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안에서 서로를 받아 대화하고 교류한다면
믿음 안에서 서로를 받아 대화하고 교류한다면
  • 글 | 홍오윤(기쁜소식강릉교회 목사)
  • 승인 2019.10.2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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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호 기쁜소식
신앙과 마인드
행복한 부부1

사람이 삶을 살면서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여러 가지 있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사업을 잘해서 부와 명예를 얻거나 잃었던 건강을 극적으로 회복하는 일 등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특히 더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결혼 생활이 오래가지 않고 이혼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우리나라 부부의 이혼율이 30퍼센트를 넘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와 체면 때문에 무늬만 부부인 사람들이나 별거 중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
사람들이 이혼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 성격 차이가 문제될 수 있을까? 세상에서 성격이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의 성격이 다른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이나 아내를 하나님이 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가지고 살았던 남성관과 여성관을 깨트려야 한다. 그런 사람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다.
서로를 알아가며 조화를 이루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대화를 통한 교류다. 처음에는 서로 옳다는 생각으로 각을 세우고 다투고 싸우기도 하지만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 서로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마음도 보이고 상대방의 마음도 보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폭이 훨씬 넓어진다. 내가 가졌던 마음이 매우 이기적인 것도 알게 되고, 부부 사이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유치한 자존심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런데 아내와 남편이 시간을 두고 인내로 서로의 마음을 더듬어 알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또는 자존심 때문에 대화의 창을 닫아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마음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대화로 교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마음을 닫아놓은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잘하려고만 하면 점점 힘들고 지치고 피곤해진다.

다윗의 마음을 알지 못한 요압
대화와 교류가 없어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요압과 그 함께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혹이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가로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삼상 3:22~27)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 다윗과 평생 함께했다. 그런데 그의 삶은 불행하게 끝났다. 왜 그랬을까? 사울이 죽은 뒤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나라가 이미 다윗에게 넘어간 사실을 깨닫고 나라를 다윗에게로 돌리려고 항복하러 찾아왔다. 다윗이 가만히 들어보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사이가 이상한 방법으로 벌어진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윗은 기뻤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가 480년 가까이 지나가는데도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아직 짓지 못했는데, 이제 이스라엘이 통일되면 성전이 지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나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과 행복을 온 세상에 알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항복하러 온 아브넬을 기꺼이 용서하고 받아주었다.
하지만 요압은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사람이라는 개인적인 감정과 사사로운 생각에 잡혀서 아브넬을 다윗 몰래 다시 불러서 죽이고 말았다. 만약 요압이 다윗과 마음에 교류가 있어서 “왕이여, 내 동생을 죽인 아브넬을 왜 받아주었습니까? 조금 섭섭합니다.” 하고 마음을 표현했다면 다윗이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요압 장군! 나도 개인적으로는 아브넬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평생 사울과 함께 나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제 전쟁 없이 통일이 되면 성전이 빠르게 지어질 것이고, 백성들이 성전에 나아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다스려 주심으로 복을 받는 일이 온 세계에 전해지는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일어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일 앞에 우리 생각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 마음을 다 지워버립시다.”
그러면 요압은 부끄러워하며 자기 마음을 버리고 다윗과 마음을 합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은 전쟁에서 싸움은 잘하는 사람일지 몰라도 교류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윗이 마음으로 받은 아브넬을 죽였고, 다윗이 용서한 압살롬을 죽였고 다윗이 세운 아마사를 죽이면서 다윗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다.

자신을 믿은 요압의 결국
오늘날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 같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경험과 지식과 판단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도 의미가 없다. 요압이 다윗과 마음의 교류가 있어서 다윗이 용서한 그 마음으로 아브넬과 교제가 되었다고 해보자.
“아브넬! 내 마음으로는 자네를 받을 수 없지만 내가 섬기는 왕이 받으니 나도 자네를 받아들이겠네. 하지만 좀 섭섭하기는 해. 자네, 왜 그때 내 동생 아사헬을 죽였는가?”
“요압!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자네 동생 아사헬을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 여러 번 아사헬에게 ‘나를 쫓지 마라.’ 이야기해도 아사헬이 발 빠른 것 하나 믿고 끝까지 나를 뒤쫓아 오는데, 내가 만일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창의 앞쪽으로 내밀지 뒤끝으로 내밀었겠는가? 기절만 시키려고 창의 뒤끝으로 내밀었는데 아사헬이 너무 빨리 달려오는 바람에 그만 그렇게 죽게 된 걸세.”
요압이 이 말을 듣고 ‘아! 그랬구나. 동생 아사헬의 교만이 죽음을 불렀구나. 진정 아브넬은 죽일 마음이 없었구나.’ 하며 오해가 풀렸을 것이다. 그러나 교류가 없는 요압인지라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겨 자기가 섬기는 왕까지 틀렸다고 판단했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은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똑똑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사탄이 자존심을 세우게 하여 극한 대립으로 이끈다
그리스도인은 결혼할 때에 서로의 조건을 따지거나 살피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남편과 아내라는 믿음과 사랑으로 결혼하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이 있으면 조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이 오히려 신앙의 진보와 복음의 진보를 가져다준다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소망이 있기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큰 것을 잃고만다. 아내가 나를 위해서 말하는 것인데도 사탄은 자존심이나 감정을 개입시켜서 자기를 무시하고 가르친다고 오해하게 해서 과격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한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인내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방의 마음이 보이고 느껴진다.
나도 결혼하고 15년쯤 지나서야 ‘아, 아내가 이런 마음이었구나.’ 하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아내의 마음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삶이 굉장히 다른 것을 본다. “여보! 이런 이야기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없어요. 아내만 해줄 수 있는 이야기예요. 내가 당신을 무시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어준 하나잖아요. 결국 당신이 잘되어야 나도 잘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아내의 말을 듣고 보면 합당하고 맞는 이야기인데, 사탄이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자존심을 세우게 해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극한 대립으로 이끈다. 그러면 이상한 마음이 생긴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을 힘들게 하려고 연구하면서 마음이 한없이 좁아진다. 말하기도 유치한 생각이니까 더욱 말을 못 하고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어색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 사이에 이상한 벽이 생긴다.
어느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여덟 마디 말만 할 수 있으면 이혼을 70퍼센트 줄일 수 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단 몇 마디인데도 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부부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관계다. 마음을 닫아야 할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마음의 공간을 어느 정도는 내어줄 줄 아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마음의 대화로 서로의 사랑이 확인되면 평안하고 행복하다. 사람은 자기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가장 행복하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연약할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해 불행하게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그런 사랑을 주셨고, 그 사랑으로 결혼했는데, 생각이나 감정이 앞서서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구원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이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못나고 허물 많은 죄인인 자신을 예수님이 먼저 받아주고 의롭게 해주신 사실이 그 마음에 감사와 믿음으로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며, 그 믿음이 서로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용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죄와 허물이 많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음같이 부부도 믿음 안에서 서로를 받아 대화하고 교류한다면 결혼 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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