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가난한 시골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고
[라이프] 가난한 시골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고
  • 글 | 김학철(태국, 기쁜소식방콕교회 선교사)
  • 승인 2020.10.07 12: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10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_제10화

 

태국 교회 예배당을 지을 때는 어떻게든 가장 아름답고 빠르게 지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하나님이 공사를 책임지실 것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편지로 지방 전도의 길이 열리면서 그 가난한 지역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예배당을 지어주시는 것을 보았다.

 

2001년에 예배당 공사를 하고 있을 때 박옥수 목사님이 들르신 적이 있다. 목사님은 나를 보는 순간 “자네는 선교사인가, 노가다 십장인가?”라고 하셨다. 예배당을 짓는다고 새까맣게 탄 내 모습에서 선교사의 티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이 하나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게, 더 빠르게 예배당을 지을까?’라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 얼굴이 그렇게 새까맣게 탔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교회를 위해 내 한 몸 아끼지 않고 잠도 못 자가며 열심히 공사했는데….’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목사님은 대전에서 선교센터 지을 때를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공사를 책임지실 것을 믿고 복음 전하는 일에 마음을 쏟으니까 하나님께서 일할 사람도, 필요한 공사비도 보내 주셔서 결과적으로 선교센터를 아름답게 지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뜻이나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선교 나온 지 5년째 된 해였는데, 5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를 선교사로 보낸 교회의 마음은 사라지고 박 목사님이 넣어주신 믿음도 온데간데없고 내 성실함으로 일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런 나를 무척 불편해하셨던 것이다. 나는 타락해가는 내 모습을 볼 눈이 전혀 없었지만 목사님은 내 마음을 읽고 계셨다. 나를 책망하셔서 고통 속으로 빠져가는 나를 건져주고자 하셨다. 하지만 그런 목사님의 마음을 모르니까 섭섭한 마음이 먼저 찾아왔다. ‘목사님이 날 미워하시는 거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수고했다는 말은 안 하고 왜 저런 말만 하시는 거야?’ 
그처럼 내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에 끌려가다가 ‘내가 지금 사탄에게 속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바로 바꾸고 목사님에게 찾아갔다. “목사님, 저는 그동안 제 마음도 제대로 모르고 너무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드렸다. 그러자 목사님이 “하나님, 김학철 선교사를 통해서 태국에 복음이 전해질 걸 믿습니다.”라고 기도해주셨다. 목사님은 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온 몸이 까맣게 타서 공사장 일꾼이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 사람이 다 되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없는 자인데, 이런 나를 향해서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시윗라이에서 온 편지 한 장
2002년에 한국에서 오신 어느 목사님을 모시고 전도 집회를 가지려고 전단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집회 준비는 하지만 ‘전단지를 받고 누가 올까? 그동안 내가 교만하게 살았는데 사람들이 과연 올까?’라는 두려운 마음이 들고, 한편으로는 목사님이 기도해주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다’라는 소망도 있었다. 
집회가 시작되고, 새로운 사람이 한두 명밖에 오지 않았다. 그 중에 ‘난만’이라는 사람과 신앙상담을 하며 복음을 전했지만 구원받지 않았다. 그는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책만 받아 가고, 그 후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실망이 너무 컸다. ‘한국에서 강사 목사님도 오셨는데…,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 안 하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목사님이 기도해 주셨지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1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수린’이라는 분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느 교회의 장로인데, ‘난만’이라는 분을 통해서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책을 받아 다 읽었다며 시윗라이에 와서 꼭 집회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편지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지도를 펴서 시윗라이를 찾아보니 태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었다. 그때는 내비게이션도 없고, 혼자서 차를 끌고 12시간을 운전해서 갈 것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내가 거기까지 어떻게 가? 그냥 다음에 가자.’ 그러고는 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그분에게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편지가 또 왔다. 그때 마침 방콕에서 5시간 걸리는 페차곤 도道의 촌덴 마을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나를 초청했다. ‘시윗라이는 너무 멀어. 페차곤에 가자.’ 그렇게 결정하고 페차곤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 집에 갔다. 첫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 나를 대접했다. ‘야, 잘 왔다. 시윗라이, 그 가난한 동네에 갔으면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었을 거야.’ 저녁에 50명 정도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마음에서 힘이 솟았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기쁜소식선교회는 이단이라고 비방했고,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일어났다. 그날 집회를 마치고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새벽 4시에 우리를 깨우더니 당장 나가라고 했다. 황당한 심정으로 방콕으로 돌아오는데, 새벽 1시에 자서 얼마나 피곤한지 3시간 정도 운전하다 보니 너무 졸렸다. 깜빡 졸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으려고 했다. 얼른 핸들을 휙 돌렸더니 이번에는 차가 전복되려고 했다. 속으로 ‘하나님! 하나님! 시윗라이 갈게요!’라고 다급히 외쳤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고 시윗라이에 가서 수린 장로님을 만나 팍펫 교회로 갔다. ‘삼랍’이라는 분의 집에서 지냈는데, 어찌나 가난한지 전깃불도 안 들어왔다. 밥은 장작불을 때서 하고, 교회에서 집회할 때는 자동차 배터리로 불을 켰다.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나?’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는 반찬을 해가지고 왔는데, 옛날 한국의 재래식 화장실에서 보았던 구더기와 똑같이 생겨서 순간 숨이 탁 막혔다. 그런데 먹지 않으면 그분이 마음을 닫을까봐 안 먹을 수도 없었다. 
‘먹어야겠다!’ 하고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었다. 두세 마리 들어갔겠지 했는데 20마리쯤이 느껴졌다. 씹으면 더 못 먹을 것 같아서 꿀꺽 삼켰다. 먹고 나서 그분에게 “이게 뭐예요?”라고 물으니 망고나무 잎사귀에 집을 짓고 사는 빨간 개미의 애벌래를 볶은 것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한다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그 집에서 지내며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나중에 시윗라이 교회가 세워졌다. 

