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Jordan River
요단강 Jordan River
  • 관리자
  • 승인 2015.03.0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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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27회)

 

 

 

죽음을 건너는 강
요단강의 발원지는 크게 두 곳이다. 한 곳은 시리아 지역(이스라엘 지역이 아닌) 헐몬산의 동남쪽이며, 다른 한 곳은 레바논 고원이다. 시리아 지역의 헐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갈릴리 호수를 거쳐서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경로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요단강이다. 요단강은 해수면보다 낮은 곳을 흐르며, 강의 전체 길이는 250km 가량이며, 꼬불꼬불한 길을 다 쭉 펴면 330km고, 폭은 30~72m, 깊이는 1~3m이다.
 보통 요단강을 ‘죽음을 건너는 강’이라 여겨 많은 기독교인들이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을 부른다. 오랜 세월 요단 강은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약속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강의 깊이가 그리 깊지 않은데, 이것은 ‘죽음’이 두려워 보이나 구원받고 건너면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인도의 갠지스 강에서나 과거 중국의 일부 부족들이 강에서 장례를 치르는 의식들이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강을 건너는 것을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는 요단강에서 영적 의식을 가졌던 고대 히브리 민족에게서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북쪽에서 흐르는 맑은 물
헐몬산에 내린 비와 눈이 모여 처음에는 네 개의 내를 이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니아스’라고 불린다. 바니아스가 있는 위치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이곳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한 곳이다. 또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병이 나았던 혈루병 걸렸던 여인의 일도 이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갔을 때 헐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작은 내를 이루어 흐르는 것을 보았는데, 물이 굉장히 맑고 차가웠다. 물속에는 일급수 시내에만 산다는 산천어가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맑은 물은 찾기 쉽지 않다. 북쪽에서 흐르는 물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흙탕물로 변하고, 흐름은 거칠어진다. 북부의 맑은 물은 주위에 많은 식물들이 자랄 수 있게 한다. 남쪽의 유대광야 지역이 메마른 것과 대조적으로 북부의 요단강 주변에는 들풀들이 푸르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갈릴리 호수의 물이 주위의 땅들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요단강이 갈릴리 호수에 이르러서는 다시 남으로 흐르기에 물이 살아 있지만, 강물이 사해에 이르면 사방이 막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위로 증발할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받고 배운 마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증거되어 흘러야 하지, 마음이 흐르지 못하면 자기 생각에 갇혀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듯했다.

