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라이프]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 글 | 로날드 주니어 호세 이리야테즈 스와레즈(볼리비아)
  • 승인 2020.07.06 1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7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2012년에 한국으로 해외봉사를 와서 죄 사함을 확신했던 볼리비아 기쁜소식산타크로스교회의 로날드 형제. 지난 2월, 8년 만에 한국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주한 볼리비아 대사관의 일등서기관으로서의 방문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의 삶에 베푸신 은혜가 크고 놀랍다. 그는 아직도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은 꿈
나는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의 맏아들로 태어났고, 내 아래로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다. 축구를 배우고 싶고 선수가 되고 싶어서 열네 살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 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독일에 계셨기 때문이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어려웠지만, 내 또래 아이들과 같이 어울려 지내다 보니 독일 생활에 점점 적응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축구도 배우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길 바라셨다. 축구는 선수 활동 기간이 짧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축구를 가르치는 코치는 축구에 매진하도록 훈련을 시켰고, 나도 축구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훈련하는 것이 즐겁고 좋았다. 나중에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축구를 배운 지 3년 정도 되었을 때, 코치가 ‘너희가 열일곱 살이 되면 축구팀들과 계약해야 하니까 훈련을 더 해야 한다’고 했다. 코치는 축구팀에 우리를 보내고 돈을 받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축구를 가르쳤던 것이다. 프로 축구의 세계가 그런 것이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축구를 배웠던 나는 코치의 말을 듣고 장사치 같아서 실망했다.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은 꺾였지만,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선진 문화와 기술, 무상교육시스템, 인내를 가지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고 절제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마음에 크게 남았다. 또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바르게 이끌어줄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부분도 생각되었다.

사촌형의 변화가 궁금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열여덟 살에 고향 볼리비아로 돌아왔다. 목표가 사라진 까닭에 한동안 방황했다. 술을 마시고 파티에 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마음이 공허했고, 그 공허함은 점점 더 커졌다.
다시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프랑스에 간 첫 해에도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사촌형 카를로스의 연락을 받았다. 형은 복음을 정확히 알려주는 교회가 있다면서 기쁜소식파리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형은 볼리비아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술을 끊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형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기쁜소식산타크루스교회의 형제였다. 형은 그를 통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2007년에 케냐로 단기선교를 갔다 온 후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형이 변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기다렸던 나는 형의 인도로 기쁜소식파리교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방학이 되어 볼리비아에 돌아와서는 형을 따라 기쁜소식산타크루스교회에 갔다. 처음으로 선교사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렇게 볼리비아 교회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방학이 끝나 다시 파리로 돌아간 후 나는 성경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고, 복음과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계속 듣고 싶었다. 그래서 파리에서 가진 성경세미나에 참석하고, 영국·러시아·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갖는 성경세미나와 월드캠프에도 참석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어서 생소했다.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때는 죄 사함을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교회와 함께하는 것이 마음에 힘이 되었고, 마음도 정리되었다.

첫 번째 한국 방문
2011년 스물두 살에 프랑스에서 대학 공부를 마치고 볼리비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교회의 인도를 따라 해외봉사를 가기로 했다. 목사님과 형제 자매들 모두 나에게 한국으로 가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심하게 반대하셨다. “왜 그렇게 먼 한국에 가니? 너는 시간 낭비하는 거야. 너는 지금 일할 때야.” 부모님은 내가 공부를 마치면 부모님의 사업을 도와서 같이 일하길 기대하셨는데, 내가 돌아와서 교회에 다니는 것도 이상한데 먼 한국으로 단기선교를 간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2012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건물들과 발달된 기술에 놀랐다. 특히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전에 한국은 볼리비아보다 가난한 나라였는데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고,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하는 한국의 시스템과 기술을 볼리비아에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대전의 기쁜소식한밭교회에 지냈다. 처음에 어려웠던 것은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지금도 그 시간에 일어나 운동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말씀을 계속 듣고 교제하면서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씻어졌고, 내가 의롭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정확히 알았다.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들었던 많은 말씀들을 마음에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연결되니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말씀도 주셨다.
“…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1~5)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창 41:51)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하나님이 나의 지난 방황을 잊게 하시고 나에게 큰 기쁨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IYF가 하는 많은 활동에 함께했다. 대학에서 IYF를 홍보하고, 월드캠프에 참석하고,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에 스태프로 함께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하며 사람들과 교류하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특별히 박옥수 목사님이 하신 마인드 강연 내용 가운데 “사람은 과일처럼 각기 맛이 다릅니다. 그 맛을 발견해야 합니다.”라는 말씀과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낮은 점수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아직도 내 마음에 들어 있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님들이 복음을 전하며 사는 모습과 기쁜소식선교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도 놀라웠다.
또한 감사했던 일은, 아버지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어서 한국에 오셨다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으신 것이다.

