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이것은 시작일 뿐, 앞으로 더 많은 축복을 주실 거야
[라이프] 이것은 시작일 뿐, 앞으로 더 많은 축복을 주실 거야
  • 맥켄지 파파니키스(캐나다)
  • 승인 2020.04.16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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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대인기피증, 자살충동, 마약중독, 무기력한 일상. 캐나다 원주민 마을에서 맥켄지의 삶의 모습었다. 소망 없던 그의 인생을 하나님이 완전히 바꾸셨다. 그녀는 지금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믿음을 배우고, 미래 원주민 마을을 이끌어 갈 행복한 청년이다.

 

외톨이로 지낸 어린 시절
나는 1999년 캐나다 위니펙에 있는 ‘노르웨이하우스’라는 원주민 마을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나는 모기 알레르기가 있는 수줍고 조용한 아이였다. 알레르기가 사라진 열 살까지 나는 주로 실내에서 지냈는데, 영화와 TV를 보면서 외톨이로 지냈다. 
아빠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우리도 아빠처럼 믿음을 갖길 원하셨다. 아빠는 항상 성경에 대해 이야기해주셨고, 당신이 아는 몇몇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지옥은 존재한단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다시 오실 거야. 자살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지옥에 간단다.” 아빠가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 아빠는 술과 마약에 중독되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집에 오실 때마다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다. 그때마다 엄마는 울고 소리를 지르셨다. 내가 어렸을 때여서 나는 엄마가 왜 그러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은 경찰이 와서 아빠를 데리고 갔다. 엄마가 경찰에 신고하여 체포되신 거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빠를 보지 못했다. 그 일로 나는 ‘아버지의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빠가 술과 마약을 하면서 엄마도 교회와 멀어지고 도박과 술에 중독되셨다. 나는 항상 다른 보모를 만나야 했다. 좋은 보모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보모도 있었다. 엄마의 친구 아들이 나의 보모인 적이 있었는데 그가 나를 성추행했다. 그때부터 나는 낯선 남자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아빠는 가끔 집에 오셨지만 곧 떠나셨다. 아빠와 엄마의 만남은 평화롭지 못했다. 싸움은 보통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내며 동생을 데리고 나가는 것으로 끝났다. 아빠는 엄마를 만난 것을 후회하고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다며 화를 내셨다. 나는 아빠의 말을 들을 때면 나를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질책했다.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와 아빠 모두 더 행복했을 텐데. 나는 나쁜 년이야.’ 나는 부모님이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번은 용기를 내어 도망치다가 바닥에 엎어졌다. 나는 내적 고통과 외적 고통을 동시에 느끼며 울었다. 옆집 할머니 댁의 세탁실로 가서, 울면서 세탁실에 있는 표백제를 마시고 내 인생을 끝내고 싶었다. 그때 아빠가 하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살하는 사람은 곧바로 지옥에 간단다.” 나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았다. 나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람들을 멀리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이들은 사촌들과 내 동생이었다. 나는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에 다니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사촌이 항상 나와 함께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함께 놀았다. 우리는 매우 친했다.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술과 마약을 했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항상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름에는 마을의 레크레이션부서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엄마와 남동생은 약을 사야 한다며 돈을 요구했다. 엄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박을 했고, 남동생은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에게 마약을 제공한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다. 나는 차라리 일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열일곱 살에는 나도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기 시작했다. 술과 마약을 하면 마음의 고통과 트라우마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냥 취해서 지내는 것이 좋았다. 남동생은 나보다 더 방탕했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고 나는 동생을 돌봐야 했다. 엄마는 그런 막내아들을 보며 가슴이 무너지셨다. 나는 가능한 가장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가장 약한 사람이었다. 마음의 상처들이 나와 다른 사람을 외면하게 했다.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몰랐다. 단순한 포옹을 받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어색한 사람이 되었다.

