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를 온전케 하신 화목제물, 예수님
[설교] 우리를 온전케 하신 화목제물, 예수님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1.10.12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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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_화목제(4편)

우리의 화목제물인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해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살면서는 우리에게 연약한 모습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온전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마태복음 22장에 어떤 임금님이 준비한 혼인 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금님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주어 그것을 입고 잔치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임금님이 손님들을 보러 왔는데,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그대는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성경은 그가 유구무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입은 있지만 할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추한 옷을 입고 잔칫집에 갔는데 입구에서 예복을 준다면 얼른 받아서 입지 않겠습니까? 예복을 입으면 누추했던 모습이 다 가려지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예복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틀림없이 좋은 옷을 입고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는 예복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입은 좋은 옷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잔치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하인이 와서 예복을 권합니다. 
“손님, 예복을 입으세요.”
“그런 거야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나 필요하지, 나는 필요없네!”
그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들어가 잔치를 즐겼습니다. 얼마 후, 임금님이 잔치 자리에 와서 보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그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임금님은 “오늘은 기쁘고 즐거운 날이니 그냥 즐기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끌어내 바깥 어두움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예복을 입은 모든 사람이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원래 내 모습은 어떻지?’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은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그 어떤 모습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먹고 즐기기를 바랐습니다. 임금님이 예복을 만든 목적이 그것 때문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예복을 입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잔치를 즐기기에 조금도 걸림이 없었습니다. 화목제가 바로 그런 제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기에 아무 거리낌이 없도록 모든 것이 구비된 제사입니다. 온전한 화목제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실제 모습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겠습니까? 자신이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과 정답게 이야기할 때 자신은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되어 ‘지옥에는 안 갔으니 다행이다’ 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 우리는 굉장히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의롭고 거룩하고 온전한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 살면서 친숙해진 관념들이 있습니다. 좋은 음식, 편안한 잠자리 등 육체가 요구하는 것들이 있어서 복음을 위해 힘있게 달려가지 못하기 때문에 늘 자신의 약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앉는 그날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연약함을 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우리가 온전하고, 우리가 보기에도 온전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이 드러날까봐 마음 졸이는 일이 다시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화목 제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화목은 하나님과 우리를 법으로 엮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 있어서 마음에 전혀 걸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참된 자유와 평안과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근심이나 부족함이나 다툼 등이 있지만, 하늘나라 잔치에 참예하는 날에는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화목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됩니다. 
안데르센이 지은 ‘미운 오리 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오리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데, 마지막으로 아주 늦게 나온 새끼 오리는 몸집도 크고 너무 못생겼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다른 오리 새끼들과 다르다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늘 괄시를 받았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홀로 정처 없이 다니다가, 세월이 흘러 어느 연못에 이르러 백조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연못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야, 저기 백조가 있다! 그런데 이쪽 편에 떨어져 있는 백조가 제일 예쁘다!” 아이들이 자기 쪽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에 미운 오리 새끼가 깜짝 놀랐습니다. 주위에 다른 백조가 있는지 둘러보니 자기 외에는 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려다보아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예쁜 백조가 있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원래 백조였습니다. 백조 알이 어쩌다 오리 알 속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자신이 백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새끼 때 못생겼거나 오리들에게 괄시를 받아도 슬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데르센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을 이렇게 적절하게 표현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미운 오리 새끼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 있지만, 장차 하늘나라에 가면 백조처럼 변합니다. 
새끼 백조가 미운 오리 새끼로 천대를 받을 때에도 백조였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게 변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면 ‘나는 왜 이리 못생겼을까?’ 하며 힘들고 외롭습니다. 성도가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바라보면 ‘나는 왜 이러지? 나는 안 되나 보다’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미운 오리 새끼가 태어날 때부터 백조였던 것처럼 성도는 구원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약하고 추한 모습을 벗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날이 옵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변한 자기를 보며 우리 자신도 놀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능력으로 거듭난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옛날의 우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전에 갖지 않았던 새로운 눈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면 어떤 일을 만나도 괜찮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은 무시를 당하거나 미움을 받으면 마음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동행하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갈 때 하나님이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야곱은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벧엘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비로소 뜨였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 눈을 밝게 만들어 줍니다. 그 눈이 뜨이면, 자신은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그런 자신을 온전케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온전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더 이상 매이지 않게 됩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자신이 장차 멋진 백조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 못생긴 자기 모습에 매일 필요가 없고, 매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화목제물인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해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살면서는 우리에게 연약한 모습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온전합니다. 

마음이 몸에 빠지지 말고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 죄를 다 씻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 죄에 대한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번제나 속죄제가 하나님을 만족하시게 하는 제사라면, 화목제는 우리 마음도 풀어 주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괴로워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히브리서 9장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 양심이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육체는 온전케 하시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면 버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몸에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자신의 몸을 멋지게 다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자주 변하고, 늙고 병들어 결국에는 죽습니다. 우리는 육체가 병들지 않으면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얼마 후 우리에게 더 귀하고 아름다운 몸을 입혀 주십니다. 
지금 몸은 감기만 들어도 맥을 못 추는 연약한 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이 몸 안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동안에는 때때로 불편함을 느끼고 몸이 고장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고장난 우리 몸을 고쳐 주시지만 이 몸으로 영원히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몸은 잠시 거할 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몸에 빠져 있지 말고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우리가 그 나라에 가면 놀랍게 변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겉사람은 연약하지만 속사람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게 온전하고 거룩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이끌어내 당신과 함께 앉아 있게 하셨다면, 나사로에게서 더 이상 썩은 냄새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고, 썩은 물이 흐르는 손으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먹는 우리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미 거룩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의 형상으로 나타나듯, 구원받은 우리도 잠시 후 육신을 벗으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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