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초심, 신앙의 영(0)점
신앙의 초심, 신앙의 영(0)점
  • 이헌목(기쁜소식양천교회 목사)
  • 승인 2018.11.14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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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삶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왜 죽었는가?
이스라엘의 사울 왕 시대에는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지 않았지만, 다윗은 왕이 되면서 하나님께 묻고자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 오려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모셔 오는 과정에서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다가 죽었습니다. 법궤가 들어오는 즐겁고 축복된 날이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게 됨으로 인해 도리어 두려움과 저주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궤를 자기 성으로 메어 들이지 못하게 하여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갔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그곳에 석 달을 있는 동안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여호와의 복이 임했습니다. 그 후, 다시 레위 자손들이 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이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고, 그날에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기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있는 동안 “…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삼상 7:1)라는 말씀대로 엘리아살이 궤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를 옮겨 가는 중요한 시간에 엘리아살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삼하 6:7)라는 말씀대로, 누구보다 복을 받아야 할 아비나답의 집에 저주가 임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생겼습니다. 반대로 오벧에돔에 대하여는 “…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삼하 6:1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비나답 집은 왜 저주를 받았을까요? 웃사가 죽는 사건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초행길은 초보 운전입니다
어느 국도를 달릴 때, “초행길은 초보 운전입니다”라는 표지판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운전 면허증을 딴 지 20년이 넘었고 그 동안 무사고 운전자였기 때문에, 초행길이지만 초보 운전 때처럼 겁을 내거나 조심스럽게 속력을 낮추고 운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로 표지판은 ‘운전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초행길은 초보 운전자와 같으니 조심해서 운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앙의 길에서도, 어제까지 많은 역사가 있었더라도 오늘 하루는 처음 가보는 초행길처럼 생각하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며 주님께 묻고, 겸비하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이나 맛보았던 역사, 여러 가지 간증 등은 다 내려놓고, 자신이 무익하고 악한 인간임을 깨닫고 항상 초보 운전자의 마음으로 주님의 긍휼과 은혜의 날개 아래서 보호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자의 위치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영점으로 돌아가자
정상으로 작동하는 저울은 물건을 올려놓으면 바늘이 가리키는 눈금이 무게만큼 나아갔다가, 물건을 내려놓으면 다시 ‘0’을 가리킵니다. 만일 물건을 내려놓았는데 바늘이 0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저울은 사용할 수 없는 고장난 저울입니다. 신앙의 저울도 반드시 ‘0’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나는 신앙을 잘해 왔어. 역사가 많았어!’ 하고 자만하거나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고장난 저울같이 쓸 수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새로 시작하는 오늘은 초행길이기에 초보 운전자의 마음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설령 헌금도 전도도 봉사도 잘하고, 기도에 응답도 받았고, 많은 일에 인정을 받았다 해도, 신앙의 영점은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하며 항상 악할 뿐’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울 왕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나아가 묻기도 하고 믿음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세워진 때부터 여호와의 궤 앞에 나가 묻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영점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은 신앙이 타락한 것입니다.
제사장 아비나답 집 사람들도 “행진할 때에…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민 4:15)라는 말씀을 소홀히 여겨 원칙인 말씀을 무시한 채 블레셋 사람들처럼 부정하게 새 수레를 만들었고, 웃사는 궤를 붙들었다가 여호와의 진노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있었지만 웃사와 아효와 엘리아살 등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신앙의 원칙인 영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초심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만 의뢰하기 위함
에티오피아의 메켈레 시에서 가진 ‘아프리카 대학생 체전’ 개막식 때 박옥수 목사님이 메인 축사를 하실 때 여러 차례 박수를 받았고, 그라시아스합창단의 수준 높은 공연은 개막식을 빛냈습니다. 그동안 마인드교육을 받은 1,200명의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은 귀빈과 관객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박옥수 목사님은 FASU(아프리카대학스포츠연맹), FISU(세계대학스포츠연맹)의 회장 및 임원들과 만나 복음을 전하시는 등 개막식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광경들을 보며 한없이 감격스럽고,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다음날 아디스아바바에서 사역자 모임을 가질 때, 박옥수 목사님은 어제의 감격을 뒤로 하고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은 하나님의 일들을 많이 하고도 타락하더라. 우리도 별 수 없이 타락한다.”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1장 8~10절 말씀을 펴서 사도 바울이 타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전해주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동안 당하는 환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상황 등을 만나며,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바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저울의 영점처럼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늘 신앙의 영점으로 돌아가서 끝까지 복음을 섬긴 사도 바울의 마음으로 돌이키시는 것을 그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에게는 자기 집안은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자만심과 자기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잘 지켰다는 마음이 걸림과 올무가 되었고, 오벧에돔은 신앙의 영점을 정확히 알고 거기로 돌이켰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버림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이 영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고장난 저울같이 아무 쓸모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자주 자만에 빠져서 ‘내가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종을 통해서 “자네, 흐뭇한 적이 있는가? 큰일 나네! 망하네! 저주받네!”라고 주신 말씀이 내 마음을 잡아 주어서, 들떠 있는 나를 비우도록 하셨습니다. 성도는 신앙의 초심, 영점으로 돌아가야 주의 긍휼을 입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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