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를 의롭게 한 화목제물
[설교] 우리를 의롭게 한 화목제물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1.11.17 1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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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_화목제(5편)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을 감추지 않고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의를 내놓으실 때 우리도 의를 내놓아야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를 하나님처럼 의롭게 만드는 것이 화목제물입니다.

 

 

번제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즐기는 평안이 없다
창세기 27장에는 ‘야곱과 에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야곱과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에서에게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라. 내가 먹고 마음껏 너를 축복하리라.” 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이야기를 그의 아내 리브가가 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축복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매끈매끈한 곳을 염소 털로 에서처럼 털이 많게 꾸미고, 에서의 옷을 입히고, 이삭이 즐겨 먹는 별미를 만들어 야곱의 손에 들려주어 아버지에게 가게 했습니다. 야곱이 나이 많아 보지 못하는 아버지 앞에 가자 이삭이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냈겠지만, 그 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다시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이삭이 야곱을 가까이 오게 하여 그를 만져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이삭이 자기 앞에 있는 아들의 목소리가 야곱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를 축복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것은 화목제가 아닌 번제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화목제의 필수 조건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먹는 것인데, 창세기 27장에서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함께 먹는 장면이 없습니다. 
“아버지, 이 음식이 맛있지요?”
“그래, 맛있구나. 너도 좀 먹어라.”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먹는 사람은 한 사람, 아버지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무엇을 했습니까? 속으로 떨면서 아버지가 음식을 빨리 먹고 자기를 축복해 주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형 에서가 사냥한 짐승을 들고 돌아올까봐, 불안한 태도로 자꾸 밖을 내다보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결국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먹고 마시지는 못했습니다. 여유가 있으며 의젓하게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을 졸이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설령 야곱이 먹고 싶었다 해도 달라는 소리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창세기 27장 이야기가 번제를 그린 것임을 보여 줍니다. 번제는 하나님만 만족시키는 제사이기 때문에, 번제를 드리는 인간의 마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평안도, 함께 먹는 즐거움도 번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는 화목제
구원받은 성도들이 번제에 대해서는 알지만 화목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축복을 받아도 번제 식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즐기는 평안이 없습니다. 화목제를 아는 사람들이 받는 축복은 번제만 아는 사람이 받는 축복과 많이 다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말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우리가 구원받은 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참된 화목이 형성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다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25절에서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등장합니다. 
화목이라는 말은,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려고 할 때 어머니가 “여보, 모르고 그런 건데 한 번만 봐줘요.” 하며 말려서 아버지가 매를 내려놓는 차원이 아닙니다. 또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뇌물을 주며 봐달라고 부탁해서 “그래, 내가 봐줄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은 눈이 어두워 야곱을 에서로 볼 수 있었고, 야곱이 가져온 별미를 먹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 앞에 있는 야곱은 초조하고 불안해서 아버지와 함께 먹고 즐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제사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못 보거나 눈을 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 문제가 없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나 추하고 더러운 부분을 하나님이 묵인하고 눈감아 주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하나님 편에서는 혹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참된 화목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늘 자유를 잃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교통경찰 앞에서나 어떤 감독관 앞에서는 자유가 없어도 괜찮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마음에 참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자유롭게 지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면 마음이 눌리고 불안하고 불편하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를 내놓으실 때에 우리도 의를 내놓아야 
창세기 27장에 나오는 이삭과 야곱의 관계로는 우리가 절대로 하나님과 함께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화목이 이루어지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속을 다 드러내도 떳떳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 씨와 김 씨가 각각 10만 원과 1억 원을 가지고 함께 여행을 갔다고 해봅시다. 박 씨는 10만 원으로 여행 경비를 쓰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하기 때문에, 매일 ‘오늘 돈을 얼마나 썼지?’ 하며 생각이 복잡합니다. 그에 반해 김 씨는 자유롭게 돈을 씁니다. 둘이 여행을 하다가 하루는 김 씨가 “오늘은 좋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할까요?” 했습니다. 박 씨는 김 씨가 사주는 줄 알고 “좋지요.” 하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다 먹은 뒤 김 씨가 박 씨에게 각기 먹은 음식 값을 내자고 하면서 “돈이 없습니까? 저는 많은데요.” 하고 자기가 먹은 음식 값만 내고 나가버린다면, 두 사람이 어떻게 화목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식사할 때마다 김 씨가 돈을 다 내도 화목할 수 없습니다. 한두 번은 얻어먹을 수는 있지만 매일 얻어먹으면 부담스러워서 함께 다닐 수 없을 것입니다. 둘이 함께 다니면, 두 사람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박 씨의 마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차라리 얻어먹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짜장면을 사서 먹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한쪽 편만 돈을 쓰면 두 사람이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화목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기에 손색이 없게 해놓아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이 말씀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을 감추지 않고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의를 내놓으실 때 우리도 의를 내놓아야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실 때, 의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먹기는커녕 마음이 눌리거나 기가 죽을 것입니다. 화목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께서 “나는 의롭다.” 하고 의를 나타내실 때 우리도 “저도 의롭습니다.” 하고 의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는 의롭다.” 하실 때 “저는 죄인입니다.” 하면 화목할 수 없습니다. 의가 없고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의로운 수준으로 올려놓아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는 것이 화목제물입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여기에서 누가 의롭습니까?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의롭습니다. 그러면 온전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 못하셨다면, 그분은 화목제물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봐주셔서는 절대로 화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려면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라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의롭다고 하셨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의롭다.” 하고 의를 내놓으실 때 우리도 “저도 의롭습니다.” 하고 의를 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참된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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