‘야르데닛’과 ‘카세르 엘 야후드’
보통 관광객들이 찾는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 옆의 ‘야르데닛’과 유대광야 쪽 여리고 길 옆의 ‘카세르 엘 야후드’가 대표적인 방문지이다. 사람들은 야르데닛을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곳으로 여겨 방문하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세례식을 가지면서 예수님을 기념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북부 갈릴리 지역의 요단강보다는 남부 유대광야 쪽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가 유대광야 쪽이라고 기록되어 있고(마 3:1~5, 막 1:4~5, 요 1:28), 예수님도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광야 쪽으로 옮겨가 세례를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3:13~14, 막 1:9). 이 부분은 성지순례 2회인 “카세르 엘 야후드”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카세르 엘 야후드는 요르단과의 국경지대로 군사경계지역이라 차량으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다행히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수교를 맺고 있어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유대인의 궁정’이라는 뜻의 아랍어인 ‘카세르 엘 야후드’는 부활절이나 기독교 행사가 있는 날이면 각국의 정교회나 천주교 소속 신자들이 와서 세례식을 갖는다. 가게에서 세례복을 돈을 받고 빌려주는데, 야르데닛 지역과 마찬가지로 통으로 짠 흰옷을 빌려준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나는 개인적으로 카세르 엘 야후드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로 건너간 세례가 베풀어졌던 가장 유력한 곳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장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요한은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님에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반문했고, 예수님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를 베풀 때 요한은 예수님의 몸을 물에 잠그기 전에 반드시 손을 머리에 얹고 축사를 해야 했다. 그 축사는 보통 우리가 하는 기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안수를 말한다. 유대인의 모든 축사는 안수로 시작된다. 즉, 제사장의 아들인 세례 요한이 제사장의 자격으로 죄가 없는 예수님에게 안수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세상의 모든 죄가 희생제물이신 예수님에게로 넘어가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이사야 53장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시간계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미 이루어진 미래의 일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전한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훗날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셔야 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한다. 그때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가려면 율법대로 죄를 안수받아야 한다. 그 일을 이룬 과정이 바로 마태복음 3장인 것이다.
 안수를 통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짊어지신 부분을 가장 잘 표현한 곳이 요한복음 1장 29절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 요한이 안수함으로써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짊어지셨음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메시야로다” 하거나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로다” 하거나 “보라, 유대인의 왕이로다” 하지 않고, 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제사에 드릴 양이라고 아무 양이나 잡으면 안 되고, 반드시 안수로 죄를 넘겨받은 양을 잡아야 속죄가 된다. 많은 양 중에서 안수받아 죄를 짊어진 양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저분이 우리 죄를 안수받은 바로 그 양이야! 그러니까 다른 양 말고 꼭 저 양을 잡아야 돼!”라는 말인 것이다. 예수님이 죄를 넘겨받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속죄양이기에, 다른 것에 기대를 두지 말고 반드시 그 양을 바라보고 그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고 세례 요한은 외치고 강조하고 가르친 것이다.
 얼마 전, 두 명의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부분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나에게 “예수님이 속죄양이면 죄를 안수받아야 하는데, 언제 안수받았는지 증거를 대라”고 했고, 내가 마태복음 3장을 펼쳐 보이자 입을 다물었다. 그 중 한 명이 이것을 어디서 배웠냐고 묻길래 한국의 박옥수 목사님께 배웠다고 하니 ‘유대인도 아닌데 어떻게 안수함으로 죄가 넘어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세밀하게 알고 있지?’ 하며 굉장히 자존심 상해하는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우리에게 로마서 11장 26절 말씀과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책을 선물로 주셨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일을 유대인들과 함께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야르데닛에서는…
카세르 엘 야후드와는 대조적으로 야르데닛은 경관이 좋다. 유대광야 쪽 요단강은 물살이 빠르고 흙탕물인데 비해 북쪽 요단강은 천천히 흘러 보는 이에게 요단강의 잔잔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 준다.
 야르데닛에는 작은 물고기로부터 어린아이의 몸 세 배에 가까운 큰 메기까지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어른들 가운데 발에 각질이 많은 사람은 물속에 발을 담그고 기다리고 있으면 작은 물고기들이 바글바글 달려들어 발뒤꿈치의 각질을 뜯어먹는데, 소름이 돋도록 간지럽다.
 이따금 비버들이 물속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물 밖으로 나와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주어 건너편으로 부지런히 나르는 모습도 재미있다. 강물에서 세례를 받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며 “할렐루야!” 하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면 비버가 언덕에 서서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비버의 눈에도 그들이 이상하게 보이는데, 그들 가운데 죄를 사함받지 않고 세례를 받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까우시겠는가!
 야르데닛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곳이라기보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나은 곳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증명할 자료는 없다. 그들은 나아만이 사마리아를 떠나 아람(시리아)으로 가다가 유대광야 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추측일 뿐 나아만이 목욕하러 내려간 요단강이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해 나았다는 것이다.
 근래에 나아만의 아내를 수종하던, 이스라엘 땅에서 잡혀온 작은 계집아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망스러웠다. 그 아이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아이는 마음을 사마리아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과 그 말씀에 두어 비참하고 절망적인 형편을 소망으로 바꾸어 살았다. 그 모습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 계집아이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살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루터가 있었던 요단강
요단강에 관련된 이야기들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에 이르렀을 때 요단 물이 물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듯 건널 수 있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극히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후 그가 담대하게 살 수 있도록 앞서 일하신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요단은 요르단 지역에서 여리고 쪽으로 가다가 만난 강 줄기였을 것이다. 그곳은 유대광야의 위쪽과 만나는데, 고대사에 그 지역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이 범람했던 지역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대의 요단강은 지금보다 규모가 크고 작은 배를 타고 건넜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사기 3장 28절과 12장 5절에 보면, 길르앗 사람들이 ‘십볼렛’ 발음을 정확히 하지 못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잡아죽인 곳이 요단 나루터였다.
 요단강 줄기를 따라 유대광야를 차로 달리면 베다니, 여리고 등 예수님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성경 지명들이 적힌 도로 표지판들이 계속 지나간다. 요단강은 성경의 역사에서 결코 뗄 수 없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다.

러시아어 방송설교가 헐몬산에서 유대광야로 흐르는 요단강처럼
옛날에는 요단강을 건너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이어주는 다리들이 많았으나 다 파괴되었다. 1967년에 이스라엘과 아랍연맹 사이에 벌어졌던 ‘6일 전쟁’ 때 마지막 남은 다리가 파괴되었다. 그 후 1994년에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의 군인들에 의해 국경용 다리가 다시 만들어졌다.
 요르단에서는 요단강 유역에 크고 작은 공장들을 지어 요단강을 공업에 이용하면서 요단강 유역이 많이 황폐해졌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그 수량이 많이 줄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요단강은 예나 지금이나 마르지 않고 헐몬산에서 시작하여 흐르고 있다. 그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들이 지금도 교회 가운데 흐르며 일하고 있다.
 여러 해 전부터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러시아어를 할 줄 몰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근간에 러시아 방송에서 박옥수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가 시작되어 그들이 그 말씀을 듣고 우리 성경공부 모임에 찾아오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전에 한 유대인 청년이 구원받자 러시아계 유대인인 그의 어머니는 “누가 우리 아들을 기독교인을 만들었어? 어떤 녀석이야?” 하며 우려했고, 그 형제는 형제대로 어떻게 어머니에게 복음을 들고 접근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러시아 방송설교가 다리가 되어 형제의 어머니와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러시아어 방송설교가 마치 헐몬산에서 유대광야로 흐르는 요단강처럼 우리 교회 안에 흘러 비록 규모는 작지만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고 있음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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