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9.04.08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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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 2019년 4월호
믿음에 이르는 길 |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_16편_구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님만이 가진 이름, 구원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이르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였습니다. 왜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죄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마음을 닫아 예수님과 가로막혀 있으면 구원의 길이 없지만, 마음을 열어 예수님과 한 마음이 되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악을 행했든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어떤 문제가 있든지 예수님이 구원하십니다.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구원’이 이룹니다. 구원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라는 말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다 간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사무엘이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들도 있었고, 하나님이 들어 쓰신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었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했으며, 제사장들은 연약한 인간을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구원자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었고, 죄를 씻는 제사를 드려줄 수는 있었지만,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 구원받을 자입니다. 구원자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을 ‘여호와의 구원’인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면 예수님은 구원이시기 때문에 구원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여자를 죄와 죽음에서 건질 수 없었지만
요한복음 8장에서 어떤 여자가 간음하다가 잡혀 돌에 맞아 죽기 위해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 가지고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아무리 지혜로워도, 아무리 배경이 좋아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돌에 맞아 죽기 위해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자뿐 아니라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시기에 그 여자를 구원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이 땅바닥에 손으로 글을 쓰신 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여자를 끌고 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치려고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그 누구도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죄와 죽음에서 건질 수 없었지만, 그 여자가 예수님과 만나자 그가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 과거를 지울 수만 있다면…!
박옥수 목사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처럼 죄로 인해 몹시 고통하다가 구원받은 한 젊은 부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981년 어느 날, 여수 애양원교회의 목사님이 전화해서 ‘우리 교회에 와서 집회를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가서 보니,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집사 등 교회 임원 50~60명이 지리산 뱀사골에 가서 집회를 가졌다. 그때 정말 행복했다. 새벽과 오전과 저녁에 말씀을 전하고, 점심 먹고는 개인적으로 신앙 상담을 나누었다. 상담하러 오는 분들이 끊이지 않았다. 찾아오는 장로님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어 그분들이 죄 사함을 받고 기뻐하며 나가는 모습을 볼 때 정말 기쁘고 감사했다.
하루는 저녁때가 다 되어 상담을 마치고 혼자 텐트 안에 있는데, 삼십대 초반의 젊은 부인이 찾아왔다. 머뭇머뭇 부끄러워하며 와서 앉기에 성경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죄가 많다고 하여 어떻게 죄를 사함받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말씀을 읽어 주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7~18)
그러자 이분이 갑자기 푹 쓰러지더니 목을 놓아 울었다. 밖에서 텐트 안이 환히 보이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진정하라고 해도 어깨를 들먹들먹하며 울기에, 울게 놔두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10분쯤 지나 가보니 그때까지 울고 있었다. “이제 그만 우세요. 왜 그렇게 우세요?”
그 부인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새엄마가 들어왔는데, 자기하고 나이가 똑같은 딸이 있었다. 시골이니까 집이 가난해서 둘 다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 되어 자기만 학교를 다니는데, 새엄마는 자기 딸이 학교에 다니길 원하는 것을 느꼈다. 복잡한 생각 속에 있다가 어느 날 ‘차라리 내가 이 집에 없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납금을 받아 마산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런데 마산 터미널에 있는 그 여학생을 사창가의 포주가 잡아가, 그때부터 창녀로 살았다고 한다.
거기서 자기를 마음으로 사랑해 주는 한 남자를 만났다. 어느 날 그 남자가 묻지 말고 따라오라고 해서, 시외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보니 나환자촌이었다. 그 청년 부모가 나환자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시부모가 나환자지만 자기를 마음으로 위해 주고, 남편도 잘 대해 주고….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2년 후, ‘이 여자가 전에 창녀여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동네에 퍼졌다. 그때부터 시부모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다 비웃었다. 이 부인은 ‘내 과거를 지울 수만 있다면…!’ 하며 살았고, 몇 번을 자살하려고 생각하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예배 중간에 몰래 가서 뒤에 앉아서 듣다가 예배가 끝나기 전에 얼른 나왔다. 그렇게 지내다가 지리산 집회에 따라왔고, 히브리서 10장 17절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않는다’고 하시니까, 자기 과거를 잊고 싶고 지우고 싶어도 안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 죄를 다시 기억지 않는다고 하시니까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렇게 울었던 것이다.
그 해 가을에 내가 다시 여수 애양원교회에 가서 집회를 했다.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밖으로 걸어나가는데, 누군가가 내 소맷자락을 당겼다. 돌아보니 그 부인이었다.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목사님! 오늘 제 남편이 처음으로 교회 나왔어요.” 그 뒤로는 그 부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지난 죄로 인해 고통하던 젊은 부인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그의 죄를 다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게 하여 그를 죄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구원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없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혜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지혜롭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죄를 많이 지었어도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면 그 사람은 의롭고 거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그 어떤 문제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나 어려움을 만날 때면 ‘구원(예수)’을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는 것은 “구원이여!”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예수님의 이름, 구원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는 구원인 예수님과 동행하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러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몇 십 바퀴 돌았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나 기뻐하는 것들이 별것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문제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게임 중독에서 건짐 받고, 어떤 사람은 의처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어떤 사람은 우울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어떤 사람은 귀신에게서 벗어나고….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여호와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얼굴에 웃음을 주시고, 가정에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우리 이름은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정말 차이가 큽니다. 구원이 있으면 이래도 구원하고, 저래도 구원합니다. 예수님이 다 구원해 주십니다. 죄에서 구원하시고, 병에서 구원하시고, 어려움에서 구원하시고,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하십니다. 구원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원이신 예수님을 입으로만 믿습니다. 구원을 놔두고 자기가 구원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자동차 없이 이곳저곳 뛰어다니려고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구원이신 예수님을 놔두고 죄와 문제에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스스로 구원하려고 하는 것은 구원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입니다! 우리 이름은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어려움에서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부르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어 주셔서 모든 것을 해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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