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을 가로막는 옳음
연합을 가로막는 옳음
  • 김재홍(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19.11.1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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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제6편)

압살롬의 옳음이 무너질 때…
압살롬은 자신의 옳음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고 다윗을 죽이려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압살롬은 옳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고 그 옳음이 커지니까 다윗의 대적이 되고 반역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 나가는 군장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삼하 18:5)
다윗이 왜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했습니까? 압살롬은 늘 옳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옳음을 좇아서 아버지 다윗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받아들여 다윗의 후궁 열 명과 동침하는 악을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대낮에 왕궁 지붕 위에 장막을 치고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동침하러 들어갔습니다. 압살롬은 누이동생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마음에 옳음이 들어와서 다윗을 대적했는데, 자신이 저지른 죄는 암논이 저지른 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전쟁에서 패하고 옳음이 무너질 때, 그의 옳음이 끝날 때 압살롬과 연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이 늘 옳음을 가지고 살면서 아버지 다윗과 한 번도 연합하지 못하고 다윗의 마음을 흘려 받지 못했는데, 전쟁에 패하고 압살롬의 옳음이 끝나면 다윗과 연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맛본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나타내고 압살롬에게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맛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연합을 방해하고 사망을 불러온 요압의 옳음
옳음을 가지고 다윗과의 연합을 방해하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경에 옳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옳음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옳음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옳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요압입니다. 요압의 옳음이 다윗과 압살롬이 연합하는 것을 깨트립니다.
요압은 자신의 옳음을 좇아서 아브넬을 죽이고 아마사를 죽였으며, 사무엘하 18장에서 압살롬까지 죽입니다. 당시 요압은 압살롬을 생포할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머리숱이 굉장히 많아서 전쟁 중에 노새를 타고 상수리나무 아래로 지나가다가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노새는 빠져나가고 압살롬만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그것을 발견하고 요압에게 보고하자, 요압이 ‘왜 당장 쳐서 죽이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병사가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라고 하자, 요압이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압살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창으로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 것은 요압의 옳음입니다. 그의 옳음이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찌르게 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전쟁에서 패하고 옳음이 무너져서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연합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그 연합을 깨트렸습니다. 평생을 옳음 속에서 지내며 그것 때문에 불행하게 산 압살롬이 이제야 옳음이 끝이 나서 다윗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요압이 그 연합을 깨트려버린 것입니다.

다윗의 애통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다윗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압살롬이 행한 짓으로 따지면, 자식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죽어 마땅한 아들이니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안타깝게 여기고 넘어갈 일인데,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은 왜 이렇게 애통해합니까? 암논이 죽었을 때에는 압살롬의 경우처럼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애통은, 압살롬이 전쟁에서 패해 옳음이 끝나고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다윗과 연합할 수 있었는데, 그 만남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맏아들의 옳음
이와 같은 이야기가 성경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옵니다. 자신이 옳다는 마음과 자기를 믿는 마음 때문에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간 둘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는 사무엘하 18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와 결말이 다릅니다. 사무엘하 18장에서는 슬픈 결말이고 누가복음 15장은 행복한 결말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다 망하고 실패하고 자신이 옳다는 마음이 다 무너져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자신이 가지고 간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지내며 다 허비하고 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오는 탕자를 먼저 발견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눅 15:20)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감사한 것은, 형을 먼저 만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형을 먼저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결과가 압살롬과 같았을 것입니다. 형이 “이놈아! 네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지내며 다 없애고 무슨 낯짝으로 집에 돌아와? 당장 떠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먼저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먼저 만나니까 아버지가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3~24)
이처럼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때 맏아들이 밭에서 돌아옵니다. 맏아들이 집에 가까이 와서 잔치 소리를 듣고는 한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도련님의 동생이 돌아와서 주인님이 동생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 동생이 돌아왔다고? 어떤 모습으로 왔느냐? 성공해서 왔느냐?”
“아닙니다.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을 만큼 상거지 꼴로 돌아왔습니다.”
“뭐라고? 그런데 아버지가 그런 놈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어?”
맏아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잔치 자리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자고 권하자 맏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마음이 연합되어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를 즐기고 있는데, 맏아들은 동생을 정죄하며 그 연합을 깨트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큰아들의 정죄를 아버지가 친히 막아 줍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옳음을 가진 요압이 없었다면 다윗도 누가복음 15장처럼 압살롬을 맞아서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깨져서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다윗이 ‘이제야 압살롬과 연합할 수 있겠구나!’ 기대했는데, 요압의 옳음이 그것을 깨트려버렸기에 다윗은 압살롬으로 인하여 애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간의 옳음이 바닥나야
하나님은 인간이 괜찮은 사람, 잘하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서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한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어 옳음이 다 무너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겨 옳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열심히 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깨트립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방해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불법을 사함 받고 죄를 가리움 받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하는 자들은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마땅히 받아야 할 빚으로 여기지만, 일하지 않고 경건치도 않은데 ‘네가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나에게는 옳음이 없고 의가 없어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0~14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인간에겐 완전한 의가 없고 인간의 의는 하나님이 보실 때 더럽고 악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말하길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인간은 쓸어버림을 당해야 할 자들이요, 하나님이 지었음을 한탄할 정도로 악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악한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거룩함을 얻었을 뿐 아니라, 히브리서 10장 14절에서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것, 이것이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압살롬은 반역자요 패역한 자로 죽여야 할 자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 또한 한 제물로 영원히 온전케 된 자입니다. 허랑방탕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한 탕자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 또한 영원히 온전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볼 때나 다른 사람을 볼 때, 인간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 시각으로 볼 때에는 수많은 옳음과 그름이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두 가지 사실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온전히 악하다는 사실과 그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두멍 신앙, 손거울을 제하다
지난 7월호에서는 ‘번제단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13장으로 넘어가면서 번제단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제단 앞에서 자신이 잘한 것과 잘못한 것 다 불태워지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인데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상관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성막에서 번제단을 지나면 물두멍이 나옵니다. 물두멍은, 제사장이 번제를 드리고 난 뒤 물두멍에 있는 물을 떠서 손발을 씻는, 물을 담아놓은 큰 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사장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고 또한 백성들의 죄를 씻는 속죄 제사를 드렸다 할지라도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 물두멍은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이 쓰던 놋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거울은 자기 모습을 비춰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 거울을 물두멍을 만들기 위해 드렸다는 것은 자기 손에 들고 있던 거울을 제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비춰보던 거울을 제했다는 것은 그 거울에 비춰지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거울로 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거울에 나를 비춰 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중간에 요압이 압살롬을 죽여 버렸습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자기 거울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의 옳음’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늘 옳고 그르고를 나눕니다. 하나님은 그 옳음을 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내 눈으로, 내 옳음으로 나를 보는 것도 제하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를 보든지 하나님의 거울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거울로 보면, 성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저가 한 제물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뿐 아니라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에게도 인자와 긍휼을 나타냈습니다. 다윗이 누구에게든지 은혜와 긍휼을 베풀었던 것은, 자신의 거울에 비춰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울에 그들을 비춰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배워 보십시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거울로 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거울, 가기의 기준을 아직 제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어딜 가나 시시비비가 생기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잘못한 사람이든지 영원히 온전케 되었습니다. 자신의 거울, 자신의 옳음을 제하고 하나님의 거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고 자기의 옳음이 제해져서 주님과 함께 복된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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