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만에 만난 김종용 형제
55년 만에 만난 김종용 형제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9.10.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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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호 기쁜소식
땅끝까지 복음을, 끝날까지 주님과 _237회 | 박옥수 목사 간증

“목사님, 저 김종용 형제입니다.”
9월 23일부터 3일 동안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창원과 마산과 진해 인근의 성도들이 모여 전도 집회를 가졌는데, 집회 하루 전날 전화가 걸려왔다.
“목사님, 저 김종용 형제입니다.”
1964년, 내가 장팔리교회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장팔리는 읍내에 있는 장에서 8리 떨어졌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읍내와 교회 중간쯤에 두 소년이 살았는데, 김종용 형제와 심재열 형제였다. 당시 김 형제가 열여섯 살, 심 형제가 열아홉 살, 그리고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니 전에 장팔리교회에 나온 적이 있었다고 해서,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날 두 사람이 구원을 받았고 함께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직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두 형제 모두 양장점에서 보조 일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단추를 달거나 잘못 단 단추를 따거나 하는 일을 했다. 형제들이 일을 마치고 교회에 오면 12시가 되었는데, 힘들게 일한 형제들에게 1시까지 성경을 읽으라고 했다. 형제들은 성경을 읽고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가는 생활을 했다. 나는 11시에 자서 새벽에 일어나 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때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두 형제를 시작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일어났다. 장팔리에 1964년 4월부터 1965년 10월까지 1년 반 정도 있었는데, 장팔리를 떠날 때에는 40여 명의 형제 자매들이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다. 우리는 저녁마다 모임을 가졌고, 보통 10~20명이 모였다. 우리는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하고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부르고, 돌아가면서 간증을 다 하고, 이어서 내가 말씀을 전했다. 말씀을 마치고는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임을 마치면 열 시가 조금 넘었는데, 대부분 읍내에서 왔기에 자전거 한 대에 두세 명씩 타고 읍내로 갔다. 나도 자전거에 두세 명을 태우고 가서 내려주고, 캄캄한 밤에 혼자 자전거 페달을 밟아 돌아오면서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아서 군대에 가기가 싫었다.
두 형제는 하나님을 무척 사랑했다. 그런데 내가 군에 갔다 제대하고 오니 김종용 형제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이어 다른 사람이 교회를 인도했는데, 심 형제는 교회에 있었지만 김 형제는 교회를 떠나 너무 섭섭했다.
그런데 55년 만에 김종용 형제가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너무 반가웠다. 나를 찾고 싶어서 압곡동교회에 찾아가니 거기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기쁜소식거창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목사님이 김종용 형제가 합천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쁜소식합천교회의 목사님을 김 형제에게 보내 우리 교회와 다시 연결이 되었고, 교회에서 내 전화번호를 물어 나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행복한 만남, 복된 전도집회
창원 컨벤션센터 집회가 시작되던 9월 23일, 새벽 여섯 시에 출발해서 금산에 사는 한 형제를 만나 꼭 필요한 상담을 한 뒤 아침을 먹고 바로 합천으로 향했다. 합천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되어 김 형제를 만났다. 55년 만에 만나니까 너무 행복했다. 우리는 서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열여섯 살에 보았는데, 이제는 일흔한 살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얼굴이 통통했는데 약간 마른 것이, 병과 씨름하며 운동을 많이 해서 얼굴이 갸름해졌다고 했다.
우리는 합천교회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김종용 형제 내외와 함께 내 차를 타고 창원으로 가서 저녁을 먹은 뒤, 교회 형제들과 간증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 형제 내외는 첫날 집회를 마치고 합천으로 돌아갔고, 집회를 하는 동안 내 마음은 장팔리교회에 가 있었다.
집회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컨벤션센터에 찾아왔고, 개인적으로 상담하는 시간도 참 좋았다. 한 부인은 정상적이지 못한 아들 때문에 무척 고통스럽게 사는데, 그분 집이 기쁜소식마산교회와 가까워서 내가 말한 대로 오후 5시쯤 아들을 데리고 교회로 찾아왔다. 나는 그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아들을 고치실 거라고 마음에 믿음을 넣어준 뒤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돌아갈 때 아들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기도하면 아들이 나을 거라고 내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고 그 부인도 기뻐하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55년 전 장팔리로 돌아가면
내가 압곡동과 장팔리에 있었을 때 기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나와 함께 계셨다. 장팔리교회에서 춥고 배고프고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런 기억은 나지 않고 감사한 일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주일이면 예배를 마치고 거창경찰서 유치장에 가서 재소자들에게 말씀을 전했던 일, 장날이면 시장에 가서 전도했던 일, 곰실이라는 동네에 불이 나 온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우리 형제가 머슴으로 일하던 집에 내가 들어가서 양식을 마당으로 다 옮겨 주인 아저씨가 고맙다며 형제를 농사일이 바쁘지 않을 때에는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해준 일…. 생각할 수 없었던 수많은 복음의 역사들이 있었다.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면서 모든 것을 채워 주셨다.
내가 군대에 가기 전 송별 모임을 가지면서 김종용 형제가 “오늘은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습니다.” 하면서 말을 꺼냈다. 한번은 고구마 장사가 김 형제에게 두 관은 안 되고 한 관 반은 넘는 고구마를 마지막 떨이라고 한 관 값만 받을 테니 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돈이 없고 전도사님에게 가지고 가면 살 것 같아서 고구마를 들고 교회로 왔는데, 내가 “김 형제, 너무 감사하네. 고구마가 먹고 싶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주셨네.” 하면서 얼른 받더라는 것이다. 말도 못 하고 고구마 값 갚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함께 지낸 시간들이 정말 감사했다.
55년 전 장팔리로 돌아가면 너무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그들이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미국 사람들 마음에 죄 사함을 선물할 수 있다면!
지금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칸타타 순회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특별히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책 10만 권을 관객들에게 무료로 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감동하고, 책을 받아 기뻐하며 집에 가서 읽고 죄 사함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기쁘기 그지없다. 10만 권이면 40톤이나 되기에, 순회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3분의 1씩 나눈 뒤 큰 트레일러에 싣고 동부와 서부와 중부 3개 지역의 칸타타 공연 장소들마다 찾아가 책들을 나눠주었다. 하루에 열 시간, 열두 시간씩 운전했는데, 내 아들도 팀원이 되어 트레일러 한 대를 운전했다고 했다. 아들에게 “피곤하지 않았냐?”라고 물으니 “아버지, 생명을 전달하는 일인데요.” 하면서 행복해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공연을 관람한 수많은 관객들이 책을 받고 기뻐하며 소중이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고 복음도 전해준 나라다. 그런 미국을 위해 우리가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 미국 사람들 마음에 기쁨을 주고, 그들 마음에 죄 사함을 선물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울까!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 흑암과 혼돈과 공허를 물리치고 아름다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다. 초라한 오막살이에 사는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이 어둠을 내쫓고 빛을 주신다. 누구든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면 마음이 밝아지고 행복해지는 이 사실이 너무 신비롭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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