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세 아들을 훌륭한 복음의 일꾼으로 키워주십시오”
[라이프]“세 아들을 훌륭한 복음의 일꾼으로 키워주십시오”
  • 글 | 오영신(독일, 기쁜소식프랑크푸르트교회 선교사)
  • 승인 2021.01.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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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_제1화

 

오영신 선교사는 미국에서 선교를 시작해 현재 독일 및 유럽에서 10년째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고故 오창명 목사는  35년 전 오 선교사가 열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당시 아버지는 세 아들의 인생을 박옥수 목사에게 부탁하셨다고 한다. 돌아보면, 그때 아버지의 결정은 삼 형제를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하는데, 12회에 걸쳐 오 선교사의 삶을 이끌어오신 하나님을 만나본다.

 

아버지 이야기
해마다 여름이면 월드캠프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 달 가량 한국을 방문한다. 선교사들에게는 너무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4년 전에도 월드캠프에 참석하러 한국에 갔다. 하루는 말씀을 전할 일이 있어서 기쁜소식강북교회로 갔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저녁때쯤 교회에 도착했다. 배가 아주 고파서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는데 여러 목사님도 마침 도착하여 같이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했다.
식사하는 데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오 목사, 혹시 오 목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아는가?”
“그때 저는 열세 살이어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36년이 지났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만 선명하게 기억날 뿐 함께했던 시간은 기억에서 거의 희미해져 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시절로 돌아가 보면, 아버지는 부산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님이셨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자랐다. 그렇게 내 인생의 기억은 시작되었다. 내 나이 열세 살이었을 때인 1985년 12월 14일, 그날도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만화방으로 오락실로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형과 동생은 아무 말이 없었고 함께 살던 이모가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기도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슬펐다.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충격으로 다가왔고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목사님이셨기에 하나님이 절대 데려가지 않으실 줄 믿었다. 죽음이 어색하기만 했기에 아버지가 꼭 다시 살아서 오실 것만 같았다.
“오 목사, 그때 나는 선교학생이어서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자주 병실에 갔었네. 그래서 오 목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일을 잘 아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내게 아버지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웠다. 식사하는 것보다 목사님의 이야기에 내 마음이 집중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박옥수 목사님과 여러 대화를 나누고는 마지막에 박 목사님의 손을 굳게 잡고 말씀하셨네. ‘박 목사님, 우리 세 아들 영도, 영신이, 영진이를 훌륭한 복음의 일꾼으로 키워주세요.’ 그렇게 당부하시고 돌아가셨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예,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에 대한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 어릴 적 기억에 아버지는 평소에도 몸이 약해서 자주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렇게 지내다가 1985년 겨울, 서울 한양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신 후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아버지는 마흔네 살의 젊디젊은 나이에 젊은 아내와 14세, 13세, 11세 철부지 세 아들을 이 땅에 두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결정
그날 저녁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5년 전 그때 내 나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와 비슷했고, 나에게도 아버지가 남기신 세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세 딸이 있었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더듬어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무엇을 가장 걱정하셨을지 생각해 보니, 그것은 철부지 어린 세 아들이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이제 영원한 하늘나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지만 어린 아들들은 험난한 세상에 떼어놓아야만 하는 운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을 것이다. 물론 아내가 남아서 돌보아줄 것이기에 한편 안심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아버지 없이 자라야만 하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하는 것일지, 죽음 앞에 서신 당신 자신보다 남겨진 자식들을 더 많이 생각하셨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신 뒤 마지막 결론을 내리셨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아버지의 결정은 나와 동생, 그리고 형의 인생을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내 인생을 너무 아름답고 복되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그런 지혜로운 결정을 하셨을까 싶었다.
그날 밤은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마음으로 불러보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결정이 계속 내 귓가를 맴돌았다.
“박 목사님, 우리 세 아들 영도, 영신이, 영진이를 훌륭한 복음의 일꾼으로 키워주세요.”
그러다가 이어진 생각이 있었다. 2001년 9월 미국 뉴욕에서 쌍둥이 빌딩 테러가 있었고, 다음 달인 10월에 나는 미국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LA에서 6년을 보냈다. 그때 나는 정말 문제가 많았다. 믿음은 없고 인간적인 생각에 꽉 잡혀서 미련하고 답답하게 살았다. 
박 목사님은 그런 나를 만날 때마다 많이 교제해주셨다. 하루는 나를 교제해 주시다가 내가 마음의 움직임이 전혀 없이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커다랗고 간절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듯 보면서 아주 잔잔하게 말씀하셨다.
“영신아,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죽어서 천국에 갈 텐데 그곳에서 너희 아버지를 만나면 그때 내가 너희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겠냐?” 
그렇게 말씀하시고 이야기를 마치셨다.
그때 나는 목사님이 내가 너무 답답해서 그냥 하시는 말씀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4년 전 그날 저녁에 그때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목사님이 내게 간절히 말씀하신 이야기는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박 목사님은 나를 훌륭한 복음 전도자로 만들어 달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으며, 내 인생을 책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떻게 목사님과 만나셨습니까?”
2019년 2월, 보름 정도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하루는 박옥수 목사님과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목사님께 꼭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버지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목사님,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목사님과 만나셨습니까?”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목사님은 지난 과거를 조용히 꺼내놓으셨다.
아버지는 1941년생이셨다.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였다. 1960년대는 한국이 정말 가난했을 때였다. 거창 고등학교에 전영창 교장 선생님이 계셨다. 거창에 학교를 지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는데 건축할 돈이 없으셨다. 그분은 영어를 잘하셨고, 그래서 미국까지 가서 여러 교회들을 다니며 도움을 요청하셨다.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미국 교회들이 모금해서 도와주었다. 그때 맥카피라는 분이 건축에 대해 잘 알고 계셨기에 학교 건축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맥카피 선교사님은 거창고등학교 건물을 짓고 장팔리에 하천 부지를 분양받아 예배당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 예배당이 바로 박 목사님의 간증에 자주 등장하는 장팔리교회였다.
처음에는 외국 선교사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교회에 몰려왔다. 그렇게 지내다가 맥카피 선교사님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장팔리 교회는 맥카피 선교사님이 양성하는 선교학교 출신의 전도사가 이어서 목회했다. 그러면서 교회 운영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 무렵 맥카피 선교사님으로부터 교회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딕 선교사님의 결정으로 압곡동에 계시던 박 목사님이 장팔리교회로 가셨다. 박 목사님이 장팔리교회로 가시면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고, 약 1년 반 뒤에 박 목사님은 군대에 가셨다.
맥카피 선교사님은 농촌에서 영농, 축산, 의료, 복지 등의 분야에서 선교하셨는데, 우리 아버지는 바로 맥카피 선교사님이 가르쳤던 선교학교에서 제2기 선교학생으로 훈련받으신 분이다. 박 목사님이 군에서 제대하고 김천에서 어린이 선교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한창 많이 필요했을 때 맥카피 선교사님이 박 목사님에게 자신이 훈련하던 선교학생들을 몇 달간 훈련해달라고 부탁하셨고 박 목사님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약속한 날 선교학생들이 오지 않고 며칠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박 목사님은 약속을 어긴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복음의 일에 합당치 않으니 다 돌아가세요.”
그 말을 듣고 선교학생들이 다 돌아가고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셨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복된 인생을 살고 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가 어떻게 박 목사님과 만나셨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기쁜소식선교회 안에 속하게 되었는지 알았다. 이 사실을 생각할수록 나는 아버지께 정말 감사했다. 이 세상 어느 분보다 내게 감사한 분이시다. 아버지가 그날 다른 선교학생들처럼 돌아갔다면 나는 지금 기쁜소식선교회의 목사가 아닌 다른 선교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박 목사님께 철부지 세 아이를 복음 전도자로 길러 달라고 부탁하셨을 때부터 박 목사님은 내 인생을 맡으신 분이 되셨다. 내 인생은 아버지에 의해 기쁜소식선교회 안에서 시작되었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하나님의 종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형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영국 런던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유럽에서 같이 선교하면서 내게 아주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동생은 두 딸을 낳고 한국에 있는 영상 선교부에서 바쁘고 행복하게 복음의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예쁘고 귀한 아내와 결혼해서 세 딸을 낳아 지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선교하고 있다. 우리 삼 형제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귀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형이나 동생 그리고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복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 가끔 한국에 가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척들을 만나곤 한다. 나는 친척이 참 많은데, 그들 가운데 우리 가정처럼 행복하게 사는 이들은 없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면 다들 우리를 부러워한다. 

