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는 없었던 빛과 소망이 들어왔다
내 인생에는 없었던 빛과 소망이 들어왔다
  • 타일러 무디(기쁜소식밴쿠버교회)
  • 승인 2019.11.11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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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캐나다에 있는 원주민마을에는 소망이 없어 술과 마약을 의지하며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이 많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타일러 무디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술과 마약과 도박에 중독된 부모님과 살았고, 자신도 10여 년을 술과 마약에 빠져 살았다. 그런데 밴쿠버 교회 홍상수 선교사를 만나고, 월드캠프에 참석해서 구원받은 후 그의 인생에 빛과 소망이 들어왔다.

 

나의 십대 시절은 어둡고 우울했다
나는 스물두 살이고, 캐나다 매니토바 주州의 톰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세 살 때 할머니가 계신 지금의 넬슨하우스로 이사 왔다. 우리 가족은 술과 마약과 도박 때문에 비참했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부터 마약과 도박에 중독되셨고, 어머니는 6명의 아이를 낳고 4년 후 술을 마시기 시작해 알코올에 중독되셨다. 아버지는 지역 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지원해 주는 돈으로 반은 어머니에게 주고 반은 마약을 사는 데 사용하셨다. 내가 어릴 때에는 형과 누나가 우리를 돌봐주었지만, 내가 열한 살쯤이었을 때 우리는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를 도저히 돌봐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게 기도하는 법과 요리하는 법 등을 가르쳐 주셨고, 친할머니는 국을 끓이는 방법과 빵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바느질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부모님은 술과 마약 때문에 자주 경찰서에 왔다갔다하셨다.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러 오신 적이 있었지만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집밖으로 내쫓으셨다.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셨다.
1년 후 우리는 다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갔다. 형과 누나도 아버지처럼 술과 마약에 취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 대로 빵을 만들고 청소를 했고, 아침에는 동생들을 깨워서 학교에 보냈다. 내가 열네 살 때 부모님의 중독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어느 날은 두 분이 심하게 싸워 경찰서에 가셨고, 우리는 잠시 보호소에 맡겨졌다. 얼마 뒤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는 우리를 돌보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부모님은 이혼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원망했다.
나의 십대 시절은 어둡고 우울했다. 어머니를 도와서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동생들에게도 내가 배운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을 뿐, 그 상황을 이겨낼 힘은 내게 없었다.

담배, 술, 마약, 그리고 자살 시도
내게도 유혹이 찾아왔다. 열네 살 때 친구들이 모인 곳에 갔다가 한 친구가 얼굴에 담배를 들이대는 바람에 한 대 피웠는데 그때부터 담배에 빠져들었다. 어머니의 담배도 훔치고, 돈도 훔쳤다. 담배가 없으면 땅에 버려진 담배꽁초까지 주워 피우기까지 했다. 일 년 뒤에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주로 공원과 야구장 같은 야외에서 술을 마셨다. 점점 술이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미성년자음주법에 걸려 감옥에도 몇 번 들어갔다. 1년 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공부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갔고, 내가 진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비참해졌다. 내가 집안일을 돕지 않아 엉망이 된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도 나는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술과 마리화나가 나를 끄는 힘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열일 곱 살이었다. 한번은 아주 추운 겨울밤에 스무 명과 술을 마셨다. 절반은 미성년자였다. 나는 술에 취했고, 얼어 죽고 싶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갔다. 그때 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한 친구가 나를 찾으러 나와서 호숫가에 쓰려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깨웠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있으면서 구름이 걷히고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얼마 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갔다. 가족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날 친구가 나를 깨우지 않았다면 얼어 죽었을 것이다.
또 다시 자살을 시도했다. 어느 날은 혼자 술을 마시다가 너무 슬프고 우울했다. 순간 나는 부엌에 가서 칼을 들었다. 얼마 뒤 어머니와 동생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 내 손에 있는 칼을 빼앗고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통증 때문에 깨어났는데, 어머니가 내 옆에 있었고, 왜 이런 짓을 했냐고 소리치며 우셨다. 나는 자주 우울하고 슬펐다. 그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몰랐다.

사촌동생의 죽음
어느 날 아침 나는 교회에 가기로 결심했다. 나 자신을 바꾸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술과 마리화나를 끊었다. 운동도 시작하고 건강을 위해 식사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조깅을 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갔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성경공부도 했다. 성경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운동을 마치고는 방에서 책을 읽고 잠자기 전에 기도했다. 내 삶이 바뀌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스물 한 살 때 사촌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열아홉 살이었고,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이모 집으로 가서 보니 이모는 충격을 받아 울고 계셨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동생 역시 술과 마약을 하고 있었고,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너무 슬펐다. 이모는 그 뒤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셨고, 나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해 2주 동안 미친 듯이 다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세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사촌동생처럼 방에서 죽으려고 했다. 그때 알 수 없는 뭔가가 나를 멈추게 했다. 내 삶은 술과 마약으로 다시 돌아갔다.