목사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단기선교 활동을 마치고 볼리비아로 돌아간 후에는 교회에서 지내다가 부모님의 사업을 함께 했다. 얼마 후에는 가정도 이루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생수 사업이었다. 당시 볼리비아 사람들은 생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에 제품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은 이 동네 내일은 저 동네를 다니며 산타크로스 시에 있는 거의 모든 가게를 방문했다. 새로운 일을 개척하다 보니 밤늦도록 일해야 하고, 가게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나 자신에게 낮은 점수를 주고, 만나는 사람들의 맛을 발견하라’는 박 목사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새로운 사람을 70명 가량 만났다. 사람들을 만나고, 제품을 소개하고, 파는 모든 부분에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주셨다. 생수 사업이 정착되고 안정을 찾으면서 부모님의 사업도 같이 돌아보았다. 사업하는 부분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볼리비아의 위기. 나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2019년 11월은 볼리비아가 정치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다. 전 대통령이 네 번째 집권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의혹으로 폭동이 일어났다. 전국이 아수라장이 되어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이동할 수도 없고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볼리비아를 위해 기도했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기도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뭐지?’ 하고 나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국제적인 일을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좋은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한국에서 지낼 때 나는 볼리비아도 그 나라들처럼 발전하길 바랐다. 나는 볼리비아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한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볼리비아를 위해 외교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이 좋습니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 편지를 쓴 뒤 그것을 잘 간직했다.
“대통령님,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로날드 이리야테즈 스와레즈입니다. 저는 독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기업금융학을 공부하고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는 자원봉사자로 한국에서 지냈습니다. 대통령님, 저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기업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은 한국에 있는 모든 기술과 학교 교육을 볼리비아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폭동이 잦아들지 않자 전 대통령은 망명했고, 새로운 대통령이 세워졌다. 볼리비아 국민들은 이 변화에 굉장히 감사하며 기뻐했다. 이 변화가 볼리비아에 없었더라면 볼리비아가 북한이나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가 될 뻔했기 때문이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뒤 정부도 새롭게 개편되었다.

대통령과의 두 번의 만남
그때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분명하다. 하루는 아내가 대통령께서 기독교 대표들과 수도 라파스에서 조찬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내게 알려주었다. 그 소식을 임권수 선교사님에게 말씀드리자 선교사님이 무척 반가워하셨다. 당시 볼리비아 교회는 월드캠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선교사님은 대통령을 월드캠프에 초청하고 싶다며 조찬 모임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바로 조찬 모임에 참석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리고 임권수 선교사님과 월드캠프 준비를 도우러 오신 콜롬비아의 박준현 선교사님과 함께 12월 9일에 라파스로 갔다.
나는 대통령께 드릴 편지를 가지고 갔다. 모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기 때문에 대통령께 가까이 가기 쉽지 않았지만, 기회가 주어져서 박준현 선교사님이 대통령과 악수하면서 월드캠프를 소개하고 캠프에 대통령을 초청하셨다. 그 자리에는 장관들과 국회의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도 많아서 월드캠프에 모두 초청하며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편지는 대통령께 드리지 못했다. 나는 국회부의장과 상원의원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12월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12월 31일, 콜롬비아에서 가족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산타크루즈에서 전화가 왔다.
“로날드 씨, 젊은 사업가들 가운데 당신의 회사가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상식장에 대통령께서 직접 오십니다!”
‘아, 편지를 드릴 기회가 또 왔구나.’
나는 바로 편지를 다시 썼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1월 9일, ‘젊은 사업가 상’을 받는 날 임권수 선교사님과 같이 참석했다. 임 선교사님은 내게 그라시아스합창단 소개 책자를 드리며 대통령을 월드캠프에 초청하라고 하셨다. 나는 팜플릿 안에 편지를 넣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책자를 드리면서 “대통령님, 볼리비아 월드캠프가 2월 5일부터 7일까지 열립니다. 그때 꼭 오시길 바랍니다.”라고 하며 인사를 드렸다.
그 뒤로 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대통령과 가족, 그리고 사이가 안 좋으신 부모님을 위해 3주 동안 낮에는 금식하고 저녁에 한 끼를 먹으며 기도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21일이 된 마지막 날, 전화가 걸려왔다. 외무부에서 온 전화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로날드 이리야테즈 스와레즈입니다.”
30분 동안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나에게 전화를 한 외무부의 고위 관계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한국 볼리비아 대사관의 1등서기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젊은 사업가 상’을 받은 날 그라시아스합창단 소개 책자에 편지를 넣었는데, 대통령 곁에 있던 어떤 분이 편지를 빼는 것을 보았다. 그 후에 편지가 대통령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 것이 분명했다.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2월 5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에서 월드캠프에 개최되었다. 대통령께서 참석하셨고, 박옥수 목사님과 만남을 가지셨다. 그리고 대통령께서는 박 목사님이 전하신 복음을 듣고 구원받으셨다. 대통령께서는 캠프 개막식에서 축하 메시지를 전하셨고, 그라시아스합창단의 공연도 보며 무척 기뻐하셨다. 나도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8년 만에 다시 온 한국
지난 2월 22일, 8년 만에 한국에 다시 왔다. 내가 한국에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삶에 일하시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우리 가족과 함께 어머니도 한국에 오셨다. 어머니는 한 달만 머물고 볼리비아로 가려고 하셨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지금까지 머물고 계신다.
기쁜소식강남교회의 목사님과 형제 자매님들이 우리가 도착할 때부터 집을 구하는 일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셨다. 또한 어머니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많이 써주셨다. 전에 내가 한국에 올 때 반대가 너무 심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셨다. 얼마 뒤 남동생도 한국에 왔는데 동생도 구원받았다.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했다. 우리 가족에게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기에 교회와 좀 더 연결되어 우리 가족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파될 것이 소망스럽다.
대사관에서 일하면서 많은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난 5월에는 굿뉴스월드 의료봉사단에서 코로나와 싸우는 데 필요한 많은 물품들과 마스크를 볼리비아에 지원해 주셨다. 박옥수 목사님과 형제 자매님들과 굿뉴스월드에 너무 감사했다.
지금도 가끔씩 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나 IYF와 일한다는 것을 정말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대로 내 마음에 기쁨을 주셨다. 복음을 위해 일하시는 기쁜소식선교회의 한 분 한 분의 발걸음을 닮아가고 싶다. 앞으로 한국과 볼리비아가 좋은 관계가 이어지길 바라고,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전 세계의 주요 도시에 IYF 센터도 짓고 싶다.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함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나님이 앞으로 나의 길도 인도해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