가장 가난한 싹깨오 교회의 시작
사실 1996년에 태국에 온 뒤 지방에 제대로 전도하러 간 적이 별로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직 말이 서투니까 더 잘하게 되면 가자.’라는 마음으로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시윗라이에서 복음의 역사를 본 뒤 지방에 전도 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먼저 위낫 자매와 린다 자매를 따라 ‘싹깨오’ 지역의 ‘크렁 야이’라는 동네에 갔다. 자매들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 성경 이야기를 하려고 앉았는데, 그분은 성경을 펴는 것조차 싫어하면서 “성경에 관심 있는 사람을 소개해 줄게요.” 하며 룽부 부친을 소개해 주었다. 
룽부 부친을 따라 그의 가족이 있는 ‘나야오’로 갔다. 그곳은 태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였다. 약 50년 전에 그곳은 수도나 전기 시설 등이 전혀 없는 황량한 곳이어서 아무도 살지 않았다. 정부에서 그 지역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하려고, 태국의 가장 북쪽에 있는 ‘이산’ 지역 사람들에게 ‘나야오에 이주하면 땅을 주겠다’고 했다. 이산 지역도 가난한데 그 중에서도 집도 밭도 없는 사람들이 이주해 정부로부터 땅을 받아 농사를 지으면서 형성된 마을이 나야오다. 
룽부 부친을 따라서 간 아농 씨의 집 역시 무척이나 가난했다. 하루는 이상한 비린내가 나는 탕을 끓여다 주는데, 자세히 보니 뱀국이었다. 대접할 것은 없고 손님은 대접하고 싶고, 그래서 끓여온 것 같았다. 두 눈 꼭 감고 먹어야 했다. 화장실도, 샤워 시설도 없었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집 옆 항아리가 있는 곳에서 샤워를 했다. 샤워하기 전에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방도 마땅치 않아 차 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차에서 나와 문을 잠근 뒤, 차 키와 벗은 옷을 가방에 넣어서 차 트렁크에 넣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나중에 아내가 자기도 차에서 옷을 갈아입겠다고 해서 키를 주려고 생각해 보니 트렁크에 넣고 문을 닫은 것이 기억났다. 난감했는데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룽부 부친의 사위인 반딧 씨가 정비사를 데리고 와서 차키를 꺼내주었다. 반딧 씨에게 ‘여기까지 왔는데 성경 공부를 하자’고 해서 복음을 전해 그분이 구원을 받았다. 나는 실수했지만 하나님은 그 실수를 통해 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이다. 
나야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룽부 부친, 아농 자매, 반딧 형제 등을 비롯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들은 주일마다 4시간씩 걸려서 방콕까지 예배를 드리러 왔다. 그렇게 지내다가 살롯 자매가 그곳에 교회를 지어 달라고 500평의 땅을 기증해 ‘싹깨오’에 예배당을 건축했다. 

