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을 버린 요셉과 청지기
옳음을 버린 요셉과 청지기
  • 김재홍 (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19.09.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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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4편)

요셉이 말한 대로 행한 청지기
창세기 44장에 보면, 요셉이 청지기에게 양식을 사러 온 형들의 자루에 양식을 가득 채우고 양식 값으로 낸 돈도 그 자루에 넣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은잔을 넣으라고 합니다.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행하고, 날이 새자 요셉의 형들을 보냅니다.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미쳐 그대로 말하니”(창 44:4~6)
이 말씀에서 요셉이 청지기에 명한 일을 청지기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가나안 땅 시골에서 온 순진한 사람들, 먹을 것이 없어서 양식을 사러 온 사람들인데,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으라고 하더니 이제는 따라가서 ‘우리 주인이 너희를 선대했는데 주인의 은잔을 훔쳐갔냐? 너희가 악하다’라고 해서 잡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인이 양식을 팔다가 심심하니까 멀쩡한 사람 자루에다 은잔을 집어넣고는 도둑질해 갔다고 잡아오라고 하냐?’
이것은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일이고 불의한 일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데 청지기가 그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4장 6절에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미쳐 그대로 말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청지기가 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옳음을 따라서 일을 처리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을 따라가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멈추시오! 당신들 나 좀 봅시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돈을 제대로 다 내고 양식을 샀는데요.”
“나도 알아요. 그런데 모두 자기 자루를 열어 봐요.”
야곱의 아들들이 자루를 열어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어! 이 돈이 왜 우리 자루에 들어 있죠? 우리가 훔치지 않았는데요.”
“나도 알아요. 그 돈 다 꺼내놓아요. 그리고 베냐민, 당신 자루에는 은잔이 들어 있을 거예요. 그거 꺼내놔요.”
“어! 이게 왜 내 자루에 들어 있죠?”
“내가 다 안다니까요. 꺼낸 것들 다 놓고 빨리 가요.”
그러고는 주인 요셉에게 가서 말합니다.
“주인님, 돈도 다 찾아왔고 은잔도 찾아왔습니다.”
만약 청지기가 이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셉은 돈이나 은잔을 찾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형들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그들의 자루에 돈을 도로 집어넣고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자기 생각을 따라서 일했다면 그런 요셉의 뜻과 계획을 다 망치고 맙니다.
요셉이 청지기에게 시킨 일은 누가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고 불의한 일을 명한 것처럼 보이는데, 청지기는 요셉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청지기를 통해서 요셉의 뜻이 그대로 나타나고, 요셉이 하고자 하는 일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결과를 알고 나면, 청지기는 이스라엘의 가족들을 구원하는 귀한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옳음이 버려진 청지기
요셉이 말도 안 되는 일 불의한 일을 시키는 것 같은데, 청지기가 “주인님, 왜 이렇게 일하십니까?”라고 따지거나 묻지 않고 요셉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었던 마음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 일 전에 있었던 사건들에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아무도 풀지 못하는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어 어느 날 갑자기 치리자가 됩니다. 바로는 칠 년 풍년 뒤에 칠 년 흉년이 온다는 꿈을 꾸었는데, 요셉이 그렇게 해몽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을 치리자로 세웁니다. 요셉은 총리가 된 후 칠 년 동안 양식을 비축하는 일만 합니다. 총리라면 경제, 문화 등 여러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요셉은 양식을 비축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런 요셉을 보고 사람들이 비난도 했을 것입니다. “아니, 저 총리는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왜 저렇게 양식만 모아?” 여러 모양의 비난하는 소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도 요셉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총리는 없었는데…. 왜 총리는 양식만 모으고 있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칠 년 풍년이 끝나고 칠 년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흉년이 한 해 두 해 지나갈수록 청지기의 마음에서 ‘요셉 총리가 옳았구나! 저분이 맞고, 내가 본 것이 틀리고 내 판단이 틀리고 내 생각이 틀렸구나!’라는 마음이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저 총리, 해도 해도 너무한다! 총리가 양식만 모으고 있으면 되냐?” 할 때 자기도 맞장구를 쳤는데….
이처럼 청지기의 마음에서 옳음이 한 번 버려집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이 버려집니다. 청지기의 마음에서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100% 옳아 보였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어. 내 생각이 틀린 것이었어. 이제 내 생각, 내 판단을 믿지 말아야겠다!’ 청지기는 어떤 생각이 들고 어떤 판단이 일어나도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요셉이 하려는 일을 그대로 나타낸 청지기
그런 시간이 지나고, 창세기 44장에서 요셉이 청지기에게 일을 시킵니다. 청지기가 보기에 불의한 일을 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년의 자루에 은잔을 집어넣고 보낸 뒤 멀리 가기 전에 따라가서 “이 도둑놈들아!” 하고 잡아오라’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요셉의 형들이나 베냐민이 도둑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요셉이 명한 대로 합니다.
