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먹는 제사
[설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먹는 제사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1.09.13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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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_화목제(3편)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 문을 열 때, 예수님은 우리 상태가 
어떻든지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더럽든지 
악하든지 우리를 당신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기름은 하나님께, 고기는 사람인 제사장에게
레위기를 보면, 제사를 드린 뒤 제물의 고기를 제사장들이 먹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의 경우에는 제사장이 그 고기를 먹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지정된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물론 번제의 경우에는 모든 것을 불태워서 드리기 때문에 먹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화목제는 번제와 조금 다릅니다. 화목제의 제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고, 그 가운데 한 부분은 하나님께 드리고 한 부분은 제사장이 먹습니다.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3:3~5)
여기 보면, 내장에 덮인 기름 등을 불에 태워 하나님께 화제火祭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7장에서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레 7:14~15)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면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함께 술을 마시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먹으면서 마음을 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은 하나님께 돌리고, 고기는 사람인 제사장에게 돌립니다. 이처럼 화목제는 하나님만 만족하시는 제사가 아니라 인간도 만족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면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앉아서 아무 근심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입니다.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누리는 참된 화목을 보여 줍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참된 화목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문제나 어려움은 우리가 져야 하는 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문제와 어려움을 능히 이겨 주시기 때문에 문제나 어려움이 찾아와도 고통이 되지 않고, 슬픔이 찾아와도 슬프지 않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 ‘그’가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이 자리에 누구를 넣을 수 있겠습니까? 덩치가 아주 좋고 힘이 센 사람이라 해도 그가 우리 질고를 짊어진다면, 그 사람이 우리 대신 질고를 당하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짐을 지워도 지울 만한 사람에게 지워야 합니다. ‘그’는 우리 질고를 질 수 있는 분, 우리 슬픔을 당하기에 능하신 분이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정월 대보름에 자기 더위를 다른 사람에게 파는 풍속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과 슬픔을 예수님에게 팔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쁨을 먹고, 예수님은 슬픔을 먹고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서 마음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어려움이 닥치고 문제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성도의 마음을 오랫동안 짓누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큰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는 것 같지만, 잠시 지나면 고통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지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아주 잘 먹는 사람과 함께 먹으면, 그가 양보하지 않는 한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먹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실력을 모르지만 우리보다는 먹는 실력이 뛰어나실 테니 혼자 다 드시면 우리가 먹을 게 뭐가 남겠습니까? 감사한 것은, 부모가 맛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주듯 예수님이 좋은 것을 다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대신 우리가 겪을 고통이나 슬픔이나 어려움은 예수님이 다 잡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먹으면 우리가 기쁨과 감사만 먹기 때문에 늘 기쁘고 감사하게 삽니다. 
구원받은 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이전과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달라질 조건이 전혀 없는데도 달라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화목제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이 어울려서 함께 먹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아무 거리낌 없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는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 문이 예수님 앞에서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닫힌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넣었을 때,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습니다. 무덤을 막아놓은 돌문을 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사로를 무덤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에게서는 썩은 냄새밖에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덤을 돌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죽고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에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셔서 그가 예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위치에 이르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읽어 보십시오.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먹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요한복음 12장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먹고 있습니다. 
돌문이 열릴 때, 나사로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예수님이 일하십니다. 그가 썩어서 냄새가 나든지 말할 수 없이 악하든지 예수님은 그를 당신과 화목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문을 열면’이라는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문이 열려야 예수님이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하든지 더럽든지 악하든지 가증스럽든지, 마음의 문을 열면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마음의 문을 여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마음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다고 성경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기 위하여, 우리에게 있는 추한 것을 다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약한 부분을 강하게 하고 병든 부분을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있는 나사로, 또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에게 “음식을 먹어! 먹어!” 하시지 않습니다. 먹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가 먹을 수 있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애를 쓰기만 하지,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나 봉사는 하는데,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 마음 문을 녹슬게 만들었지만
사탄은 이 세상에 마음을 열면 손해를 보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괴로운 일이 있어서 어쩌다 친구에게 진심을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가 빙 돌아서 자기 귀에 들어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만 바보가 되어 있습니다.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괜히 이야기했다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다시는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섭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처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을 쉽게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마음을 다 열지 않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마음을 다 열고 대화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오랫동안 열지 않아서 인간의 마음 문에 녹이 슬어 이제는 마음을 여는 것이 너무 어색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헌금 하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마음을 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속을 다 내보이면 사람들이 무시하고 따돌릴 것 같아 마음을 다 열지 않고 삽니다. 찬송가에 '그 사랑 내 맘 여시고 소망을 주셨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 마음을 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추하고 못나고 더러운 줄 알면서도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람들이 모르는 더럽고 악하고 추한 것들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우리가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 때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십니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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