다윗과 삼손의 차이
최근에 나는 다윗과 삼손의 차이를 자주 생각한다. 삼손도 분명히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가지 못해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 다니다가 두 눈이 뽑히고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 생이 비참하게 끝났다. 다윗도 똑같이 육체의 욕망에 끌려가서 삼손보다 더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살다가 말년에는 하나님의 일에 더욱 쓰임 받고 이스라엘의 가장 귀한 왕으로서 인생을 끝냈다. 
다윗과 삼손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똑같이 죄를 범했고 실수하고 오히려 다윗이 더 악한 짓을 했는데도 말이다. 그 차이는 너무 분명했다. 다윗 왕에게는 평생 그 옆에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 아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어릴 때는 사무엘 선지자가, 자라서는 나단 선지자가, 그리고 늙어서는 갓 선지자가 다윗 곁에 항상 있어서 다윗이 곁길로 갈 때, 또 하나님의 인도를 몰라서 방황할 때, 진정 다윗이 어려웠을 때, 옆에서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앞으로 돌이키게 해주고 평생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지 못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다윗과 삼손의 차이였다.
나도 많이 방황했고 곁길로 많이 갔고 누구보다도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나 같은 자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또 복음의 최전방인 유럽에서 선교사로 살 수 있을까? 물론 유럽에서 선교하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선교는 정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이 분명하다. 다만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영광을 볼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이 일은 인간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다만 내가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마음이 든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자신의 일평생에 함께 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리고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다윗을 따랐다고 한다. 그 지팡이와 막대기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어떻게 다윗에게 나타났는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셔서 평생 그 곁에 선지자를 두셨다. 하나님이 다윗의 평생을 그렇게 인도하셨듯이 지금까지 내 인생도 그렇게 하셨다. 남은 인생도 그렇게 될 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양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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