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태국 선교의 시작,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라이프] 태국 선교의 시작,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 김학철(태국, 기쁜소식방콕교회 선교사)
  • 승인 2020.04.17 10: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4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_제4화

1996년, 김학철 선교사는 교회의 인도를 좇아 태국으로 선교를 떠났다. 선교 초기에는 부족한 것들도 많고 태국 말을 배우는 것도 힘들고, 무더운 나라에서 걷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모든 고단함을 잊고 소망 가운데 살게 해주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선교학교에서 조금 더 훈련받은 뒤, 1988년 4월에 결혼하여 첫 사역지인 기쁜소식무창포교회에 파송을 받았다. 무창포교회를 개척하고 8년 동안 사역하다가, 기쁜소식안산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1996년에 중국에서 있었던 수양회에 참석했다. 수양회를 마치고 한국에 도착하자 보는 사람마다 축하한다고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내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나는 선교사가 된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고, 기도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주위 목회자들에게 묻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중국 수양회에 가기 직전에 한국 수양회에 참석해서 사역자 20명과 함께 그룹 교제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박옥수 목사님과 의논하던 한 목사님이 우리 그룹에 와서 “여러분 중에서 선교사로 가고 싶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라고 했다. 다들 고개를 떨구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어떤 목사님이 “김학철 목사님이 선교사가 되기 위해 기도한다고 하던데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박옥수 목사님께 전해진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속이 상했다. ‘자기가 가지 않을 거면 가만히 있지 왜 나를 떠밀어?’ 
다음 차수 수양회가 시작되던 날, 수양관에 가서 바로 박 목사님을 찾아갔다. 내가 선교사로 가게 된 데에 오해가 있었다고 말씀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목사님이 나를 보자마자 “자네가 태국을 위해 기도한다면서?”라고 하셨다. “아…, 아….” 하다가, 목사님이 아주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씀하셨기에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그 말을 하지 못해서 내가 지금 태국에 와 있는 것이다. 그때 “사실 저는 선교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쩌면 태국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의 확신에 찬 모습에 당황하다가 ‘아니오’가 ‘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목사님이 계시던 거실에서 나온 뒤에야, ‘내가 미쳤지. 사실대로 담대하게 말하면 되는데 왜 그걸 못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머리카락도 세고 계시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데, 일이 이렇게 결정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 결정된 것이기에 마음으로 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교 갈 생각이, 마음이 없었다 해도 교회가 결정하면 나도 교회의 뜻을 따라서 마음을 바꾸면 되었다. 그래서 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나에게 한 말씀을 주셨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룻 3:1)
이 말씀에서 룻에게 이야기한 나오미는 교회고, 룻은 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이 나에게 “네가 가는 태국, 그곳이 바로 네가 안식할 곳이야. 내가 너를 복되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야.”라고 하신다고 들렸다.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온 뒤에는 기쁜 마음으로 태국으로 갈 짐을 쌌다. 

하나님은 나를 일등석에 태우셨는데…
태국으로 떠나기 전, 선교를 위해 준비한 돈이 비행기 표 외에 200만 원이었다. 그 뒤 선교를 떠나기 전에 부산에 가서 예배를 드렸을 때 교회에서 30만 원을 선교비로 후원해주었다. 출국하기 직전에 한 목사님이 “조금 전에 중국으로 가는 선교사님이 가져가는 화물이 50~60kg 초과되었는데 은혜를 입어서 추가 요금을 내지 않고 잘 갔어요. 목사님도 기도 많이 하세요.”라고 하셨다. 우리는 가족 네 명이 이민을 가듯 가는 것이어서 3단 가방이 4개나 되었다. 그 가운데 가방 하나에는 복음반 말씀 테이프나 월간 ‘기쁜소식’ 합본집 등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되어서 그런 것들을 가져갈 필요가 없지만, 당시에는 선교 현장에서 꼭 필요한 것들이기에 무게가 많이 나가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짐을 부치려고 하니 무게가 50~60kg이 초과되었다며 추가 요금 30만 원을 내라고 했다. 부산 교회에서 준 돈을 추가 요금으로 다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그래서 항공사 직원에게 속상한 마음을 표현했더니, 벌금을 무는 대신 일등석 네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비행기를 타본 적이 거의 없어서 일등석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 몰랐다. 
