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때문에 30년을 덤으로 살며 행복했다
복음 때문에 30년을 덤으로 살며 행복했다
  • 류재용(기쁜소식부천교회)
  • 승인 2019.01.0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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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질그릇
2019년 1월호


그 사건이 일어난 지 40여 년이 지났다. 7년 2개월을 교도소에서 살았고, 기쁜소식부천교회에서 복음과 함께 30여 년을 살았다.
담 안에서 모범수요 기독교 신우회 회장이었지만 마음속에는 죄가 가득했던 나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의 종을 만나게 하셨고,
어두운 터널에서 나와 빛의 나라인 예수님의 세계로 이끄셨다. 일흔이 넘었지만, 이 나이에도 나와 같은 길을 갔던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 

 

나는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법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 옛날에는 밤에 자전거 등을 켜지 않고 다니면 벌금을 냈는데,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었고, 교통법규나 흔했던 장발 단속에도 걸려본 적이 없었다.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스물네 살에 결혼해 아들 한 명 딸 한 명을 낳고 재미있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하던 사업도 잘되어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유류파동이 나면서 사업을 정리하고 직장을 잡았는데, 12시간씩 교대근무를 하다 보니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큰애가 열 살쯤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 처형이 아내를 데리고 밖에 다니기 시작했다. 춤을 추러 다녔던 것이다. 처형에게 아내를 그만 데리고 다니라고 부탁했다. 동서에게도 찾아가 아내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하며 다투기도 했다. 처형과 아내는 나를 의처증 환자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어느 날은 조퇴하고 새벽에 일찍 집에 왔는데, 집에 당연히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아내가 없었다. 셀 수 없는 가출과 외박으로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1982년 6월이었다. 그날도 집에 안 들어온 지가 몇 주가 지났다. 아들에게 엄마를 찾아주려고 처형 집으로 갔다. 아내는 없고 처형 가족이 있었다. 말다툼 끝에 싸움이 일어났다. 참을 수 없었다. ‘막가는 인생이다. 남을 못 살게 하는 너도 한번 당해 봐!’ 하며 주방에서 칼을 가져와 휘둘렀다. 다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사람이 죽고 나머지는 미수에 그쳤다. 다음날 신문에 기사가 났고, 나는 경찰서에 가서 자수했다. 신문을 보고 동장이 ‘이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하며 탄원서에 동네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서 경찰서에 가져왔다. 나는 교회에서 집사였고, 동네에서도 회사에서도 성실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신문을 보고 찾아와서, 경찰관도 교도관도 나를 찾아와서 자신도 내 입장이면 그렇게 했을 거라며 나를 위로했다.