왕짜오 교회도 예배당을 짓고
위낫 자매와 계속 전도를 다니면서 왕짜오 지역에 사는 텅씨 씨를 소개받았다. 왕짜오는 한국의 대구처럼 분지로 햇살이 강하고 빨래를 널면 바로 마를 정도로 아주 더운 지역이다. 텅씨의 집은 그 근방에서는 아주 좋은 집이었다. 남편은 대학교수로 잘살고, 에어컨도 있어서 집안이 아주 시원했다. ‘이 집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이 와서 왜 우리 집에 왔느냐고 따지더니, 성경 공부를 하러 왔다고 하니까 나가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내가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부엌에 가서 부엌칼을 들고 왔다. 계속 고집을 부리다간 죽겠다 싶어서 나왔지만 갈 데가 없었다. 
바로 옆집에 ‘렉’이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마루가 나무판자로 되어 있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어느 곳은 부러져 구멍이 뚫려 있었다. 또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나던지…. 하지만 잘 데가 없으니 그 집에서 자야 했다. 그리고 렉은 정신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집에 오래 있고 싶지 않고 다른 데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고 렉에게 계속 성경 이야기를 했다. 렉은 자기는 미용사로 집집마다 머리를 해주러 가야 한다며 우리가 나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냐’며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서 그분이 구원을 받았다. 이어서 텅씨도 구원받고, 사람들이 계속 연결되었다. 
왕짜오 지역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계속 일어나 2005년에 월세로 집을 얻어 교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월 25달러의 작은 방에서 시작했고, 아는 사람이 많은 미용사 렉 자매가 여러 사람에게 전도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나 월 30달러인 조금 큰 집으로 옮겼다. 렉 자매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 그곳 사람인 남편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 하루는 그 남편이 아내에게 물었다.
“장모님이 교회에 다닌다고 했지?”
“그냥 조그마한 집을 월세로 얻어서 하는 교회예요.”
“집세가 얼만데?”
“30달러요.”
“아니, 그렇게 싸고 작은 집에서 무슨 교회를 한다는 거야. 땅을 사서 건물을 짓지 그래. 내가 그 교회에 헌금할게.”
우리와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그분은 
1만 달러를 내놓았다. 월세 30달러를 내고 있던 우리에게 1만 달러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우리도 예배당을 짓고 싶어서 땅을 알아보고 있었기에 그 돈으로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루고 계신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소가 앞에서 끌고 가는 것처럼, 내 힘으로 복음의 일을 끌고 갈 때에는 결국 힘들어서 원망이 남았다. 소들이 뛰어 법궤가 쓰러지려고 하자 웃사가 손으로 잡아 그 자리에서 죽은 것처럼, 내 마음도 결국 죽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법궤를 메라고 하셨다. 직접 메는 것이 보기에는 더 힘들어 보이지만, 우리는 법궤 아래 있고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길을 열고 인도해 주셨다. “너는 법궤를 메고 있어. 내가 구원받을 사람을 예비하고 예배당도 지을 수 있게 다 준비해 줄게.” 얼마나 쉬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을 받아 그 기쁨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2002년에 난만 자매님이 집회에 왔다가 책만 받아서 간 것이 내가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시위라이에 가기 싫어했고, 가난하고 더운 왕짜오에서 전도하는 것이 힘들었으며, 싹깨오에서 차 키를 차 트렁크에 넣는 실수를 할 만큼 어리숙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지역들에 교회를 세우셨고, 올 9월에는 시위라이 지역 븡깐 도청의 협조로 월드캠프를 열어 300명 넘는 대학생들이 변화를 입었다. 또한 개막식 때 축사를 했던 장관 부인이, ‘연말에 3천 명을 모을 테니 칸타타를 열어 달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왕짜오가 있는 ‘딱’ 지역에서는 몽족 사람 5천 명에게 칸타타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등 많은 길들이 열리고 있다.
나는 일이 잘되면 쉽게 자만하고, 안되면 낙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김학철 선교사를 통해서 태국에 복음이 전해질 걸 믿습니다.”라는 박 목사님의 기도를 이루고 계신다. 신앙생활을 내가 하려고 했을 때는 힘들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니 힘들 것이 없었다. 다윗이 법궤를 메고 올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마음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메고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