“저는 일등석은 필요 없고요, 추가 요금만 내지 않게 해주세요.”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비행기에 타야 할 시간이 다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추가 요금을 냈다. 그리고 일등석에 탔다. 그날 후로 24년 동안 비행기를 수도 없이 탔는데, 일등석을 타본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나를 가장 복되고 편안하게 태국에 보내셨는데, 나는 ‘200만 원을 가지고 태국에 가서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다 보니 돈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복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마음 중심에서 믿지 못하니까 불안해서,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는 데에만 빠져 속이 상했던 것이다. 

성경을 한 권 사고 싶었지만…
내 나이 서른여섯에 태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태국어는 자음 44개와 모음 32개, 모두 76개의 자모에 성조가 5가지 있다. 자음도 중자음, 저자음, 고자음 세 종류로 나뉘고, 모음도 단모음과 장모음으로 구분되어 있다. 사실 나에게는 76개의 자음과 모음을 외우는 것만도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태국어를 가르쳐줄 선생님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나중에 학원비를 어렵게 마련해서 학원에 등록했지만, 외국인에게 영어로 태국어를 가르치는 학원이어서 나는 영어부터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학원에도 다닐 수 없어서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의 선생님에게 퇴근하고 한 시간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유치원에 계속 찾아가서 원장님께 부탁을 드리자, 그 선생님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태국어 단어를 한 시간씩 녹음해주고 갔다. 태국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설명해줘도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까 녹음만 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가장 어려운 것이 성조였다. 아무리 녹음된 대로 발음해도 내 성조가 정확하지 않아서 태국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언어 문제뿐만 아니라 생필품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몰라 빗자루 하나 사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하루는 태국어 성경을 사려고 하니 기독교 서점에서만 살 수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방콕 시내에 기독교 서점이 두 군데가 있어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에게 주소를 보여주며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런데 가서 보니 서점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서툰 태국말로 물으니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알았다는 듯이 길을 가르쳐줘서 가보니 서점 문이 닫혀 있고, 다른 곳으로 이전한 약도가 붙어 있었다. 그 주소로 찾아가는 데 3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곳은 서점이 아니라 교회였다. 나에게 그곳을 알려준 사람이, 내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니까 교회를 찾는 줄 알고 교회를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나는 태국이 불교국가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천만 명이 사는 도시인 방콕에 기독교 서점이 단 두 곳밖에 없을뿐더러, 그 두 곳도 종일 찾아다녔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성경을 사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태국에서 나는 성경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였다.

버스 타고 4시간이 걸려 땀을 흘리며 찾아갔는데…
방콕 시내에서 우리 가족이 머물 집을 알아 보니 보통 월세가 60~70만 원 정도였다. 생각보다 집값이 비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3개월밖에 지낼 수 없었다. 외곽 쪽으로 가서 찾아 보니, 방이 2개인 콘도가 월세 30만 원이어서 그곳을 계약했다. 매달 30만 원이 나가야 하고, 두 아이의 교육비와 생활비까지 들어가야 하니 항상 돈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어느 곳을 갈 때면 걸어다닐 때가 많았다. 
