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시기에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시기에
  • 글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5.09.30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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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도영대 장로를 추억하며

9월 6일, 짧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도영대 장로님이 주님 품으로 가셨다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장로님…! 몇 분과 함께 장례식장이 있는 마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마음 한쪽에 고이 접어두어 먼지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던 장로님과 함께 보냈던 추억들을 하나 둘 꺼내보았다.
 나는 기쁜소식사에 1994년 5월에 입사하고, 도영대 장로님은 같은 해 12월에 입사하셨다. 나는 편집부에서 일했고, 장로님은 총무와 제작 업무를 관장하셨다. 그렇게 나는 장로님과 함께 복음 전도를 뒷받침하는 문서 일에 동행했다. 서로 사무실이 달라 떨어져서 일하다가 2001년에 큰 사무실을 마련해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내 나이 서른 여덟, 장로님의 연세는 일흔 하나였다.
 장로님의 몸은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지만 마음만큼은 푸르렀다. 문서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셨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하셨으며, 문서 전도의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셨고, 누구보다 겸손하게 교회에 순종하셨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많이 아끼고 위하셨다. 

 

 장로님은 나에게, 함께 일하던 우리에게 울타리였다. 내리는 비를 막아 주는 우산이었다. 정신이 약하고 실력이 모자란 나는 나의 연약함을 덮어 주는 그 울타리와 우산이 좋았다. 장로님은 우리가 자신의 약함에 매여서 복음을 위해 힘있게 달려가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까워하셨지만 차마 울타리와 우산을 거두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언제나 문서 전도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밤이 깊도록 생각하는 것은 그분의 몫이었다.
 장로님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즐거웠다. 일하고, 의논하고, 이야기하고, 때론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꾸중을 듣고…. 장로님의 생신이 되면 흥이 많던 우리는 사무실에서 즐거운 놀이판을 벌였다.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장로님은 당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고지들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셨다. 나는 훗날 장로님이 은퇴하면 장로님을 모시고 그 고지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허무하게 꺾였다. 문서 전도에 힘을 다 쏟아부었던 장로님은, 손녀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일 앞에서 파킨슨병을 얻으셨다.
 나는 장로님의 약한 모습을 보아야 했다. 우리와 함께 꿈을 꾸며 수고를 짊어지고 앞서 달리시던 장로님은, 병으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힘없는 노인이 되셨다. 서글펐다. 나는 입을 닫았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로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추억들은 꺼내 볼 수도 없었다. 그걸 보면 현재가 더 슬프게 와 닿기에.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장로님은 여든이 되어 은퇴하셨고, 장로님과 함께했던 마음속 추억들에는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9월 6일에 접한 장로님의 소천 소식. 일부러 덮어두었던 기억 속 사진첩을 열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한 장면, 한 장면 넘겨보았다. 즐거웠던 날들보다 어려웠던 날들의 기억이 짙게 떠올랐다. 병이 생긴 후 장로님은 속에서 음식을 거부해 무얼 잘 드실 수 없었다. 건장하던 몸은 어느새 몹시 야위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일을 그만두신 후로도 특별히 하실 일이 없었기에 장로님은 사무실에 나와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계셨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종종 “박 형제, 나하고 밥 먹으러 가자.” 하셨다. 앞서 가시는 장로님을 뒤따랐다. 중절모를 쓰고 야윈 몸을 잘 가누지 못해 비척비척 걸어가시는 장로님.
 식당에 앉아 음식이 나오면 내가 밥을 다 먹는 동안 장로님은 서너 숟가락밖에 잡수시지 못했다. “한 숟가락만 더 드세요.” 한 술 더 뜨시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지, 숟가락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하셨다. 어느 정도 앉아 있다가, 할 일들이 있기에 “그만 가게요.” 하면 “그러자.” 하고 일어나셨다. 살아 계실 때는 몰랐는데, 다시 뵙지 못하게 되니 그런 기억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한다고, 시간이 얼마나 흐른다고 그때 같이 계속 앉아 있지 못했을까….’ 장로님은 당신의 마지막 시간들을 막내딸 부부와 보내셨다. 사위인 윤종수 목사님(기쁜소식마산교회)이 몸이 불편한 장로님을 늘 씻겨 드리고 마음으로 섬겨 행복하게 지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찾아뵙지 않았다. 현재의 아픔이라는 껍데기 안에 들어 있는, 장로님이 나에게 베푸셨던 섬김과 희생을 나는 망각한 것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으며, 활짝 웃고 계시는 사진 속 장로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복을 입고 계신 장로님의 아내인 허 모친께서 내 손을 꼭 잡고 끌어안으며 “장로님이 며칠 전에 함께 일했던 형제들이 보고 싶다고 하셨어.”라고 하셨다. ‘삶이란 이런 것인가? 늘 어른들은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어린 사람들은 그 사랑을 잊고 바쁘다며 등을 돌리고…’ 마음에 아픔이 짙어졌다.
 장로님은 대덕 수양관 산자락에 묻히셨다. 복음을 위해 자신을 드리셨던 아름다운 분들 옆에. 그날도 내 마음은 아팠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단 하루도 실천할 수 없으면서도 ‘이제부터는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리라!’ 하고 다짐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나는 장로님에 대해,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문득 주님이 속삭이셨다.
‘너와 함께 지냈던 도영대 장로는 겉모습이었어. 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짜 도영대 장로는 나와 함께 있어. 영원히 죽지 않는 이곳에.’
‘그랬구나! 다시 만나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구나! 다시는 이별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구나!’
 내가 받은 구원이, 우리 교회가 지켜온 복음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사망’은 ‘이김’에게 삼켜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지지 않는 참 생명을 가진 영원히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였다. 후회 없이 사랑했다 해도 지나가는 이 땅에서의 삶, 그것은 본질이 아니었다. 속으로 장로님에게 이야기했다. “장로님, 이젠 슬프지 않아요. 괴롭지 않아요.” 장로님을 보내드리는 예배 때 박옥수 목사님이 하신 “섭섭하지만 슬프지 않습니다.”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복음을 위해 온전히 드려졌다가 스러진 도영대 장로님의 육신! 그리고 저 영광스런 땅에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계시는 장로님! 머지 않아 뵙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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