스프링필드 월드캠프에 가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몰래 마약을 했다. 주유소 계산원으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누나가 친구와 LA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나도 가고 싶어 따라갔다. LA에 가서 내가 그동안 고립되어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볼 것도 많고, 음식도 다양했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놀랐다. 정말 멋진 10일간의 여행이었다. 고립된 넬슨하우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면 다시 술과 담배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LA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6개월이 지났다. 한 친구가 IYF(국제청소년연합)라는 모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3년 동안 IYF에서 LA와 뉴욕을 여행했다며 곧 스프링필드에도 갈 거라고 했다.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마음이 끌렸다. 모아놓은 돈도 있었고 여권도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나도 가겠다고 했다. 일주일 뒤 IYF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미주리 주의 스프링필드에서 갖는 월드캠프를 소개받았다. 그때 오신 분이 밴쿠버교회 홍상수 선교사님이셨다. 나는 여권 발급 사무국에 연락해서 좀 더 서둘러 주기를 부탁했다.
8월 3일 드디어 IYF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스프링필드로 떠났다. 스프링필드까지는 24시간이 걸렸다. 무척 기대가 되었다. 우리는 도착해서 단체로 접수했다. 진행자의 지시를 따라 휴대폰에 몇 가지 앱을 설치했고, 2주간의 일정표와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을 전달받았다. 내가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하루 일정이 새벽 5시 30분에 시작해서 밤 11시까지였다. 우리는 시간을 엄수해야 했고, 모임 장소를 무단으로 이탈해도 안 되었다. 그리고 5시 30분에 기상한 후 아침 7시 30분까지 성경을 읽고,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한국어 수업을 듣고, 공연을 보고, 마인드강연을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오후에 여러 가지 활동에 참가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공연을 보고 마인드강연을 듣고, 그룹별로 10시 30분까지 교제했다.
한 주를 보내면서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주위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인사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온 목사님들과도 이야기했다. 그때 사귄 친구들과는 지금도 SNS나 전화로 연락하며 지낸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셨다
2주차 일정은 비슷했고, 다양한 취미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룹별로 목사님과 상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자랐는지, 어떻게 마약과 술에 중독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지은 죄들도 이야기했다.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들을 받았는지도 이야기했다. 한 목사님이 여러 성경 구절을 찾아서 읽어주셨다. 낯설게 느껴졌다. 목사님은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이 하신 일만 주목하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성경에서 여러 말씀들을 찾아서 보여주셨다. 그러고는 나에게 죄인인지 의인인지 물으셨다. 나는 죄인이라고 답했다. 그동안 내가 지은 죄들과 내 모습을 보면 죄인이 당연했다.
캠프 셋째 날, 목사님이 내게 다시 말씀을 전해주셨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생각이 어떠하든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술을 마시고 감옥에도 몇 번 갔었고, 담배와 마리화나를 피우고, 돈을 훔치고, 내가 사는 도시에 해를 끼친 죄인이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그 모든 죄가 씻어졌고 내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결정해야 했다. 내 생각을 믿을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지. 목사님이 다시 물었을 때 나는 말씀을 선택했다. 그리고 의인이라고 대답했다. 나 같은 죄인이 의인이 된 것이다. 기뻐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행복했다.
내가 의롭다는 진리를 받아들인 후 마음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동안 원망했던 부모님을 용서했다. 특히 더 미워했던 아버지에게도 마음이 열려 전화를 드렸다.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음이 열렸다. 월드캠프를 바라보는 마음도 달라졌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고 싶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시간이 좋았다.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이 새롭게 들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알아갔고, 하나님의 세계를 더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구원받은 다음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목사님에게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말씀을 전해주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내게 힘을 주실 거라고 했다.
월드캠프 프로그램은 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캠프에 참석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시간을 지키고, 규칙을 준수하고, 많은 사람들과 단체로 생활하고…. 그리고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 넬슨하우스에서는 내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였다. 월드캠프에서는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마음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구원받은 후 나는 새로워졌다. 늘 슬프고 어둡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내 인생에는 없었던 빛과 소망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월드캠프가 끝나고 원주민 학생들은 시카고로 갔다. 그곳 또한 처음 가본 곳이었다. 쇼핑도 하고 이발도 하고 새로운 음식도 먹었다. 그날 밤 우리는 뉴욕으로 이동했다. 뉴욕 월드캠프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훈련을 받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인도를 받고 일정을 따르고 시간을 지켜야 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유의 여신상 등도 보았다.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
뉴욕 일정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월드캠프에 참석하여 느낀 점들을 묻는 설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해외봉사를 가고 싶은 사람은 지원하라고 하여 나도 지원했는데 멕켄지라는 여학생과 내가 가게 되었다. 놀라운 기회였다. 우리는 집으로 갔다가 다시 밴쿠버교회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과 함께한 최고의 시간
9월 2일, 밴쿠버에 도착했다. 교회에 가자 그라시아스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합창단은 무려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한다고 했다. 밴쿠버도 그 가운데 한 도시라고 했다. 규모가 큰 공연으로, 공연에 시민들을 초청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단기선교사 3명, 멕시코에서 온 1명, 원주민 1명과 함께 한 달 동안 밴쿠버에서 머물면서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우리의 하루 일정은 이러했다. 새벽 5시 혹은 6시에 일어나서 밴쿠버 시민들을 공연에 초청하는 내용을 담은 ‘Dear Neighbor(이웃에게)’ 편지 작업을 했다. 작업을 어느 정도 한 후에는 그 편지들을 들고 나가 8시까지 집집마다 다니며 배달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청소하고 정리한 뒤, 다시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밴쿠버 시내를 동서남북으로 나눠서 편지를 배달했다. 5시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다시 편지 작업을 했다. 한 달 동안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마치 대가족이 된 것 같았다. 때론 피곤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행복했다. 편지 작업을 하면서 이야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찬송도 부르고…. 새롭고 즐거운 경험들이 정말 많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내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밴쿠버에서 갖는 세 번째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은 정말 놀라웠다.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한국에서 온 아름다운 합창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홍상수 선교사님이 무척 감사했다. 공연이 있던 날에는 공연 전에 가진 기독교지도자모임(CLF)을 도왔고, 공연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죄에서 벗어났다’ 책도 전달했다. 이 모든 일이 복음을 위한 일들이기에 정말 가치가 있었다. 그라시아스합창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공연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캐나다로 돌아오면서 내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밴쿠버 공연이 끝나고, 홍상수 선교사님은 나와 다른 원주민 학생을 미국의 네 개 도시에서 갖는 공연에도 데리고 가셨다.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피닉스. 밴쿠버가 아닌 다른 도시에 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10일 동안 미국에서 그라시아스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의 자원봉사자가 되어 함께했다. 정말 감사했다.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 각 도시에 가서도 똑같이 새벽 5시 일어나서 편지 작업을 하고 편지를 모아서 집집마다 배달했다. 공연에 초대된 많은 목회자들과 젊은이들과 시민들과 시장님 등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나를 차별 없이 대했다. 내가 캐나다 원주민 마을에서 왔다고 하면 놀라워했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자원봉사를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오면서 내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홍상수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동행한 멕켄지와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세 사람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척 행복했다.
나는 내가 밴쿠버에서 지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 삶은 너무 외롭고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들로 꽉 차 있었기에, 고향 마을을 떠나 먼 곳에 사는 것이 두려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제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금요일마다 나가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며 파티를 하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