소망이 전혀 없었다
재판을 받아야 했다. 변호사가 찾아와 면담을 갖자마자 공소장을 던지며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일을 저질렀느냐며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나는 “당신 같은 변호사 선임한 적 없어. 당신이 죽을 놈 변호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하며 발길을 방으로 돌렸다. 그 후 변호사가 두 번 정도 찾아왔지만 가서 얼굴만 보고 왔다.
3개월 후, 다음날이 재판을 받으러 가는 날인데 변호사가 찾아왔다. 변호사가 ‘내일 재판인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마침 미루나무 꼭대기에 참새 한 마리가 앉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잎이 약해서 앉으려다가 날아갔다. 참새가 부러웠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무능함을 느끼며 “변호사님, 나 하나님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변호사님을 믿습니다. 나, 살고 싶습니다.” 했다. 그러자 그분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류재용 씨 잘해 봅시다. 나, 수임료로 막걸리 한 잔 값밖에 안 받았어요.”라고 했다.
함께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내 공소장을 보더니 ‘사형 아니면 무기, 적어도 15년 형을 받겠다’고 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면 당연히 나도 죽는다고 생각했다. 15년 형을 받아도 당시 내 나이 서른 다섯으로 출소하면 쉰 살이 되니 소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교도관이 책 한 권을 주었다. 금식기도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간증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나도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놈이 속삭였다
1심에서 변호사가 변론을 잘했는지 운이 좋았는지, 징역 10년 형을 받았다. 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생각했다. 방 동료들이 축하해 주면서 자기도 하나님을 믿겠다고 했다.
얼마 뒤 갱생훈련소에 갔다. 그때는 교도소 담장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반항하면 쏘아 죽여도 괜찮다는 시절이었다. 갱생훈련소에서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발톱이 빠지고 머리가 몇 번씩 벗겨지고 처참했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울이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된 후로 무슨 훈련이든지 88회를 시켰고, 틀리면 두 배인 176회를 시켰다.
그때부터 그놈이 웃으며 속삭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해. 복수! 복수!’ 칼도 주고 도끼도 주고, 내가 보기 흡족한 무기들을 마음에 선물해 주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개인 교사처럼 매일 찾아와서 머릿속에, 마음속에 새겨놓았다. 내가 금식기도를 할 때도, 자다가 눈을 떠도, 그놈은 화내지 않고 수강료도 받지 않고 열심히 복수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모범수요 기독교 신우회 회장이었지만 마음 깊이 분노가 차 있었다
2심 재판에서 10년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부산과 대구와 김해에서 지내다가, 3년 2개월 27일 만에 모범수가 되어 수원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수원교도소는 전국 교도소에서 모범수만 모인 곳이었다. 속된 말로 똥만 빼면 부처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출소할 때 “편지할게요.” 하고 나간 뒤 편지보다 빨리 교도소에 오는 사람을 수없이 보았다. 일반 수형자나 모범수나 기독교, 불교, 천주교 신우회 회장도 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금식기도를 잘한다는 이유로 기독교 신우회 회장이 되었다. 재소자들은 나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신입 직원 가운데에는 나에게 경례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재소자들이 내는 십일조를 모아서 불우한 재소자들에게 생필품을 나눠주고, 신앙 서적도 방마다 넣어 주었다. 교무과장님과 의논하여 부활절에는 계란을 삶아서 전 재소자에게 나눠주었다. 계란을 담은 봉투에는 성경 구절도 써넣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교무과장님과 나는 모든 재소자가 하나님을 믿고 출소하게 하자며 한 달에 네 번 기독교 집회를 계획했다. 겉으로는 그처럼 기독교 신우회 회장으로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에서는 수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방 동료들이 “형님은 기독교 회장인데 자면서는 왜 그렇게 욕을 많이 하세요?”라고 말할 정도로 내면 깊이 분노가 차 있었다.

구원받은 후 복수의 칼이 사라졌다
어느 날부터 교무과장님이 집회에 귀한 분이 오실 거라고 계속 이야기하셨다. 1988년 2월 15일에 기쁜소식선교회의 목사님들이 오셨다. 그런데 당시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뼈에 가죽을 입혀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전혀 귀해 보이지 않았다. 2월 17일, 교무과장님이 나에게 박옥수 목사님의 설교집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주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소금장수 이야기, 선장 아들과 원숭이 이야기, 정승의 딸 이야기 등 재미있었다. 여느 설교집과는 색다른 말씀이었다. 이틀 밤 동안 책을 읽었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피가 내 모든 죄를 씻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이거야!’ 눈이 번쩍 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죄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다 씻었어요.”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그럼 왜 징역을 살아요? 아무리 그래도 죄가 없을 수 없지. 회장이면 다야?” 라고 했다. 조그만 핍박이 찾아왔다.
3월 1일, 교무과장님의 초청으로 박옥수 목사님이 수원교도소에 오셨다. 당시에는 <기쁜소식>이 16페이지의 얇은 책자였는데, 그 책자가 수원교도소에 들어온 것을 교무과장님이 읽고 기쁜소식사에 전화하여 박 목사님을 초청하셨던 것이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강당에는 250여 명이 모였고, 박 목사님은 300명 분의 간식으로 통닭, 떡, 두유, 빵 등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오셨다. 기독교 모임에서는 빵과 우유가 아니면 얼마의 떡이 전부였기에 그날 간식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박 목사님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을 빼고 계속 말씀을 전하셨다.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에서 읽었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셨고, 죄인이 예수님을 통과하면 의인이 되며,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사망이고 은혜 아래에 있으면 생명이라고 하셨다.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게 쉽고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죄가 씻어졌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더욱 분명히 자리 잡았다. 목사님이 죄가 없는 사람은 손 들으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250명 모두 손을 들었다.
지난 6년간 나는 금식기도를 270번 했고 그날도 금식기도 중이었는데, 한순간에 금식기도가 사라졌다. ‘출소하면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다 죽이고 나도 세상을 끝내야겠다!’ 하던 복수심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은 내게 말씀을 주셨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그 뒤로 매달 박옥수 목사님이 오셔서 일일 집회를 하며 성경공부를 했다. 당시 수원교도소에서는 고故 도영대 장로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나는 ‘출소하면 저렇게 신령한 목사님 밑에서 성경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하러 오실 때마다 내가 커피를 타서 드렸다. 목사님은 교무과에서 나와 같이 앉아 교제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지금도 설교 시간에 이따금 말씀하신다.
“형제, 죄명이 뭐예요?” 그때 나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예, 살인 및 살인미수입니다.”

