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너희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설교] 너희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 김재홍(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20.07.1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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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14편)

소견대로 사는 삶에서 복종하는 삶으로
마음을 열고 교회와 교류하지 못하고 마음이 교회와 연결되지 않은 사람은, 사탄이 그 마음을 쉽게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탄이 마음을 교만하게 해놓으면 다른 지체를 판단하고 무시하며 교회를 업신여깁니다. 사탄이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을 높이는지 아십니까? 옳음을 넣어주면 사람들의 마음은 금방 교만해지고, 그 옳음으로 지체들을 판단하고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의 종을 판단합니다.
사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룻기 1장에서 나오미도 자기 소견을 따라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습니다. 옳음을 가진 사람은 교회가 하는 일이 불편하고 불만이 많습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데 왜 저렇게 할까?’ 자기 신앙 수준이 낮아서 이해하지 못한다고는 생각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합니다. 나오미도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해 자기 옳음을 따라 모압으로 가서 큰 고통과 슬픔을 당했습니다.
룻기 2장은 그 다음 단계의 삶이 나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삶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삶’ 다음 단계입니다. 룻은 나오미를 위해 이삭을 주우며 헌신하고 희생했습니다. 그처럼 구원받고 신앙이 좀 자라면 복음이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삽니다. 복음을 위해 나름대로 수고하고 희생해도 사탄은 얼마든지 우리 마음에 옳음을 넣어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교회에서 순종하고 헌신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사탄 이 그 마음에 옳음을 넣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옳음을 받아들여서 교회와 연결되어 있던 고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이렇게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룻기 3장에서 좋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룻 3:4~5)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이 이해가 되고 감사하고 좋아서 보아스가 자고 있는 곳에 가서 그 발치의 이불을 들고 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 다. 정말 부담스럽고 싫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잘못되면 음란한 여자로 오인받을 수 있는데도 나오미의 말을 따랐습니다. 룻기 3장은 순종 다음 단계로 복종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순종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이해가 되고 마음이 일어날 때 복음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종의 단계는,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도 따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이 우리 마음에 옳음을 넣어주지만, 하나님은 복종하는 삶을 배우면 옳음에서 벗어나 복음을 위해 힘있게 달려갈 수 있게 해놓으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고 처음에는 복음이 좋아서 순종하고 따르며 헌신하고 사는데, 사탄은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 마음에 ‘내가 수고하고 희생했다’는 것으로 큰 옳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옳음을 주장하고, 그 옳음을 잣대로 교회를 판단하며, 인도자에 대해 서운하고 섭섭한 이야기, 불신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에 옳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악한 씨를 받아들인 것과 같습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씨에서 불신의 싹이 나오고, 결국에는 교회를 대적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복종은 영적으로 엄청난 복을 불러오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옵니다. 룻기 2장에서 룻이 나오미에게 순종해 이삭을 줍습니다. 그것으로 추수 때에는 먹고 살 수 있지만, 추수가 끝나면 이삭을 다시 주울 때까지는 양식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3장에서 룻이 복종함으로 보아스와 연결되면서 양식이 먹고 남을 만큼 넉넉해집니다. 그뿐 아니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오미까지 풍성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복종의 단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풍성함으로 주변 사람들도 풍성하게 만드는 복된 삶을 삽니다. 그를 통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한 내용이 마태복음 2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당신의 좋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마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인데,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나는 원치 않지만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당신의 마음을 속으로만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복종하는 신앙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복종의 영역에 가서 완성되는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너희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구약시대에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보고 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만,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에게 분향하자 그것을 부수고 ‘이것은 느후 스단(놋조각)이다’고 했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 쓰였지만 놋 조각에 불과하기에 부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옳음도 버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악하거나 잘못된 것만 인정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옳음까지도 버리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려는 걸 막는 것은 사탄의 역사다’ 하며 끝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시를 받아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영적인 일이지만 그것도 버려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옳음도 버려지고 영적인 옳음까지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 버려지는 것이 온전한 복종입니다. 이 두 가지가 버려질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너희 복종이 온전해질 때에’라는 말씀처럼 참된 신앙은 온전한 복종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6)
이론과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모든 이론이 파해지고 복종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 앞에 온전히 복종된 삶이었습니다. 모든 옳음이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죄 없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일어난 원함이나 옳음도 버려져야 한다면, 죄악 중에 출생한 인간에게서 올라오는 옳음은 당연히 버려져야 합니다. 한때 복음을 위해 온 마음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다가 신앙생활을 대충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마음에 사탄이 옳음을 넣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옳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옳고 그르고를 따져서 옳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쉽게 풀 수 있는 옳음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풀기 어려운 옳음을 넣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풀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야 합니다. 순종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서 사탄이 옳음을 넣어주었고, 그 옳음이 불평하고 원망하게 만들었으며,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자라서 불신을 낳고 대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서 보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신앙생활을 했는지’가 보입니다.

