다.
신약 성경을 보면, 이처럼 침례는 구원받은 즉시 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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