 

1988년 3월 1일에 첫 집회를 가진 후 매달 휴일에 집회가 이어졌다. 12월 7일에는 구원받은 30여 명이 교도소 목욕탕에서 세례식을 가졌다.

 

교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다
1982년 6월에 교도소에 들어간 후 7년 2개월 만인 1989년 8월에 8.15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9월 9일에 박옥수 목사님의 인도로 기쁜소식부천교회로 갔다. 교회에서 방 하나를 주셔서 지냈다. 새벽에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세차하는 일을 하고 낮에는 전도하며 지냈다. 교회 형제들과 전도하는 시간들이 그렇게 감사하고 기쁠 수 없었다. 당시 함께했던 이해석, 한상덕, 윤종수, 김영삼 등의 형제들이 지금은 다 국내와 해외에서 목회하고 있고, 지금도 만나면 무척 반갑다. 나는 아직 선교학교에 오라고 하지 않아서 기쁜소식부천교회에서 30년째 지내고 있다.
부천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번은 주일예배를 마치고 부인 자매 7~8명이 있는 데에서 간증을 했다. 간증을 마치고 “저 무섭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자매님 한 분이 “무섭긴요? 형제님은 죄가 밖으로 나왔고, 우리는 죄가 안에 있을 뿐이에요.” 하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매님들 마음에 하나님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매님들은 나 같은 자를 위해 목화 솜으로 이불을 만들어 주었고, 모든 성도들이 가족보다 더 나를 위해 주었다.
출소 후에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호텔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서 세차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삶, 멸망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마음이 교회를 잠시 떠날 때도 있었지만 교회와 멀어지면 내가 어떤 미친 마음을 갖고 살지 알 수 없기에 바로 마음을 돌이켰다.
출소한 후 6개월 만에 하나님과 교회와 종의 은혜로 결혼했고, 두 딸도 낳았다.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이다. 내 모습은 부족하지만 아내는 나를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남편이라고 한다. 어려운 일들도 있지만 아내가 불평하지 않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기뻐하는 것이 무척 고맙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20년 전의 일이다. IMF가 터지기 일주일 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전치 8주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마가복음 6장 25~28절에 머물러 빠져나가지 않았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의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나는 이 병실 저 병실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하루는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데, 주차장 주인이 우리가 주차장을 맡아서 관리하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이 주셨어.’라는 마음이 들었다. 주인은 내가 퇴원할 때까지 몇 달을 기다려 주었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주차장을 맡아 관리하고 있다. 내가 주님 앞에 봉사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삶을 살면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일은 모 신문사 편집국장님에게 13년 동안 복음을 전해서 그분 가족이 구원받은 일이다. 어느 날 예배 후 교제하면서 그분이 ‘죄의 담이 무너졌다, 죄의 사슬이 끊어졌다,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하실 때 무척 기쁘고 감사했다.