IYF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2018년 6월, 내가 일하던 곳에서 밴쿠버에서 온 IYF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그들은 우리 지역에서 원주민 유스 캠프를 열고 싶어 담당자를 만나러 왔다. 나는 전부터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신뢰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외부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지만 최대한 협조하려고 한다. 그때 나는 밴쿠버교회의 크리스티 홍 사모님을 만났는데, 사모님은 나에게 유스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협조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승낙했다. 
유스 캠프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밴쿠버교회의 에스더 정 자매님이 내게 LA에서 갖는 학생 캠프, LA와 뉴욕에서 갖는 월드캠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원주민 유스 캠프를 마치고 떠날 때 내게 LA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가고 싶었지만 동생이 캠프에 참석해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엄마에게 전화해 ‘동생을 IYF라는 기독교 단체를 통해 미국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바로 허락하셨고, 남동생은 LA 학생 캠프에 참석했다. 
동생은 LA에 도착하자마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술과 마약을 하지 않아 금단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동생은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하여, 지내는 것이 힘들다며 캠프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동생의 말을 그대로 믿고 동생이 힘들어하는 것은 다 내 탓이라고 하셨다. 나는 눈물이 났다. 가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그때 다시 자살 충동을 느꼈다. 

자살 충동은 악한 영이 나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나도 캠프에 가고 싶었다. 동생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마침 홍상수 목사님이 8월에 갖는 월드캠프에 학생들을 더 초대하려고 7월 말에 우리 마을에 다시 오셨다. 그때 세 명의 학생들이 참석하기로 했고, 그 가운데 나도 있었다. 처음 참석한 월드캠프는 내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이었다. 불편한 것도 많았지만 캠프에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그때는 말씀을 이해하거나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 말씀에 대해 마음이 열린 시간이었다. 
한번은 박옥수 목사님이 마인드 강연 중에 ‘자살 충동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나는 여러 번 자살 충동을 느꼈는데, 그것은 악한 영이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나는 내가 자살하고 싶어했지만, 실제로 나는 그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캠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지만 3주 일정이 지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삶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집에 돌아와서 캠프를 생각하면 정말 감사했다. 성경을 더 알고 싶어서 혼자 공부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 후로 내 인생은 비참해졌다. 월드캠프가 내게 준 메시지들은 점점 희미해지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았다. 엄마와 남동생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내 물건을 훔치고, 엄마는 그런 남동생 편을 들었다. 남동생의 상태는 갈수록 심해졌다. 피를 흘리면서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 엄마와 나와 싸우기도 했다. 나는 마음이 무너졌고 무기력해졌다. 엄마와 남동생 모두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그냥 잠만 자고 싶었다. 내가 이 모든 상황에서 무감각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을 자는 것밖에 없었다.
1년 후에도 홍상수 목사님이 원주민 학생들을 월드캠프에 초청하려고 다시 우리 마을에 오셨다. 목사님이 ‘월드캠프에 가자. 한국에 가자’고 하셨지만 엄마가 목사님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부담스러웠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 목사님에게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7월에 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코카인과 같은 더 강한 마약을 했다. 내 인생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이상해진 것을 느끼고 내 생일파티 때 “어떻게 하면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니?”라고 물었다. 나는 월드캠프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하자 친구가 100달러를 주었고, 홍 목사님이 참가비의 절반을 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300달러가 더 필요했기에 하나님께 이 삶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돈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비용을 채워주셨고, 나는 캠프에 갈 수 있었다.

