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행위는 두고, 믿음만 가면 된다
[설교] 행위는 두고, 믿음만 가면 된다
  • 글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21.12.18 1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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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_레위기 제사 강해_화목제(6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과 ‘행위’를 다 가지고 가려면 예수님이 의의 옷을 두 벌 준비하셔야 하지만, 예수님은 한 벌만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둘인데 양복은 한 벌뿐이라면
박옥수 목사의 간증을 하나 소개합니다. 
“제가 군에서 제대한 뒤, 저보다 한 살 어린 청년이 구원받아 저와 함께 지내면서 복음의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고 마음도 비슷해서 함께 지내는 것이 참 편했습니다. 한번은 둘이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 제목은 ‘햇볕이 쨍쨍 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9월 20일경이었는데, 제가 형제의 결혼을 주선했습니다. 형제는 스물넷, 자매는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형제는 고아로 자라 가진 것이 없지만 사람만은 확실해, 신부 측 어른들과 이야기가 잘 되어서 그날 선을 보러 오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입고 갈 옷이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낡은 양복이 한 벌 있었지만 형제에게는 양복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체격이 비슷해 필요할 때마다 그 양복을 번갈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둘 다 가야 하는데 양복은 한 벌뿐이어서, 둘 다 양복을 입지 않고 가기로 했습니다. 초가을이어서 양복을 입지 않으려면 날씨가 더워야 해서, 며칠 전부터 선을 보는 날 오후에 햇볕이 쨍쨍 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양복도 없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날 우리가 기도한 대로 더운 날씨를 주셨습니다. 
형제가 선을 보러 갈 때에는 제가 함께 가야 했지만, 결혼하는 날에는 제가 꼭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가서 축하해 주면 기쁘고 즐겁겠지만, 제가 안 가도 신랑만 가면 결혼이 됩니다. 그러면 양복이 한 벌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실제로는 형제가 선을 본 자매와 얼마 후 결혼했고, 새 양복도 한 벌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이고, 하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몇이 가느냐입니다. 만일 혼자 간다면 혼자 입을 옷만 있으면 됩니다. 둘이 간다면 둘이 입을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예비하신 ‘의의 옷’은 한 벌입니다. 둘이 가려고 하는데 옷이 한 벌뿐이라면, 누가 가고 누가 빠져야 하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믿음에게 입혀서 가느냐, 행위에게 입혀서 가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만 의의 옷을 입으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과 ‘행위’를 다 가지고 가려면 예수님이 의의 옷을 두 벌 준비하셔야 하지만, 예수님은 한 벌만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위, 둘 다 갈 필요가 없고 믿음 하나만 보여드리면 됩니다.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은 우리 행위를 보시지 않고 믿음만 보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의의 옷을 입고 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네가 의롭다” 하십니다. 행위는 입을 옷이 없으니까 집에 두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가 벌거벗었든지 추하든지 더럽든지, 그런 것은 전혀 상관할 바 없습니다. 결혼할 때 신랑은 꼭 가야 하지만 친구는 식장에 가지 않고 집에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믿음만 의의 옷을 입고 가면 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이 말씀은, 결혼식에는 신랑만 가면 되기 때문에 신랑 친구는 집에 앉아서 무슨 옷을 입고 있든지 전혀 상관할 바 없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행위를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를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온전하게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얼마만큼 의롭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보실 때 흠이 전혀 없을 만큼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큼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데 있어서 마음에 부담이나 걸림이 전혀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주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위를 가지고 나가면 우리는 맥을 못 춥니다. 사탄은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 행위를 드러냅니다. 잘못된 행동, 실수한 일, 죄를 지은 것, 추하고 더러운 부분을 드러내 우리 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효력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를 보시지 않고 믿음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겸손하게 ‘죄인’이라고 해야 한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번제는 하나님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만 아니라 우리도 만족하는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일을 이루는 화목제물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지낼 때뿐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또한 의롭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이 말씀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경건치 않은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을 때 그 사람은 의인이었습니까, 죄인이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여기 봐라.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았냐?” 하며,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의롭게 봐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나타내셨다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사실과 다르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기 전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셨는지, 로마서 5장 6절을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예수님이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 죽음으로 경건치 않은 자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을 보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어느 면으로 보아도 우리 속에서 불의를 찾으실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온전해졌습니다. 
실제로는 없는 일이지만,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불의를 발견한다고 해봅시다. 우리에게서 어떤 잘못이나 죄를 발견한다고 해봅시다. 그 죄나 잘못들 역시 예수님이 못박히신 십자가에서 그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을 예로 들어 이야기해 봅시다. 
“아주머니, 이거 얼마예요?” 
“5,500원이에요.” 
“내가 돈을 5,000원밖에 안 가져왔네요. 500원은 내일 드릴게요.”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이튿날 500원을 가져다주면, 전날 500원을 주지 않은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값을 다 지불하면 물건을 가져온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움을 겪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약점을 잡아 우리를 부끄럽고 괴롭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가책에 빠뜨리려고 우리 삶에서 추하고 더러운 부분을 발견해 낸다 해도, 그것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이미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송사할 이유도 없고 효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겁고 떳떳하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웅크리거나 떨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의롭지만 그래도 겸손하게 죄인이라고 해야지요.”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겸손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죄인이 맞으니까, 마음에 있는 소리를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뒤 겸손해질수록 더 담대하게 의인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셔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처럼 자기 정체가 들통날까봐 가슴 졸일 일 없이
예수님의 피로 우리 마음에서 모든 죄가 씻어져 있어야 합니다. 죄가 눈같이 희게 씻어져 있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을 얕보고 자신이 무엇이 부족할까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해주는 화목제물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의롭다고 하실 만큼 우리를 의롭게 해놓으셨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으면서, 자신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라는 사실이 들통날까봐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더럽거나 악한 사람인 것이 들통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로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에 손톱만큼도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를 의롭게 해놓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사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의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행위가 어떠하든지 거기 매이지 않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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