어둡고 우울한 인생을 멈추게 하고 새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
밴쿠버로 돌아온 후에도 교회에서 아침 6시 30분까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교회 형제 자매님들도 만나며 지내고 있다. 내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다. 나는 IYF에 대해서 전혀 몰랐지만 IYF 사람들은 내가 사는 먼 곳까지 나를 찾아와 주었다. 나는 7남매 가운데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야 진정한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직 스물두 살이지만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열다섯 살에 담배를 알았고, 열여섯 살부터 술을 마시고, 열일곱 살에 마리화나를 피웠고, 스물한 살에 다른 마약을 시작했다. 자살을 세 번 시도했고, 죄를 짓고 항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았으며, 과거의 좋지 않은 일들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우리를 떠나셨고, 나는 어머니가 동생 넷을 키우는 것을 도와야 했다. 어둡고 우울한 인생을 멈추게 하고 새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 한없이 감사하다. 내가 변한 모습을 보고 큰형은 내가 자신의 롤모델이 될 거라고 했다. 우리 가족, 우리 마을도 나처럼 변할 것이다.
나는 11월까지 밴쿠버교회에서 지내고 이후에는 단기선교사로 한국에 갈 예정이다. 한국에서 1~2년 정도 봉사하면서 신앙을 배우고, 내게 필요한 훈련들도 받고, 필요한 아이들이 있으면 영어도 가르치면서 지내려고 한다. 내가 살던 마을을 떠나 밴쿠버에서 지낸 것이 놀랍고, 미국의 도시들을 다니면서는 더 놀라운 경험을 했는데, 이제는 한국으로 간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펼쳐지는 내 인생이 신기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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