복종하는 삶에 주어지는 영광과 복
우리도 예수님처럼 복종하는 신앙을 배우면, 내가 원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삽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갈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우리가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복종하는 길을 가는 것은 복종 뒤에 주어지는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의 복종하는 삶 뒤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복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영광스러운 삶을 주십니다. 혹 ‘순종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았는데 지금 내 삶이 이게 뭐야?’ 하고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삶처럼 복종하는 삶의 영역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순종하는 영역까지만 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단계에서 사탄이 마음에 옳음을 넣어주어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할 때 사탄이 ‘아무리 충성하고 헌신하고 희생해봐라. 나는 너를 더 큰 대적자로 만들 수 있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희생하고 헌신하다가 옳음에 잡혀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저렇게 살기 싫다. 그러니 적당히 살자’ 하고 육신의 욕구를 좇아 살아서 교회에 어두움을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과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복종하는 우리 이름을 얼마든지 높이고 영광스럽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고 맛본 은혜가 전부이겠습니까? ‘구원받고 그때는 좋았는데…’ 하는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우리 삶이 복종의 영역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높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마음에 옳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직 순종의 영역밖에 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때 ‘내가 아직까지 가보지 못한 영역이 있구나. 그 영역에 가면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겠구나’ 하고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도 이 부분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도 구원받고 나서 나름대로 순수하게 교회에서 순종하고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신앙을 전부 무너뜨리셨습니다. 복종의 영역에서의 신앙을 가르쳐 주시려고 간섭하셨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하다가 한국에 불려 들어왔을 때 이해가 안 가고 납득이 안 되어 제 마음을 꺾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에서 옳음이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복종이 안 되었습 니다. 사역자가 되어 복음과 함께한다고 했지만, 마음에 옳음이 들어와서 그 옳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저를 예수님이 가신 길처럼 복종의 영역으로 옮기려고 하셨고, 옮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저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동일하게 원하시는 신앙의 길입니다. 이 영역에 들어가면 정말 복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 마음에서 옳음이 꺾이고 복종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정말 놀랍게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 세계를 누비면서 복음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여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5~46)
주님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순종의 영역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살다가 옳음이 들어와서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복종의 영역으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옳음에 사로잡혀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신하며 대적하는 삶에서 어둠이 없는 복종의 영역으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영광스럽게 하시는 자리로 가자는 것입니다. 사탄이 넣어준 옳음에 사로잡혀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마치 늪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집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성도들은 옳으냐 그르냐를 끝까지 따집니다. 그렇게 할수록 옳음의 늪 속에 더 깊이 빠져들고, 스스로 벗어나지 못해 평생 옳음에 잡혀서 사탄에게 종노릇하게 됩니다.
주님은 주저앉아 있는 성도들에게 ‘네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복종의 영역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거기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과 역사와 축복과 은혜만 넘칩니다. 언제까지 한때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았다는, 순종의 영역에 머물러서 옳음과 싸우고 있겠습니까? 주님은 “네가 왜 고통하고 갈등하는지 아느냐? 네가 있는 영역은 사탄이 틈탈 수밖에 없는 영역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사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을 아시기에 거기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복종의 영역에 가면 주님의 뜻만 온전히 남습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넘칩니다. 죄 없이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도 육체를 입고 계셨기에 하나님과 다른 원함이 있어서 당신의 원함을 꺾고 부인하셔야 했습니다. 죄악 중에 출생한 우리는 우리 옳음 전체를 부인하고 원함도 부인해야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 그 길로 당신과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는 말씀 앞에서 ‘주님, 일어나 함께 가겠습니다. 그동안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것을 풀려고 했는데, 사탄의 꾐에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바였습니다’ 하고 일어나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일어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옳음을 풀려고 애쓰지 말고 복종의 영역으로 가보십시오. 옳음이 자리 잡을 수 없는 복종의 영역에서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역사와 영광을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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