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설교]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글 | 임민철 (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21.10.18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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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호 기쁜소식
갈라디아서 강해_11편

 

갈라디아서 3장 15~18절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 두 권으로 이루어진 ‘약속의 책’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5절부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 3:15)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도 약속에 의해 유지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5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서로 약속한 것들을 지키기 때문에 사회가 유지됩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갈 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 후 다윗이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이겨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자 시므이가 제일 먼저 다윗을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그가 다윗에게 용서를 빌어, 다윗이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시므이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죽은 뒤 솔로몬이 시므이를 불러 예루살렘에만 거하라고 하며 어기면 죽일 것이라고 하고, 시므이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3년 후에 그의 두 종이 도망가자 시므이가 그들을 찾으러 예루살렘을 벗어납니다.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솔로몬에게 고해,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약속대로 시므이는 죽임을 당합니다. 
다윗이 시므이와 약속했기 때문에 그가 죽을 죄를 지었지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고, 솔로몬과 약속한 후에는 예루살렘을 잠깐 벗어났다가 금방 돌아왔지만 약속한 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약속도 함부로 폐하거나 바꾸지 못합니다. 
성경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복을 약속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그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그 첫 열매고,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어 예수님에 이어 그 자손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절대로 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듣는 것이 그냥 읽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을 맺는 것입니다. 약속이 맺어지면, 이 약속은 절대로 파하거나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가 못나거나 어리석거나 악하다고 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약속을 결코 없앨 수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로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까닭에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조카 롯이 함께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이른 뒤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서 가나안에 머물지 못하고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 까닭에 자기 생명이 위태로울 것 같아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애굽 왕 바로가 사라를 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형편없었지만 도리어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한 롯도 많은 소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롯에게 소유가 많아지자 아브라함과 같이 지내는 것이 불편해졌습니다. 롯의 목자들이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자꾸 다투어, 아브라함이 롯에게 어디든 먼저 택하여 가면 자신은 반대편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롯은 물이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요단 들을 택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때 롯은 심판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창 19:29)
롯이 잘못된 길로 갔지만,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살리셨습니다. 롯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심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크게 범죄한 것에 대해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신 9:27) 
이스라엘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믿는 사람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믿지 않으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105:39~42)
이 시를 지은 시대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들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순간순간 하나님을 거슬렀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 너무 기뻐서 찬송하다가, 마라에서 쓴 물을 만나자 ‘우리가 언제 애굽에서 건져 달라고 했느냐?’고 원망합니다. 물이 달아지자 또 찬송했다가,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입니까? 시편 105편 말씀대로, 약속하신 말씀과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보고, 자녀를 보면…
성경은, 우리가 잘해서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못 하는 사람은, 기억해야 할 아브라함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기억하며 삽니까? 항상 자기 자신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사는 성도들은 자신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반대로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지 말아야 할 사람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구원받았다면서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라고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니라, 보지 말아야 할 자신을 자꾸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엄마 아빠가 복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 때문이야.”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그렇구나!’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삶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민 23:19~20)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다시 삼키시지 않고, 말씀하고 후회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실행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축복을 명하셨기 때문에 그 축복을 돌이킬 수 없다고, 민수기 23장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민 23: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허물이나 패역을 보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다. 거짓된 우리를 보아서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구원받은 성도가 왜 답답하고 곤고하게 지냅니까?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왜 화목하지 않고 가족들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허물과 잘못을 가족들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보고, 자녀를 보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아닌 우리 눈으로 보면, 여기저기가 문제와 염려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에게 의롭다고 하고 온전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이 말씀을 믿고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저도 전에는 저 자신을 보고 ‘나는 모자라, 연약해’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고, 그보다 큰 일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우리는 연약하고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면,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고,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맞지만, 율법이 오기 430년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그 율법으로 파할 수는 없습니다. 약속은 율법이 주어졌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보내신 것은, 약속을 파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굳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율법이 우리 마음에서 약속을 더 생각나게 하고, 약속을 더 의지하게 하고, 약속을 더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까닭에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심판을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깨끗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자녀의 허물은 부모의 허물입니다. 자녀가 아버지 앞에서 감추지 않으면 모든 것을 아버지가 해결합니다. 자녀들이 어렵게 사는 이유는 부모 앞에서 자기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가리고 살기에 부모와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행복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구원받았어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가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자신을 보거나 자신을 생각하면 절대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말이나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모습이 어떠하든지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고,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으며,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면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가 의롭고 온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축복하시거나 벌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에게 복을 주고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서 오늘 우리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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