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설교]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0.10.0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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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3편 마지막 편)

 

 

예수님이 찔리고 상하고 맞은 것은 우리 대신 당하신 것이기에 
우리가 고통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질고와 슬픔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사람입니다. 이사야의 삶 속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때를 이야기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고 핍박하는 왕들도 많았지만, 웃시야 왕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사야와도 마음이 가까웠습니다. 그런 웃시야 왕이 죽자 이사야의 마음이 굉장히 허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마음에서 웃시야 왕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하나님께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사야가 그 마음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 성경을 한 장, 한 장 써 내려갔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면서 이사야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만났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들어서서 이사야는 드디어 700년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은혜로 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피를 흘리며 죽으시는 것을 봅니다. 이사야는 53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1~2)
이사야가 본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에 방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방을 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모양 없이 이 땅에 오셔서 멸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왕궁이나 좋은 집에서 영광스럽게 태어나 귀한 대접을 받으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예수님은 천하고 악한 우리가 당신을 만나도 부담스럽지 않도록, 하늘에서 내려오시면서 고운 것이나 아름다운 것을 모두 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편하게 나올 수 있도록 예수님을 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사야는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저분이 누구시기에 저렇게 고난을 당하실까? 무엇 때문에 저렇게 괴로움을 겪으실까? 왜 저렇게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할까?’ 이사야가 떨리는 가슴으로 십자가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이사야는 써내려 갑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신 것은 우리로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찔리고 상하고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 대신 당하신 것이므로, 이제 우리가 고통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사야가 생각합니다. ‘그는 진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구나! 그래, 예수님께서 나의 고난을 담당하셨구나! 나의 질고를 지셨구나! 나 대신 슬퍼하셨구나!’ 이 말씀을 확실하게 믿으면 우리는 질고에서 자유롭고, 슬픔에서 자유롭고, 원망과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자매, 주님이 우리 질고를 다 지셨다는데, 우리 고통을 다 담당하셨다는데, 우리 슬픔을 당하셨다는데 왜 슬퍼하고 괴로워해요?”
“형제, 괴로워하지 말아요. 그 짐 주님이 다 지셨어요. 형제가 질 게 어디 있어요? 지지 말고 놔둬요. 예수님이 다 책임지세요.”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고통하지 마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가 져야 할 슬픔과 고통을 모두 지셨습니다. 슬픔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소리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화를 내고 불평하다가도 ‘아니지, 예수님이 다 지셨지!’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져야 할 고통을, 질고를, 슬픔을 다 지신 것을 구원받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6절에 정말 신기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렇게 기록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사야가 이 말씀을 기록할 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니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실 것이다”라고 써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담당시키셨도다”라고 썼습니다. 아직 오시지도 않은 분에게 어떻게 담당시키셨지요? 앞으로 확실히 될 일에는 이렇게 쓰는 겁니까? 아무리 확실해도 미래의 일을 과거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간계로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계에 가면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습니다. 마치 강물은 계속 흘러서 바다로 가지만 연못 물은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이 영원계입니다. 그곳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현재만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늙지도 않습니다. 영원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상해 보지만,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영원계에서는 과거나 미래 없이 한꺼번에 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이미 존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이라도 ‘담당시키실 것이다’가 아니고, ‘담당시키셨도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죄도 ‘앞으로 사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이미 사해졌도다’입니다. 시간계인 지구에서는, 이사야가 53장 6절을 기록하고 700년 뒤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십니다. 
성경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잘한다고 했지만, 선하게 산다고 했지만, 양이 꼴을 뜯으러 제멋대로 가듯이 그릇된 우리 생각을 따라갔습니다. 우리 생각을 따라가는 삶 자체가 죄악이요, 더럽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사탄이 넣어준 생각을 따라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한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건 몰라도 죄의 문제는 네가 손대지 마라. 네 죄를 예수에게 넘길 때 하나라도 빠뜨리면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간다. 그러니 네가 넘기려고 하지 마라. 내가 넘길게.’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죄든지 손톱만큼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완벽하게 넘기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사탄이 눈을 가려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인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인 줄 압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거나 죄를 고백하거나 회개하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그처럼 무엇을 해서 구원받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 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죄 문제에 우리가 손을 대면 망칩니다. 혹시 아직 죄 사함을 분명하게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손을 놓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완벽하게 씻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이사야 53장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땅에서 일어날 일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1~6)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2,000년 전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하나도 보태지 않고 순수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으로 우리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졌습니다. 누구든지 ‘내 죄가 사해졌네!’ 하고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복음을 들어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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