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도 인간도 거리낌이 없어야
[설교] 하나님도 인간도 거리낌이 없어야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1.07.06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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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_화목제(1편)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다 열어놓아도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전혀 없이 떳떳하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같이 흘러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일이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내가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어떻게 해야겠다’는 법이 마음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생각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법이 생각을 이끌어 갑니다.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흘러나오는 것과 어떤 것이 우리를 끌고 가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예배,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전도, 마음에서 아무 구김 없이 흘러나오는 찬송,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받으실 때 만족하고 기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에도 참된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살면서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 담이 없었습니다. 어떤 법도 아담과 하와를 얽어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말 무서운 것은 그들 속에 그때까지 가져 보지 않았던 새로운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 생각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일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함께 흐르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했습니다. 오늘도 인간의 마음은 죄악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면 전에 갖지 못했던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이 자신과 다른 마음을 가진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따돌리거나 비방하거나 핍박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음에서 참된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집에 없을 때 갑자기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아내가 돈이 필요한데, 아내가 남편 책상 서랍을 열자 돈이 많이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돈은 분명히 남편 돈이고, 남편이 어디에 쓰려고 두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내가 쓰려고 하면 조금은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남편이라도 이 돈을 지금 이 일에 쓰겠다’는 마음이 들면 아내가 그 돈을 쓰는 데 있어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돈을 이렇게 쓰는 것을 남편이 분명히 싫어하지만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라면, 돈을 쓰는 데 있어서 자유를 잃습니다. 
오늘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도 좋아하시는 것이 되고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도 싫어하시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잠을 자든지 밥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참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법에 매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기도하려면 결심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철야 기도를 한다는데 나도 철야 기도를 해야지!’ 그렇게 결심한 후, 밤을 새워 기도하려고 커피를 잔뜩 마시고 밤늦게 교회에 갑니다. 밤이 되어 철야 기도를 시작했는데, 10분 정도 기도하고 졸기 시작합니다. 졸다가 무릎을 꿇은 채로 쿨쿨 잡니다. 
그런 현상들이 왜 일어납니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불행하게도 우리가 기뻐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기뻐하는 것과 아내가 기뻐하는 것이 같을 때 부부는 행복합니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아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부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사람들은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배에 참석하지만 마지못해 앉아 있습니다. 헌금하지만 ‘십일조를 안 내면 사업이 망한다더라’라는 마음으로 마지못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듭니다. 
“왜 십일조를 안 냅니까? 사업 망합니다!”
“예, 내겠습니다.”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사업에 어려움이 생길까 두려워 십일조를 냅니다.
“주일 안 지킬래요? 그러다 교통사고 날래요?”
“예, 지킬게요.” 
그렇게 주일을 지키니까 예배 시간에 마지못해 앉아 있다가 예배가 마치기 무섭게 나갑니다. 사람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법에 매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내가 예배를 드려야지. 십일조를 내야지. 성경을 읽어야지. 기도를 해야지….’ 그런 법에 끌려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법에 매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불쌍하게도 자신의 마음과 다른 율법에 매여서 살고 있습니다. 법에 매여 살면서 설령 마지못해 율법을 지킨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화목제에서는 예물이 수컷이든 암컷이든 상관없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제사가 나옵니다. 번제가 있고, 소제가 있고, 속죄제와 속건제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화목제는 다른 제사들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화목제의 규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레위기 3장 1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에는 그 예물이 반드시 수컷이어야 합니다.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예물이 수송아지, 수염소, 암염소 등으로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에서는 예물이 수컷이든 암컷이든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만을 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속죄제는 인간이 지은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화목이 이루어져야 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도 풀려야 하지만 인간의 마음도 풀려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이처럼 화목제가 다른 제사와 다른 점은, 하나님과 인간 양 편 다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도 거리낌이 없어야
많은 사람들이 마음 없이 예배당에 앉아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속으로는 ‘어휴, 시간이 왜 이리 안 가지? 목사님은 쓸데없이 설교를 왜 저렇게 길게 하시지? 간단명료하게 압축해 우주에서 먹는 식량처럼 작게 만들어서 떠먹여 주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할 소리 안 할 소리 길게 늘어놓지?’ 하며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증과 찬양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런 참된 예배가 이루어지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화목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녕하십니까? 이제부터 화목하게 지냅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싸우고 나면 종종 주변 사람들이 “어이, 이제 그만 화해해. 서로 악수하고 술 한 잔 마시자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은 그런 것과는 정말 다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한 형제가 다른 형제와 싸워 그 형제를 실컷 두들겨 팼다고 해봅시다. 한 사람은 마구 때리고 다른 사람은 실컷 맞았는데, 때린 사람이 “형제, 이제 화해하자.” 하면, 그 형제가 “예, 화해합시다.” 하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해도, 마음으로는 억울해서 ‘두고 보자!’ 하지 않겠습니까? 겉으로는 화해했지만 마음에서는 화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화해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참된 화해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보실 때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차원의 화목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 곳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길 원하시는 하나님 
성경 여러 곳에 화목에 관한 내용이 담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다 하려면 지면이 아주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화목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화목제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없이 예배에 그냥 참석하는 교인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다 열어놓아도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전혀 없이 떳떳하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사람들을 당신과 화목하게 만드는 일을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든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했다 해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당신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나 원수로 여기는 사람과도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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