태국에는 버스가 에어컨 버스, 선풍기 버스, 짐차를 개조해서 만든 버스,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 그 당시 에어컨 버스는 차비가 약 1,000원, 선풍기 버스는 200원, 그리고 짐차를 개조한 버스는 100원 정도였다. 에어컨 버스는 아예 탈 생각을 하지 못했고, 200원 하는 선풍기 버스도 못 탈 때가 많았다. 그때 시티은행에 다니다가 IMF 사태로 퇴직하고 집에서 쉬고 있던 아가씨가 연결되어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아가씨에게는 자가용이 있어서, 오전에 성경공부를 한 뒤 ‘오후에 내가 전도하러 갈 곳에 같이 가자’고 부탁했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전도하러 가기 위해 100원짜리 버스를 탔다. 머리가 천장에 닿아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 매달려 가고 있었다. 빨간 신호에 버스가 섰고 그 옆에 한 자가용이 다가왔는데 강아지가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강아지는 주인 잘 만나서 자가용 타고 다니고 내 주인은 나를 이런 차 타게 하나?’ 하고 운전수를 보니 씨티은행에 다녔던 자매였다. 며칠 후 교회에서 만났을 때 ‘그때 어디 가는 중이었었냐?’고 물어보니, ‘아, 그때 우리 강아지가 감기 걸려서 동물 병원 다녀오는 길이었어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나는 감기 걸려도 약 사 먹을 돈도 없는데 강아지가 감기 걸렸다고 병원에 가다니....’ 강아지만도 못한 내 처지를 생각하니 그 자매가 아닌 하나님께 화가 났다.
그 후로도 버스를 타고 전도를 다녔다. 하루는 자가용으로 1시간이면 갈 곳을 버스를 타고 3~4시간이 걸려 사람을 만나러 갔다. 가서 40분 정도 성경공부를 하고 돌아오면서, 8시간을 도로에서 보냈지만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내일 또 올게요.”라고 말하려다가, ‘아니야, 내일 온다고 하면 싫어할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들어 이틀 후에 오겠다고 약속을 잡고 그 집을 나오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틀 후, 아내와 함께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4시간이 걸려 그 집에 찾아갔는데,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분명히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한참 동안 큰 소리로 그 사람을 부르고 문을 세게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옆집 사람이 나와서 조용히 하라고 하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때 그 사람이 건네준 냉수 한 잔이 더운 날씨와 땀으로 지쳐 있던 나의 몸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날 나는 태국 사람들의 성향에 대해 처음 알았다. 자기가 바쁘거나 성경공부를 하기 싫으면 안 하겠다고 하면 되는데, “예, 오세요.” 하고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서툰 태국말로 하는 성경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들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잘 듣는다고 생각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4시간 동안 버스를 갈아타며 땀을 비오듯 흘려도 기쁜 마음으로 왔는데, 심하게 낙심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여기서 살아야 하나?’ 싶고, 무능력한 남편을 만나서 그렇게 평생 고생할 아내를 생각하니 아내가 안쓰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의 손을 잡고, 나 같은 남편을 만나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열왕기하 7장에 나오는 네 명의 문둥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보, 하나님이 이처럼 평생 힘들게 살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이 상태에서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간다 해도 내가 돈을 벌어서 우리 가족을 부양할 만한 능력이 없어. 복음을 전하다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 돼. 우리 가족은 네 명의 문둥이야. 설령 버림을 받더라도 한국에 돌아갈 생각 하지 말고 이 길을 가야 돼.”
그래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나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왔지만 농사를 지을 논밭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밭에서 소년들로 하여금 이삭을 한줌씩 흘리게 하여 룻이 이삭을 줍게 해주는 보아스가 있었다. 목이 마를 때 소년들이 길러온 물을 마시라며 마른 목을 축이게 해주는 보아스가 있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나 역시 태국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나도 막막했다. 현실적으로는 성경 하나 쉽게 살 수 없고, 성경공부도 이어지지 않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때 옆집 사람이 냉수를 건네며 마른 목을 축이게 해준 것처럼, 하나님은 내 마음에 시원한 냉수 같은 마음을 일으켜서 새로운 힘을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으로 소망을 얻어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었다. 
태국에 처음 왔을 때 배고프고 힘들고 고생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내가 태국에 온 것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기 위해 온 것이지 내가 일을 잘해서 보상을 받고 나를 높이 세우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혹여 내가 실망하고 주저앉을까봐 곡식 단 사이로 이삭을 버려 나로 줍게 하시고 꾸짖지 않으셨다. 그렇게 예비하신 복들을 주시는 하나님, 나에게 끊임없이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