내가 의롭게 되었다
2019년 8월, 두 번째로 미국 월드캠프에 참석했다. 정말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같이 간 원주민 학생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행복했다. 나는 모든 아이들이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됐다.
어느 날 LA에서 온 김미애 자매님이 예배당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서 상담을 해주었다. 그녀가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지만 처음에는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이해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말씀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비로소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 나의 죄를 다 씻어주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죄 사함을 받았고 의롭게 되었다. 이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나는 그분을 항상 바라보게 되었다. 너무 놀라웠다.
월드캠프 중에 한번은 홍 목사님이 타일러 무디가 한국에 단기선교를 가기 전에 밴쿠버교회에서 지내려고 하는데, 나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는지 물으셨다. 목사님의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과거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 보기에는 돈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믿음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항상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월드캠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일주일이 지났을 때, 홍 목사님이 ‘위니펙으로 단기선교사들을 픽업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전화하셨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가방을 쌌다. 엄마는 여전히 홍 목사님을 좋아하지 않으셨기에, 나는 먼저 집을 나와서 엄마에게 내가 이미 밴쿠버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엄마는 굉장히 속상해 하셨다. 엄마 눈에는 내가 아직 어렸기에 엄마 곁에 머물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직장을 다니며 가족들을 부양해야지!”라고 하셨다. 엄마는 가능하면 나를 집에 돌아오게 하려고 이런저런 말로 나를 설득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키고 도우실 것을 믿으라고 이야기했다. 
밴쿠버교회에서 타일러 무디와 나는 성경을 읽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밴쿠버에서 갖는 그라시아스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알리기 위해 ‘이웃에게’라는 편지를 만들고 배달하는 일을 했다. 나는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또 나는 게을렀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편지를 돌리는 것이 어려워서 밴쿠버를 떠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울면서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내 마음을 여러 번 꺾게 해주셨다. 그런 순간을 통해 하나님은 내게 능력과 은혜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믿고 혼자서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나는 항상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결국 엄마는 내가 한국에 있는 것을 응원하셨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뒤 나는 한국으로 단기선교를 가기 위해 후원받는 길을 찾아야 했다. 가족들이 나를 보내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아빠 외에 다른 가족들은 내게 직장을 다니라고 말했다. 엄마는 가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그때 홍 목사님이 내게 성경 말씀을 보내주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상기시켜 주셨다. 
내가 후원을 받으러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웃집 아이 스펜서 클라크가 멀리서 나에게 소리쳤다. “맥켄지, 밴쿠버에 언제 간다고 했죠?” 나는 곧 갈 거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가 묻는 소리를 듣고 내가 왜 한국에 가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가 생각났다. 나는 원주민 학생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발견해 변화되기를 바랐다. 또한 나도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기 원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늘나라의 면류관에 마음을 두기로 했다.
한국에 갈 여비가 준비되었을 때, 나는 아빠와 사촌에게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엄마와 다른 가족에게 이야기하면 나를 가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신발을 사러 시내에 가겠다고 말하고, 가방에 필요한 물건을 다 넣고 출발했다. 그리고 나중에 엄마에게 진실을 말했다. 엄마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나와 연락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결국 엄마는 나의 결정을 받아주었고, 내가 한국에 있는 것을 응원해주셨다. 나중에 엄마가 홍 목사님과 이야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엄마는 항상 홍 목사님을 무시하셨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이처럼 행복한 적이 없다
2019년 11월 19일, 한국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내가 한국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말할 수 없는 축복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많은 옷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루에 세 끼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없지만 내가 이렇게 부유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다. 나는 해산물을 제외한 모든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모든 것이 입에 잘 맞고 맛있다. 
한편으로는 점차 어려움들을 만나면서 내 마음도 어려움에 사로잡혔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출발점이기에, 하나님은 한국에 있는 동안 나를 부인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그 외에도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원주민 마을에서 살던 것과 너무 다르기에 대부분 어려웠는데, 나는 사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처럼 행복한 적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셨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은 아버지시다. 나는 복음을 전하고 이 좋은 소식을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다. 
내가 볼 때 내가 한국에 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예수님께서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에 있으면서 가장 감사한 것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에서 영적인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은 시작일 뿐이며 앞으로 더 많은 축복을 내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얼마 전에 박옥수 목사님이 설교하신 창세기 강해를 들었다. 그날 목사님은 두 부류의 종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는 순종하는 종이고, 다른 하나는 불순종하는 종이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로마서 13장에서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는 순종하는 종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들은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부담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불순종하는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항상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고 어둠으로 이끌리는 사람이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이 밝아지다가도 세상을 향하면 사탄의 세계에 쉽게 끌려갔다. 
한국에 왔을 때 처음에는 교회를 향해 마음을 다 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교회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부끄러워만 했다. 그런데 창세기 강해를 듣기 시작하면서 목사님의 말씀이 점점 친숙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 교회에서 말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나는 교회와 함께 진심으로 복음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고 싶다. 복음을 위해 살고 싶고, 하나님의 종이 내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따르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럴 시간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갑옷을 내 삶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배워야 한다. 나는 복음을 계속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세계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한국에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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