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행위를 선택할 것인가,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설교] 행위를 선택할 것인가,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 글 | 임민철 (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21.09.16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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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호 기쁜소식
갈라디아서 강해_10편

 

갈라디아서 3장 8~14절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때는 진실하고 어느 때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진실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더한 사람도 없고 덜한 사람도 없고 사람은 다 악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말하면 기분 나빠 합니다.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저는 정말 악할 뿐입니다.” 하며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창세기 6장에서 인간을 향하여 선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우리가 자신을 보거나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악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악하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속에는 결코 선한 게 없구나’ 하고 인간을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내가 깨끗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나 말씀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마구 지으며 살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깨끗한 면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마구 지어도 되는가?’라고 반문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죄를 마구 짓는다고 더 악해지는 것이 아니고, 착하게 산다고 더 선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실 만큼, 인간은 악하고 거짓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이 구원받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진실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길 바라십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믿음의 길과 행위의 길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8~9)
하나님이 이방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는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표본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말하고 아브라함을 우러러보지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되려고 애를 씁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려고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전부 드릴 만한 위인입니까? 우리는 악뿐인 사람,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전부 드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나의 전부를 드려서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드린 예수님을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 어느 길이 좋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자기가 바르고 온전하게 살아서 의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다 ‘믿음의 길’을 선택한다면 아무도 행위를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의 길보다 자신이 율법을 지키고 선하게 살려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온전하고 반듯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대로 반듯하게 살아서 의를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지, 아니면 나에게 선이 없고 악뿐이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서려고 하는지,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 대해 모르고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사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다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에 기록된 대로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사람이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앞에 물체가 나타나면 운전자는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쪽으로 핸들을 틀어 옆에 탄 사람이 다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마음이 흘러갑니다. 상대를 보호하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자신처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좋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자기를 숨기는 것이 아주 안 좋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다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테니 이웃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셨습니다. 우리에게서는 결코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실망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길로 간다고 낙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보십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보십니다. 
저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안 됩니다. 가장 가까운 제 아내도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길을 포기했습니다. 아예 믿음의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더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절대로 행위의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을 지키려면 율법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해야 합니다. 성경 학자들이 율법을 세어 보니 613가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계명을 다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계명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율법에 기록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율법대로 살려고 선택한다면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행해서는 결코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야지 행위를 가지고 서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이 말씀대로 살려면 율법을 다 지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씀을 이루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해서 의를 이루든지, 아니면 모든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율법을 이루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12절에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행위와 믿음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가 항상 깨끗하고 온전해야 합니다. 이때는 깨끗하고 저때는 더러우면 안 됩니다. 항상 의로워야 합니다. 그렇게 살 자신이 없으면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져서 죄를 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이미 다 씻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인류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치르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고
히브리서 4장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연약함을 몸으로 다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넘어졌지만 예수님은 넘어지시지 않았습니다. 다 이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이기신 것을 믿음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여서 나도 이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형벌을 다 받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사람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었나?’ 하고 자신을 살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고,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은 죽은 적도 없고 산 적도 없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의롭게 되는 게 쉽나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이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의에 도달하려고 하면 절대로 도달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너무 쉽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행위로 말미암느냐, 믿음으로 말미암느냐
행위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믿음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내려야 할 결정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표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행위가 온전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 사라 때문에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느꼈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내가 아니라 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잘못한 일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인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행위로 말미암느냐 믿음으로 말미암느냐’,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느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느냐’ 이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원한다면 믿음의 길에 서야 합니다. 믿음의 길에 선다는 것은 ‘내가 믿음 편에 서겠다’고 각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체휼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구원받고도 믿음에 서지 않고 행위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그것이 정말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려고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은혜를 입고 영광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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