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오직 제사장이 일한다
[설교] 오직 제사장이 일한다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1.01.12 10: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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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_번제(3편)

 

번제물은 제사장에 의해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재만 남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자신의 악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 예수님이 처리하십니다.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제사장’
레위기 1장 번제에 관한 이야기에서 강하게 부각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제사장’입니다. 5절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이라고 되어 있고, 7절에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9절에는 “제사장은”, 11절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12절과 13절과 15절에는 “제사장은”, 17절에는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눈을 감고 번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번제를 드리려고 수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옵니다. 그 수송아지는 팔팔하게 살아 있기에 뒷발질도 하고 머리로 받으려고도 하고 ‘음매’ 하고 울기도 할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제사장이 그때부터 일하기 시작합니다. 송아지가 죽어서 피가 흘려지고, 껍질이 벗겨지고, 각이 뜨이고, 내장이 물로 씻겨지고…. 마지막으로 번제단 위에 벌여 놓은 나무 위에서 번제의 예물인 송아지가 불타면서 연기가 올라가고 재만 남습니다. 수송아지가 불에 다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제사장이 일합니다. 번제의 희생인 수송아지가 다 타서 재가 되고 마지막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제사장은 일을 쉬고 자리에 앉습니다. 
레위기 제사 강해 1회 글에서 ‘우리 육신의 모든 정욕과 모든 계획이 제단에 올려져서 불태워지고 재가 될 때 하나님이 열납하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처럼 우리 육신이 재가 되게 하려고 제사장이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레위기 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제사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들 
창세기 1장에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가 날아다니고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레위기 1장에 제사장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듯 창세기 1장에서도 거의 매절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셔서 변화된 모양들에 대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하나님이 보실 때 만족스러운 것,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인간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예수님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창세기 1장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 가운데 인간이 만 분의 일이라도 관여했다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일하는가, 하나님이 일하시는가?
창세기 2장에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다 하므로 안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곳이 인간이 자신의 뜻을 따라 무엇을 하기 시작하면서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아름다운 역사는 끝이 나고, 대신 슬픔과 고통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가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설교를 듣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 ‘그래, 맞아.’라는 마음이 들고, 그래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빛은 빛이 되려고 하지 않고, 소금은 소금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가만히 있어도 소금입니다. 소금이 되려고 해서 소금이 된다면 그것은 진짜 소금이 아닙니다. 어둠이 빛이 되기 위해서 애를 쓰면 빛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일하시는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성령이 우리 마음을 이끌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성경을 읽게 하고 전도하게 합니다. 빛과 소금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면 절대로 예수님처럼 행할 수 없습니다. 
비록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뒤로 제쳐놓고 자기 의지로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부터 좀 더 선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처럼 성도가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성령의 역사는 멈춥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마음으로 찬송하게 하는데, 거기에서 떠나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니까 성령의 역사가 그치고, 얼마 가지 않아서 충만했던 마음이 사라집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한 때부터 죽음과 슬픔과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왜 죽어갑니까? 신앙생활을 자신이 잘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장에서 번제의 제물이 불탔을 때 하나님이 흠향하셨습니다. 그런데 번제물이 불타도록 누가 일합니까? 송아지가 뚜벅뚜벅 걸어와서 스스로 목을 칼에 찔러 푹 쓰러져서 제단 위로 올라갑니까? 모든 일은 제사장이 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은 누가 합니까?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십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우리 육신을 불태우는 것을 보는 눈이 없어서 자기 육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고 합니다. 
누가 죄를 사함 받으려고 애씁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다 사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 육신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태우는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믿는 사람은 자기가 자신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것을 믿는 것과 자기가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레위기 1장에는 소의 성품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소가 무슨 일을 한 것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힘이 센 소이든 약한 소이든, 부드러운 소이든 억센 소이든, 고집이 센 소이든 순한 소이든 관계없이 절차가 정해져 있습니다. 일단 성막 안으로 들어가면 칼로 목을 찔려 피를 흘리고 쓰러집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꺼내서 물에 씻고, 모든 것을 불에 태웁니다. 힘센 소도 그 과정을 통과하고, 약한 소도 그 과정을 통과합니다. 발버둥치는 소도, 고분고분 따르는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에 의해 모든 과정을 거친 후 마지막에 재만 남습니다. 
신앙생활은 악한 우리가 스스로 그 악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 예수님이 처리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고 성경을 읽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기도하려고 하고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고통스런 길로 가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이처럼 형편없구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구나!’라는 마음으로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은 은혜를 입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을 때, 예수님이 지셔야 하는 모든 짐을 자신이 대신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자신이 대신 하려고 발버둥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맡아서 주관하실 수 있도록 맡기는 사람보다, 예수님에게 맡기면 주님이 맡아서 일해 주실 것을 믿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바꾸신다면, 우리가 애써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삶으로도 별로 어렵지 않게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바꾸실 수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미움, 음란, 악한 생각, 육체의 원함을 채우고 싶은 욕심 등이 일어날 때 ‘이런 마음을 없애야 하는데…’ 하고 자신이 그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단 위에서 우리 육신이 불타서 연기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는 제사장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그 제사장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연약함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된 습관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가난이나 어떤 형편에도 절대로 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육신의 모든 부분을 불태우고,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든지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나 자신의 문제들을 자신이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그 마음의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불편하게 지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주님, 당신이 하십시오.’ 하고 우리는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레위기 1장에서 제물인 수송아지가 제단 앞에 왔을 때 제사장에 의해서 그 가죽이 벗겨지고 각이 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에 의해서 내장이 꺼내지고 물에 씻겨지며, 제사장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이 불태워져서 연기와 재만 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제단에 수송아지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정욕을, 탐욕을, 육신 덩어리를, 우리 옛사람을 제단으로 끌고 가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도록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앞서서 일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보고 믿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우리를 바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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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2021-01-18 06:48:28
Yeah so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