부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 복음을 듣게 하자
지금 나는 일흔 두 살로, 예순 한 살 때부터 교회의 실버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은 ‘찾아가는 실버회’에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부천 시내 노인정 100여 군데를 찾아다니고 있다. 마인드 강연도 하고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복음도 전한다. 여름과 겨울에는 100~150명을 강릉과 대덕 수양회에 모시고 간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는 실버들을 교회에 초청하여 실버대학을 하고 있다. 김기성 목사님이 ‘부천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 복음을 듣게 하자’고 하셨기에,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에 함께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부천에 산 세월이 30년이 넘었다. 내 모습은 별 볼일 없지만 복음 때문에 국회의원 사무실에도 가고, 시의원도 찾아가고, 신문사에도 가고, 여러 직위의 사람들을 만나고.... 감히 내가 누릴 수 없는 복을 누리고 있다.

재소자들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무척 기쁘고 행복했다
2017년에는 김기성 목사님을 따라 아프리카 모잠비크와 레소토에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모잠비크에서는 재소자가 400여 명 있는 교도소에서 간증하고 복음을 전했다. 레소토에서는 김기성 목사님이 교도관 200명에게 한 시간 말씀을 전하고 난 뒤 내가 구원받은 간증을 했다. 내가 교도소에 있었던 6년 동안 기독교 신우회 회장으로 지냈지만 속에서는 원수 갚을 계획만 했는데, 박옥수 목사님을 만나 구원받아서 예쁜 아내와 결혼해 두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산다고 간증하며 복음을 전했다. 오래 전에 내몽고 전도여행을 갔다 온 후로 다시 해외 전도여행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2018년에는 케냐에 가는 은혜를 입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김기성 목사님은 다른 곳으로 가시고, 나는 교도소에 가서 간증하고 복음을 전했다. 복음은 참 놀랍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듣기만 하면 작은 예수로 변한다. 그날 저녁에는 기성 교회 목회자 100여 명이 모인 자리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 청년시절에 함께 지냈던 이해석 선교사의 딸이 통역해 주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튿날에는 중범자 교도소에 갔다. 1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내가 “여러분 가운데 10년 형을 받은 사람 손을 들어보세요.” 하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20년 형을 받은 사람 손을 들어보세요.” 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30년 형을 받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해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전부 종신형을 받은 사람이었다. 고작 10년 형을 받은 내가 그들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말씀을 전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들에게 죄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놓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의롭고 온전하다고 히브리서 10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7)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무척 기쁘고 행복했다. 그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하늘나라만이 소망이다.
그날 저녁에 기쁜소식나이로비교회에 가자 현지인 사역자 사모님 60명이 모여 있었다. 그분들에게도 간증했다. 다음날에는 다른 교도소에 갔다. 그날은 케냐 교정청과 MOU를 맺고 교도소 내에 신학교를 설립하는 현판식을 갖는 날이었다. 나를 그 자리에 함께 세워 주신 주님이 한없이 감사했다. 저녁에도 현지 장년 형제 20명에게 말씀을 전하는 은혜를 입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밖으로 나오면 신앙생활을 잘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출소한 어떤 분은 성경도 많이 알고 우리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이런 말씀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이다’고 하며 좋아했는데, 요즘은 교회에 오지 않는다. 누가 아무 소리 안 해도 본인이 전과자라는 생각 때문에 말씀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본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필요한 사람들임을 본다. 나 역시 내가 옳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내 근본 모습을 떠올린다. ‘벌레요 똥인 내 인생, 나라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잠언 말씀을 기억한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잠 4:9~10)
최근에 하나님이 나에게 한 말씀을 주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제 껍데기인 류재용은 죽었고, 알맹이인 예수로 사는 것이다.

복음과 함께 사는 삶이 최고로 행복한 삶
교도소는 숨쉬는 하얀 무덤이었다. 생명은 있지만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서 성경을 백 번 천 번 읽어도, 밖에 나와서 인도를 받지 않으면 소용없다. 나도 박옥수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 달 안에, 아니 일주일 안에 인생이 끝났을 사람이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것은 복음을 만난 것이다. 나는 지옥 아랫목을 맡아 놓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복수가 내 인생의 최종 목표였는데, 복음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이미 죽었을 사람인데 30년을 덤으로 살았다.
앞으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복음과 함께, 교회와 하나님의 종과 함께 사는 것이 최고로 행복한 삶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언제라도 나와 같은 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복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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