요셉은 청지기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청지기가 귀한 것은, 요셉이 하고자 하는 일이 청지기를 통해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청지기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 ‘이 사람들이 잘못한 게 없는데 주인은 왜 도둑으로 몰아서 잡아오라고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 그는 자신의 옳음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 옳음이 청지기의 마음 안에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주인께서 왜 이 일을 시키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분이 옳아.’ 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나 판단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시키는 그대로 하여 요셉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렇게 한 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그냥 양식을 사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총리 요셉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아, 주인이 형들을 자신에게로 이끌려고 그런 계획을 세웠구나.’ 다 알고 나면 역시 요셉이 옳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요셉의 형들은 청지기와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냅니다. 도둑으로 드러나 요셉 앞에 다시 섰을 때, 창세기 44장 16절에서 유다가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라고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답답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자신들이 양식 값을 훔치지 않았고 베냐민도 은잔을 훔치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자신들의 자루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너무 답답한데, 그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옳다는 사실을 내세워 밝히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이 옳음을 나타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의 옳음이 무엇입니까? 돈을 훔친 적도 없고 은잔을 훔친 적도 없으며 제값 주고 양식을 사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들의 정직이요 옳음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옳음을 왜 제했습니까? 제값 주고 사간 양식으로는 칠 년 기근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옳음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돈이 있으니까 양식을 사갈 수 있지만 돈이 바닥나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은 사망입니다. 자신들의 옳음을 가지고 사는 결과가 사망을 가져다주는데, 그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오히려 옳음을 내세울 수 없고 정직을 나타낼 수 없어서 답답해하고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그들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옳음이 제해지지 않으면 형들도, 그 가족들도 다 죽습니다. 옳지만 그 옳음을 가지고는 칠 년 흉년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서 옳음을 제하고 형들을 자신에게 속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옳음이 버려진 요셉
요셉이 형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신 또한 옳음을 버리는 과정을 거쳐서 그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서 옳음을 제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37장 2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요셉 역시 옳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옳은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지내다가 가정 총무가 되어 살 만하니까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여자가 옷을 잡고 유혹하기에 옷을 벗고 도망쳤는데, 여자가 ‘요셉이 나를 겁간하려고 왔다가 내가 소리치니까 옷을 버려두고 도망했다’고 죄를 요셉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요셉은 결국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때 요셉의 마음이, 지금 형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무슨 설명을 하오리까? 어떻게 나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를 유혹했고, 자기는 그 유혹을 뿌리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정직, 요셉의 옳음이 무엇입니까? 그가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로 바르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서 옳은 사람으로 계속 있으면 부모와 형제들과 그 가족들의 생명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그냥 옳은 사람일 뿐이지, 그 옳음으로 생명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의 옳음을 무너뜨리고 감옥에 가게 하셨습니다. 감옥에서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요셉이, 자신들의 옳음을 주장하고 싶지만 주장할 수 없어서 고통하는 형들에게 들려주는 간증이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4~8)
형들이 요셉을 팔았다고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형들 앞서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갔을 때 처음에는 답답하고 억울하고 분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옳음이 보였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뜻과 계획을 가지셨구나!’ 요셉이 하나님의 옳음을 보았을 때 ‘내가 가진 옳음이 더러운 것이었구나!’ 하고 발견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지 않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그냥 옳은 사람으로 살아갈 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나 하나 옳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동안 생명과는 상관없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쓰시기 위해 요셉의 마음에서 옳음을 내려놓게 만드셨습니다.

요셉도, 청지기도 자신으로서는 살 수 없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요셉의 마음에서 옳음을 제했을 때 요셉을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시골 마을의 목동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당시 최고의 문명을 가진 이집트의 총리로 삼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청지기의 마음에서 옳음이 제해졌을 때 요셉이 하고자 하는 일을 청지기를 통해서 마음껏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뜻과 계획은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형들을 다시 데려와서 자신에게 속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마음에서 옳음을 제하고 자신에게 속하게 하려는 이 놀라운 계획을 청지기 스스로는 전혀 행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자신의 옳음을 버렸을 때,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렸을 때 요셉의 뜻과 마음이 그를 통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을 이루는 데 그가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요셉의 청지기도 자신으로서는 살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옳음이 제해져서 하나님 뜻에 이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고 살면 그냥 자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 인생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옳음을 버리고 자신을 믿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총리로 이끄셨듯이 그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요셉의 마음에서 옳음을 제하는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 마음에서 옳음을 제하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옳음은 한 쪽에서 보았을 때 옳지, 온전히 옳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 아무리 옳아 보여도, 우리 생각에 아무리 맞아도 옳음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가 보기에 옳은 것, 내가 생각할 때 선한 것, 그런 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어떤 옳음이든지 가지고 있으면 그 옳음이 불행과 저주를 가져옵니다. 성경에서 옳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해진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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