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항복하고 복종한 기브온 거민
[설교] 항복하고 복종한 기브온 거민
  • 김재홍(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20.04.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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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11편)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지나가길 바라셨지만, 주님의 원대로 말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시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꺾고 복종하는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셨는데, 복종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라고 하며,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하였습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이가 누군가에게 주의 뜻을 말할 때 ‘저가 이 말을 싫어하지는 않을까?’라고 염려한다면, 인도자로 하여금 근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도자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는 것은, 어느 형제나 자매에게 주의 뜻을 이야기할 때 ‘저가 부담스럽고 싫어도 마음을 꺾고 그대로 받을 것이다’는 확신을 주어서 기쁨으로 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일로 명할 때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함으로 썼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어서 ‘내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종의 단계에 가 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마음의 세계입니다. 순종할 것을 확신할 뿐 아니라 ‘내 말보다 더 행할 줄 안다’고 한 것이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행하소서
여호수아 9장에 나오는 기브온 거민 이야기는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에 대해 잘 보여줍니다.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수 9:25~27)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에 항복하면서 여호수아에게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사오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옳음이 버려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전쟁에서 항복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거나 바라는 대로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행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처럼, 복종은 어떤 이야기가 내 생각이나 판단과 다를 때 ‘마음을 꺾고 들어야지’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지고 항복해 완전히 굴복된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항복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단계에 들어가야 복종의 단계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복종하는 것은 하기 싫지만 마음을 꺾고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인도를 받지 않아 해를 받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종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인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일어나거나 이해가 될 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가고 납득이 안 되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도 따르는 복종을 배워야만 가능합니다. 복종을 배워야만 참된 하나님의 종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도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어리석은 자는 재앙을 보고도 나아가다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재앙을 보고 숨어 피하기 때문에, 재앙이 지나간 뒤 ‘내가 말씀의 인도를 받길 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나도 고통을 당하고 재앙을 만났겠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반대로 미련한 자는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 ‘내가 왜 이 말씀을 안 들었던가?’ 하고 후회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다 당하고 다 망하고 나서 깨달을 것 같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자는 미련한 자요, 고통을 당하기 전에 말씀을 믿고 재앙을 피하는 것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장막에 거하고 있는가, 성에 거하고 있는가?
항복되지 않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자기 생각에 맞으면 따르지만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으면 마음을 열고, 맞지 않으면 마음을 닫고 삽니다. 어떤 일에나 사람에게 마음이 닫혔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고는 자기 마음을 닫게 한 상대방의 잘잘못을 따집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늘 마음이 상하고, 상처를 받고, 불평하고,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고, 교회나 인도자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인도자까지 원망하고 불신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마음을 닫는 이유는, 그가 아브라함처럼 장막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롯처럼 성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세계 안에, ‘자기’라는 성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맞지 않을 때는 성문을 닫듯이 마음 문을 쉽게 닫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장막의 문은 닫으나 여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장막 문은 닫아도 바깥 소리가 들립니다. 장막 문은 닫았다고 해서 출입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에 거하는 사람은 성문을 닫으면 왕래가 끊어집니다. 안에서 닫으면 그 문을 좀처럼 열 수 없고, 밖에서 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자기 성에 거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교제해 주어도 그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닫은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자기 성을 쌓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성을 쌓아 자기 세계를 구축해 놓고 사니까 늘 성문을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필요하면 닫고, 필요하면 열고. 
교회에 마음을 닫은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른 곳에 가서 마음을 엽니다. 자기 편을 들어주거나 불신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마음을 엽니다. 어두운 데 가서 마음을 열고,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마음을 엽니다. 그에 반하여 자기 성이 무너지고 자기 세계가 무너져서 장막에 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마음이 힘들고 어렵다고 마음을 닫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교제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회복해 나갑니다. 
