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감 한 상자와 언제나 그리운 장팔리
[라이프] 감 한 상자와 언제나 그리운 장팔리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0.12.10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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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호 기쁜소식
땅끝까지 복음을, 끝날까지 주님과_251 | 박옥수 목사 간증

 

김종용 형제와 고구마 값
“전도사님, 나는 전도사님 때문에 고구마 값 내느라 애를 먹었어요.”
1964년, 내가 장팔리교회에 처음 갔을 때 교회에 초등학교 여학생 둘이 나오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미국에서 온 맥카피 선교사님이 계셨다. 거창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학교를 건축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 미국 교회에 가서 도움을 구했을 때, 맥카피 선교사님이 “나는 원래 목수인데 건축을 잘합니다. 내가 가서 학교 짓는 일을 해주고 싶습니다.” 하고 한국에 와서 거창고등학교를 지어주신 분이다. 
선교사님은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거창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장팔리에 땅을 사서 예배당을 지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조금 나오던 교인들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다가 선교학교를 운영하던 딕 선교사님에게 교회를 맡아 달라고 하셔서, 내가 압곡동에 있다가 1964년 3월에 장팔리로 옮겨 갔다. 나는 그곳에서 1년 반을 지내며 복음을 전했다. 
1965년 10월, 장팔리교회에서 1년 반을 보내고 군대에 가기 위해 교회를 떠날 때였다. 형제 자매들이 약간의 음식을 준비해서 송별회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김종용 형제가 말했다. 
“전도사님, 나는 전도사님 때문에 고구마 값 내느라 애를 먹었어요.”
하루는 김 형제가 집에 있는데 고구마 장사가 와서 ‘고구마를 다 팔고 두 관 남았는데 한 관(3.75kg) 값만 내고 사라’고 했다. 너무 싸서 사고 싶지만 돈이 없었는데, 문득 ‘교회 전도사님에게 가면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에게 사라고 이야기하려고 고구마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내가 고구마를 보더니 “김 형제, 안 그래도 고구마가 먹고 싶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주셨네.” 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김 형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구마를 그냥 나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갔고, 그 고구마 값을 갚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모두 크게 한바탕 웃었다. 

55년 만에 걸려온 김종용 형제의 전화
군에 입대한 뒤 휴가를 받아 장팔리교회에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보이는데 김종용 형제가 보이지 않아 너무나 섭섭했다. 그 후로도 만나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55년이 지난 올 봄에 김 형제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박옥수 목사님이십니까? 나 김종용입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김 형제는 내가 장팔리에 간 뒤 제일 먼저 구원받은 형제다. 1964년 4월쯤이라고 생각된다. 거창읍에서 교회로 가다가 길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김종용 형제, 다른 한 사람은 심재열 형제였다. 나는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두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그 뒤로 우리는 1965년 10월까지 세상에 다시없는 사이가 되었다. 두 형제는 세상에서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사람이었고, 내 생애에서 나에게 가장 기쁨과 힘을 주었다. 
거창은 시골이라 일거리가 없어서 김 형제와 심 형제는 양장점에서 일했다. 그런데 내가 군대에 간 뒤 후임으로 온 전도사님 때문에 김 형제는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하루는 그 전도사님이 김 형제에게 심심해서 새 라디오를 샀다고 자랑했다. 자기는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양장점에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평일에도 양장점에서 일을 마치고 교회에 오면 밤 11시쯤 되었기에 속이 상했다. 내가 전도사로 있을 때에는 밤 11시에 교회에 가면 그 늦은 밤에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을 읽게 해서 집에 가면 12시가 넘어 잠을 잤는데, 새로 온 전도사님이 심심해서 라디오를 샀다는 말을 듣고 ‘이분에게는 배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 그래도 바쁜데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교회를 떠난 김종용 형제에게서 55년이 지나 지난 봄에 전화가 왔다.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다. 경남 합천에 산다고 하며 나를 정말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마침 봄에 창원 KBS홀에서 집회가 있어서 가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기쁜소식금산교회에 다니는 한 형제와 교제할 일이 있어서 새벽에 금산에 가서 교제하고, 합천으로 떠났다. 
금산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해 12시쯤 되어 기쁜소식합천교회에 도착했다. 거기에 김종용 형제는 보이지 않았다. 김 형제는 약간 통통한 편인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몸이 약간 야위고 키가 큰 한 형제가 자신이 김종용 형제라고 했다. 우리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 생애에 그런 형제는 없었다. 그는 장팔리에서 심재열 형제와 함께 나를 만났고, 같이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는 1년 반 동안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귀한 모임을 가졌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장날이면 노방 전도를 갔고, 장날이 아니면 경찰서 유치장에 전도하러 갔다.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장팔리
내가 장팔리교회에 있는 동안 우리는 저녁마다 모였다. 형제 자매들이 10명, 20명, 30명으로 늘더니 얼마 안 되어 40명이 모였다. 모이면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서로 얼굴을 보면서 찬송을 불렀다.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이 변했네…
죄 짐은 갈보리 산 위에 예수는 우리 주…

우리는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불렀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장팔리에서 보낸 시간들이 나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귀한 시간이었다. 찬송을 마치면 돌아가면서 간증을 했다. 이어서 내가 말씀을 전하고, 기도회를 가진 뒤 모임을 마쳤다. 장팔리에 사는 사람들은 집으로 가고, 읍내에 사는 사람들은 밤 10시경에 자전거마다 3명이나 4명이 타고 함께 읍내로 갔다. 내 자전거에도 앞에 한 사람, 뒤에 한 사람 태우고 함께 읍내로 갔다. 형제 자매들이 다 집으로 가고 혼자 캄캄한 길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면서 마음에 한없는 기쁨이 넘쳤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었다. 그리고 모두 근심이 없었다.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마다 예배당이 잔칫집 같았다.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장팔리, 최고의 장팔리였다. 

내 마음은 다시 가장 아름다웠던 장팔리로 간다
금산을 떠나 합천으로 가면서 김종용 형제를 만나기까지 내 마음은 옛날 장팔리에 가 있었다. 그리고 합천 교회에서 김 형제를 만났다. 김 형제도 나를 찾았다고 했다. 한번은 차를 타고 압곡동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서 그 번호로 전화해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김 형제는 내 마음을 장팔리로 다시 데려가 주었다. 우리 마음이 함께 장팔리로 갔다. 그때 그 귀한 시간들이 내 마음에 찾아왔다. 우리는 가난했다. 자주 굶었다. 그래도 그때만큼 행복했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때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마음에 예수님만 가득해서 모두 한 마음이었다. 
지금은 교회에 형제 자매들도 많고, 부족한 것 없이 산다. 밥도 굶지 않고,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나는 장팔리가 너무나 그립다.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주셨다. 김종용 형제도, 심재열 형제도, 다른 형제 자매들도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 
며칠 전에 김종용 형제가 자신이 농사지은 거라며 감을 한 상자 보냈다. 아내가 감을 잘 익혀서, 내가 밤늦게 집에 가면 먹으라며 준다. 그러면 내 마음은 다시 김종용 형제에게로, 심재열 형제에게로, 장팔리로 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팔리로…. 그때 그 형제들이, 그 자매들이 다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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