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9.04.2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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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호
믿음에 이르는 길 |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_17편_믿음과 죄 사함

 

자기를 발견한 사람은 진리를 찾는다
우리는 엄마 젖 빠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토대로 삶의 기준과 주관과 철학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이것은 옳은 것, 저것은 틀린 것, 이것은 좋은 것, 저것은 나쁜 것…. 아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하고, 조금 아는 사람도 자신이 결정하고, 많이 아는 사람도 자신이 결정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 자기 영역 안에서 삽니다.
젊어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살면 잘될 것이라고 여기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스무 살에 실패한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인생에서 실패를 맛봅니다. 자신이 큰소리쳤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는지 알게 되고, 자신을 믿는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내가 틀림없이 성공할 줄 알았는데 실패했구나. 이 일은 내가 진짜 옳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구나….’
거기에서 조금 더 생각하는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알게 됩니다. 자기 마음이 얼마나 비뚠지, 얼마나 더럽고 악한지, 얼마나 거짓된지,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야비한지…. 그처럼 자신을 발견하면 새로운 세계를 찾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더럽고 악한 이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마음으로 살고 싶다. 나도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찾아 헤맵니다.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계를 만나면,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옮겨가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때 길 잃은 아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다가 엄마를 만나 그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에 쉼이 찾아옵니다.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세상에 매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야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신앙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자기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고 찬송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도 내가 좋으면 하나님도 좋아하실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충성했는데 왜 복을 안 주십니까?”라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충성하거나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하나로 합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역 안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도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과 지식과 판단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역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어느 집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 집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문 앞에라도 용신容身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그가 누운 침상째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 없자, 그 집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줄로 달아 내렸습니다.
집주인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당신들, 남의 집 기와를 벗기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하며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친구의 중풍병을 낫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마음에 믿음이 분명히 자리 잡았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을 고치실지 몰라’라는 애매한 마음으로는 지붕을 뜯고 친구를 달아 내리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예수님 앞에만 가면 이 친구가 낫는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지붕을 뜯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붕이야 친구가 나은 뒤 고쳐 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갑자기 지붕이 훤해지더니 침상이 내려오고 그 침상에 중풍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중풍병자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중풍병자는 자신을 고쳐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눈빛에 담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이 읽으셨습니다. 예수님과 중풍병자 사이에 마음이 흐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흐름입니다. 대기가 흘러야 만물이 건강합니다. 우리 몸 안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고 멈추면 죽습니다. 우리 마음도 하나님의 마음과 흘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에게서 당신을 바라는 마음, 당신이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는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놀라운 말씀으로, 그의 마음에 한없이 크고 깊은 감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 내 죄를 사해 주시네요…!’ 그런데 옆에 있던 서기관들은 속으로 판단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자기가 무슨 죄를 사한다고 해?’ 똑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님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은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 생각이 올바른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더러운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잘못된 자신의 영역을 떠나 예수님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예수님이 내 병을 고치실 거야, 나에게 일하실 거야’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흐르니까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역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 죄를 사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에이,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마음이 당신을 믿는 영역 안에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병만 고침 받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도 받을 수 있겠다.’ 그래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그 말씀을 듣고 죄를 사함받았지만, 서기관들은 마음이 예수님과 다른 영역에 있으니까
‘어떻게 사람이 죄를 사해? 말도 안 돼!’ 하며 속으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병은 예수님이 그냥 고치실 수 있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실 수 있으니까,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도 씻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돕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병을 고쳐 주시면 좋겠다, 나를 도와주시면 좋겠다, 나를 축복하시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많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틀림없이 나를 도와주셔! 나를 고쳐 주셔!’라는 마음에까지 도달한 사람은 드뭅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지만 도와주실 것이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여 가다가 중간에 그쳐버리지,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처럼 분명히 도와주신다는 데까지 마음이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개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소자小子’라는 말은 중풍병자를 가리키지만, 예수님이 ‘소자’라는 대명사를 쓰신 이유는 그 말씀이 중풍병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개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으십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대명사를 쓰신 것입니다. “소자야!” 그 소자 안에 우리가 들어 있습니다. 소자는 우리 모두를 위한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자신의 이름을 넣어 “아무개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내 영역 안에서 생각하면 굉장히 어렵지만, 내 영역을 벗어나면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죄에서 벗어나길 원하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래서 내 죄를 사했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죄인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실까?’ 지금까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내가 지금까지 엉터리로 믿었네. 주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 죄가 사해진 것을 믿습니다!’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병 낫기를 간절히 원한 중풍병자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을 때 중풍병자는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을 때에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중풍병자의 마음이 서로 흐르면서 예수님에게 있는 능력이 중풍병자에게 흘러갔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이, 거룩함과 순결함이 중풍병자의 마음에 흘러갔습니다.

전기는 전선을 통해 흐르고, 수돗물은 파이프를 통해 흐르며, 하나님의 역사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릅니다. 우리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서로 오갈 때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물밀듯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전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해도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기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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