참된 복종이라는 것은, 기브온 거민들처럼 자기 세계가 무너진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항복하고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주권이 무너져서 여호수아에게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행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종하는 삶을 배우지 못하면 교회에서도 늘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다가,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고 대적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죽음 앞에 선 칼레의 시민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 작품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로댕의 작품으로,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1346년에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침략했는데, 첫 번째로 공격한 도시가 칼레였습니다. 그때 칼레 시민들이 11개월 동안 항전했습니다. 에드워드는 빨리 프랑스를 점령해 들어가야 하는데 칼레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 손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칼레를 점령한 뒤 칼레 시민들을 다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그러면 다음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어차피 죽을 거 끝까지 싸우자고 할 것이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대신 여섯 명을 교수형에 처할 테니 시민들을 대표해서 죽을 사람은 나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지만, 여러 과정을 지나 여섯 사람이 자원했습니다. 
1884년에 칼레 시는 로댕에게 그 여섯 사람을 조각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로댕이 조각한 여섯 사람은 칼레 시민들이 원한 당당하고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실망했지만, 지금은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칼레의 시민’ 이야기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고, 임신 중이던 에드워드의 왕비가 태어날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며 그들을 살려주라고 구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칼레를 정복한 뒤 시민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면 다 죽어야 하고, 대표로 여섯 명을 죽이겠다고 하면 여섯 명이 죽음 앞으로 가야 합니다. 

옳음을 내세울 수 없었던 기브온 거민들
성경에서 복종을 이야기할 때, 히브리어로 복종의 의미는 ‘전쟁에 져서 항복해 뭐라고 명하든지 들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기브온 거민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항복하러 갈 때 어떤 모습으로 갔는지 보겠습니다.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오히려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취하였더니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 났으며,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부대도 새것이더니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심히 길므로 인하여 낡아졌나이다 한지라.”(수 9:12~13)
기브온 거민들의 모습을 보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습으로 자신들을 꾸몄습니다. 그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가서 자신들의 어떤 것도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고, 항복했을 뿐입니다. 자신들이 나타나면 자기 족속들이 다 죽임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옳음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옳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복종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순종의 영역, 즉 이해되고 납득이 될 때에는 따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따르지 못합니다. 

마음에 받아들이는 기능이 있는가?
마음에 옳음이 자리잡은 사람은 받는 기능이 없어집니다. 누구든지 ‘내 마음에는 별다른 옳음이 없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마음에 받는 기능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옳음이 자리잡고 있는 사람은 자기 소리를 냅니다. 받아들이고 믿어서 믿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래서, 저래서’ 하며 형편이 어떤지를 이야기합니다. 또한, 자기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삽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일하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주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처럼 전쟁에 져서 항복한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해 나무 패며 물 긷는 일을 하라’고 했을 때 “나는 그런 일 하기 싫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너희들 왜 나무를 안 패놓았어? 번제를 드리는 데 필요한 장작을 패놓아야지!” 할 때 “지금은 일하고 싶지 않아요. 쉬고 싶어요.”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복종하는 삶은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복종은 항복하고 포로가 되어서 자기 생각, 자기 뜻과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복종은 ‘내 마음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여호수아가 시키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따라야 했습니다.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옳음이 끝난 사람, 항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옳음이 끝나고 옳음이 제해진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의향을 따라 살겠습니다.” 하면서 복종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주권이 존재할 수 없다
포로로 사로잡힌 자는 자기 원함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내 주권을 가지고 내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사는 삶은 항복한 삶, 포로 된 삶이 아닙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왜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하면서 복종하는 삶을 삽니까? 그들의 성은 왕도와 같고 그들은 강했다고 성경에서 말하는데도 그들이 항복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항복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멸망당한 족속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항복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그들 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의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처럼 강한 왕들과 족속도 망했는데, 우리가 이스라엘을 대적하면 망한다. 항복하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주권을 가지고 살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자기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두 세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세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과 자기 중심적인 삶, 두 개의 삶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두 개의 주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고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해서 하나님과 부딪히고 대적하는 사람이 됩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계속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주권을 가지고 있고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 계속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기브온 거민처럼 항복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면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주님의 문제가 되고 가장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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